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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그레브(Zagreb)의 숙소 근처인 반 옐라치치 광장(Ban Jelačić Square)에서 북동쪽으로 캅톨(Kaptol) 언덕을 올라갔다. 언덕 위에 서니 자그레브 대성당(Zagreb Cathedral)이 한눈에 들어왔다. 1093년에 헝가리의 라디슬라스(Ladislas) 왕이 건설을 시작하여 1102년에 완공했으니, 천년 역사의 오랜 성당이다. 눈 앞에 다가선 대성당은 생각보다 굉장히 크고 높았다.

자그레브를 대표하는 이 대성당은 시내 어디에서나 보이는, 하늘을 찌를 듯한 두 개의 첨탑이 인상적이다. 마치 쌍둥이 탑처럼 보이는 네오고딕 양식의 이 첨탑은 북쪽 첨탑의 높이가 105m, 남쪽 첨탑의 높이가 104m이다. 남쪽 첨탑이 낮은 이유는 놀랍게도 1880년 자그레브를 강타했던 대지진의 영향 때문이다.
 
천년 역사의 오랜 성당으로 크로아티아의 가톨릭을 상징한다.
▲ 자그레브 대성당. 천년 역사의 오랜 성당으로 크로아티아의 가톨릭을 상징한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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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첨탑은 수년간 보수공사 중이다. 대지진 당시 큰 피해를 입은 대성당은 20세기 초반에 한 차례 재건을 하였다. 그러나 재건 당시 품질이 떨어지는 석재를 사용하였고, 도시의 오염으로 인한 석재 손상도 진행되어 지금도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남쪽 첨탑은 10세기 때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 원형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보수 중인 이 첨탑의 가림막에는 실제 첨탑의 모습이 똑같이 그려져 있다. 가림막 뒤에 숨은 첨탑의 모습을 누구나 상상할 수 있고 시각적으로도 깔끔한 게 참으로 마음에 든다.

대성당 앞에는 성모 마리아 기념탑이 우뚝 솟아 있다. 마치 하늘 위에 솟아 있는 듯한 성모 마리아 상은 황금빛으로 화려하게 번쩍거리고 있다. 그 아래에는 4명의 황금 천사상이 성모 마리아를 중심으로 빙 둘러서 있다. 이곳이 바로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수호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하늘 위에서 황금빛으로 번쩍거리고 있다.
▲ 성모 마리아 상. 하늘 위에서 황금빛으로 번쩍거리고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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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7년에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된 자그레브 대성당은 성모승천 대성당이라고도 불리울 정도로 성모를 극진히 모시고 있다. 성모 마리아가 길다란 석재 기둥 위에서 양손을 내려 편 채로 대성당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무척이나 성스러워 보인다.

대성당 바깥쪽으로는 긴 성벽이 지나가고 있다. 중세에 그라데츠(Gradec)와 캅톨(Kaptol)을 나누던 이 성벽은 이제 자그레브의 일부이자 대성당의 일부가 되어 있다.

이 성벽은 14세기부터 비잔틴 제국을 위협하며 발칸 반도를 정복해 나갔던 오스만 투르크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겨난 것이다. 크로아티아를 침공했던 오스만 투르크 군대로부터 자그레브의 가장 중요한 성당인 자그레브 대성당을 보호하기 위하여 15세기~16세기에 이 성벽이 건설되었던 것이다.
 
자그레브 대지진의 엄청난 피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지진으로 멈춘 시계. 자그레브 대지진의 엄청난 피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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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벽 한 중앙에는 멈춰버린 시계라고 불리는 시계가 박혀 있다. 마치 녹이 슨 듯한 진한 갈색의 시계바늘이 방금 전에 멈춘 듯이 멈춰 있다. 이 시계는 대성당 첨탑에 걸려 있다가 대지진 당시 멈춘 시계인데, 1880년 11월 9일, 7시 3분 15초를 가리키며 멈춰 있다. 이 시계는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당시 지진이 얼마나 엄청난 피해를 주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계이다.

이 멈춰버린 시계 앞에는 대지진 당시 무너진 옛 첨탑의 석재가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동일한 모습으로 복원된 첨탑 석재가 함께 전시 중이다. 비바람에 풍화되고 이끼 낀 옛 첨탑은 왜 현재 대성당 첨탑을 복원하고 있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반영구적이라고 생각되는 건축재인 석재도 이렇게 뭉개지는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한 건축물은 없다는 진리를 다시 느낄 수 있다.
 
자그레브 대성당은 고요함 속에 경건함이 느껴진다.
▲ 성당의 신자들. 자그레브 대성당은 고요함 속에 경건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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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건한 표정의 신자들을 따라 자그레브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세계적으로도 손 꼽히는 제단을 찾아갔다.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자그레브 성당의 바로크 양식 제단. 대성당의 역사가 묘사된 이 제단은 번쩍거리는 은으로 제단 전체가 장식되어 있었다. 중세 시대에 최고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이 제단은 자그레브 대성당이 '크로아티아의 보물'이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키릴 문자의 원형으로 중세 때 크로아티아에서 사용했던 문자이다.
▲ 크로아티아 상형문자. 키릴 문자의 원형으로 중세 때 크로아티아에서 사용했던 문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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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그레브 대성당 안에는 역사적인 크로아티아의 문자도 남아 있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 수난상 뒤 벽면에 대성당 초기에 새겨진 크로아티아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키릴 문자의 원형인 이 상형문자는 대성당을 건축할 당시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 멋진 문자가 10~16세기에 크로아티아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문자라고 하니, 크로아티아인들의 역사적 저력이 놀랍기만 하다.

나는 자그레브 대성당을 나와 또 다시 길을 나섰다. 천천히 산책을 하면서 그라데츠 언덕 입구에 있는 스톤게이트를 찾아 갔다. 캅톨 언덕을 내려와 이바나 트칼치차(Ivana Tkalčića) 거리를 지나는데, 수많은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카페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거리의 야외 카페에는 흐린 날씨 속에서도 수많은 젊음이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기독교의 성인이 악의 상징인 드래곤을 짓밟고 있다.
▲ 성 조지 상. 기독교의 성인이 악의 상징인 드래곤을 짓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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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게이트를 오르는 언덕길 앞에 도착하니 드래곤을 밟고 있는 청동 기마상이 나타났다. 기독교 초기에 순교한 14명 성인 중의 한 사람인 성 조지(St. Georgius) 상이다. 성 조지는 시민들을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해서 참수형을 당한 성인인데, 유럽인들의 전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 성 조지 상은 악의 상징과 같은 드래곤을 무찌르는 전설 속의 이야기를 형상화하고 있다. 메기 같이 큰 수염이 있는, 돌로 만든 드래곤은 성 조지 아래에서 꿈틀대고 있다. 드래곤은 생긴 모습 때문에 왕으로 상징되는 동양의 용으로 오역 되고는 하는데, 드래곤은 서양에서는 악을 상징하는 전설 속의 동물이다. 이 악의 상징인 드래곤을 무찌르는 수호 성인 성 조지는 현재 악을 발로 누르며 제압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제물을 요구하는 드래곤을 백마를 타고 무찔렀다고 하는 전설과는 달리 성 조지 기마상은 검게 빛나고 있다. 검은 성 조지 상은 그라데츠 언덕을 들어가는 스톤 게이트 앞에서 오늘도 자그레브 성을 성실히 지키고 있다.

곡선형 오르막길을 올라 드디어 도착한 스톤 게이트는 1266년에 지어진 옛 자그레브의 성문이다. 터널 같이 생긴 이 아치형의 돌의 문은 원래 올드 타운으로 들어가던 4개의 성문 중 북문인데, 지금은 성문 중 이 스톤 게이트 한 곳만 남아 있다.
 
자그레브 대화재 당시에 불에 타지 않고 남겨진 성스러운 그림이다.
▲ 스톤 게이트 성모상. 자그레브 대화재 당시에 불에 타지 않고 남겨진 성스러운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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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문은 현재 단순한 돌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1731년 자그레브 대화재 당시에 모든 성문이 불에 탈 때에 이 성문 안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나무 장식이 많았던 이 성문 내부도 모두 불에 탔지만 신비롭게도 그림 한 점만이 전혀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 그림은 바로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그림이었다. 그 후 이 성모 마리아 그림은 크로아티아의 가톨릭에서 아주 신성시하는 그림이 되었고, 이곳은 자그레브의 성지가 되었다.

스톤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니 이른 아침 시간임에도 크로아티아의 가톨릭 신자들이 꾸준히 찾아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유독 빛나는 한 장소 앞에서는 크로아티아 여인 2명이 경건한 모습으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녀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니 작은 예배당 같은 공간 중앙에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었다. 이 그림은 화재에서도 기적같이 살아남은 성모마리아 그림이었다.

이 성스러운 그림은 1778년에 바로크 양식으로 제작된 정교한 철문 안에서 보호받고 있다. 성모 제단 앞에는 꽃병에 담긴 생화들도 가득 차 있었다. 바로크 양식 제단 위의 성모 성화를 자세히 보니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모두 황금으로 된 왕관을 쓰고 있다. 원래의 성 모자는 왕관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1931년에 성화 안에 왕관을 덧붙여 그려 넣은 것이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 작은 성화가 얼마나 크로아티아인들로부터 사랑을 받는지 알 수 있다.

스톤게이트 안쪽에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작은 예배당이 있고, 꽤 많은 사람들이 차분하게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작은 성지지만 느낌이 남다른 곳. 저절로 경건한 마음이 드는 곳이다.
 
크로아티아인들이 이곳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 수 있다.
▲ 촛불을 밝히는 신자. 크로아티아인들이 이곳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 수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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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게이트 내부는 상당히 어두운데 한쪽 벽면에서는 촛불이 흔들거리며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기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체코, 슬로바키아 여행기를 게재하고자 합니다.


태그:#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여행, #자그레브, #자그레브여행, #자그레브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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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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