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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획은 미국 외교정책의 변천 속에서 동아시아, 한반도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종래 대부분의 연구는 한반도문제를 중심으로 미국의 외교정책을 논의했다. 이 기획은 반대로 미국외교정책의 특징을 고찰하는 가운데 한반도문제를 살펴본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미국의 외교정책사는 기존 유럽나라들과는 결이 다른 정치문법을 채택해온 역사이기 때문이다.

외교정책 상의 변형과 변주, 애매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흐르는 미국외교정책의 내적 핵심과 문법이 있다는 게 필자의 핵심 주장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미국과 동아시아, 미국과 한반도 관계의 역동적 변화상을 보다 잘 이해하고 들여다 볼 수 있다고 판단한다. - 기자말 

  
1945년2월 얄타회담의 3국 정상 종전 후 국제질서를 획정한 얄타회담에서 한반도에 대한 논의는 전혀 없었다.
▲ 1945년2월 얄타회담의 3국 정상 종전 후 국제질서를 획정한 얄타회담에서 한반도에 대한 논의는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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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종전처리 방향은 '무조건 항복론'의 채택으로 거반 결정 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미국 내에서도 '무조건 항복론'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다. 천황제를 존속시키는 조건으로 일본이 항복 메시지를 발신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항복론'이 일본의 결사항전 의지에 불을 질러서 전쟁을 불필요하게 장기화했고 급기야 원자폭탄을 사용하는 등 참혹한 결말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무조건 항복론'이 일본에게 엄청난 공포감을 일으킨 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실제로도 일본은 미국이 아니라 소련을 상대로 종전교섭을 시도하거나 미국과의 종전교섭에 소련의 중재를 요청하기도 했다.

'무조건 항복론'이 전쟁을 불필요하게 장기화했다는 주장은 결과론 혹은 사후적 해석에 가깝다. '무조건 항복론'이 아니었다면 일본은 외교적 교섭을 통해서 한반도는 물론, 동아시아에서 전쟁 전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어떡하든 모색하려 했을 것이다. 일본의 외교적 방식에 의거한 종전 방안에 대해 미국에서도 상당한 지지가 있었다. 대표적 사례가 후버 전 대통령과 국무장관 서리였던 그류 전 주일대사가 추구한 외교적 종전 교섭 노력이다.

후버 전 대통령은 종전에 관한 일본의 외교적 입장을 전하기 위해 트루먼 대통령을 면담했다. 이에 트루먼 대통령의 권유로 1945년 5월 29일, 모종의 각서를 스팀슨 전쟁부장관에게 전달했다. 동 각서는 일본을 철저하게 패퇴시켜 종전을 단축하면, 러시아를 견제할 세력을 극동에서 완전 제거함으로써 러시아만을 그 지역의 유일패권세력으로 만들어 주게 되므로, 국체, 곧 천황제를 보존하고 조선과 대만을 계속 영유케 하는 것을 포함한 완화된 대일 종전 안을 제시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논지는 지난 수개월 동안 일본이 스웨덴, 바티칸, 스페인 등 막후외교를 통해 내세운 주장과 동일했을 뿐만 아니라, 아나미 일본 육군상의 주장과도 똑같았다.

스팀슨 장관은 6월 1일 참모들에게 각서 내용을 전달하면서 논평을 지시했다. 이에 링컨 전략정책단장은 6월 4일자 메모에서, 미국의 대일 조치와 관계없이 소련은 극동에서 우월해질 것이며, 카이로선언과 얄타협정 때문에 미국은 한반도와 대만을 일본에게 양여하는 안에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을 상부에 제출했다. 마샬 참모총장 역시 링컨 단장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메모를 스팀슨 장관에게 제출했다. 이 견해를 스팀슨 장관은 수용하여 포츠담 회담장에 그대로 가져가서 무조건 항복원칙에 변함이 없음을 천명했다(김기조, 2010:43-44).

그류 전 주일대사가 행했던 외교적 종전 교섭 노력 역시 이와 비슷했다. 그류 당시 국무장관 서리는 1945년 6월 18일 트루먼 대통령과 만나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외교적 방안에 관해서 논의했다. 그류의 전략은 '무조건 항복'이라는 정의를 가다듬어 일본의 천황체제의 존속을 보장함으로써 일본 내 강화파들을 자극해 일본 본토로의 진공작전을 전개하지 않고 전쟁을 종식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는 천황의 권능을 활용해서 소련의 대일참전 전에 종전을 할 수 있다면 미군 희생도 줄이고 일본 점령도 단독으로 가능하게 하는 장점이 있다고 강조했다(Frank, 1999:214~215)

트루먼 대통령은 그류 국무장관 서리의 제안을 관계 장관 및 각 군 참모총장들이 협의해 보라고 지시했다. 그류는 다음 날인 6월 19일, 스팀슨 전쟁부 장관, 포레스탈 해군부 장관 및 마셜 참모총장을 만났다. 그들은 기본개념에는 동의했지만 시기포착의 문제를 제기했다. 다른 경로에서도 반대하는 의견들이 감지되자 그류는 5월 30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의견수렴에 실패했음을 보고했다.

사실, 후버와 그류의 제안에는 현실주의자들이라면 기꺼이 동의했을 법한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봉쇄정책을 입안한 조지 케난 역시, 훗날 외교를 통한 일본과의 종전교섭이 최선이었음을 밝힌 바 있다(Kennan, 2012:56). 심지어 태평양전쟁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의 이익을 무시하고 일본인들이 아시아 대륙에 보유하고 있는 입지를 미국이 난도질해서 발생한 결과"(Kennan, 2012:52)로 분석했다. 하지만, 미국은 외교적 교섭에 의한 종전안을 거부했고, '무조건 항복'이라는 군사적 행동주의에 우선순위를 부여했다.

종전 후, 일본의 영향권 하에 있던 동아시아를 어떤 방식으로 처리할 것인가가 미소 사이에 최대 현안으로 부상했다. 핵심은 역시 만주에 관한 처리 문제였다. 미국은 카이로회담에서 만주를 중국에 반환하기로 장개석에게 약속했다. 하지만 일본의 저항이 예상외로 완강하고 전쟁이 장기화하자, 1941년 일본과의 불가침조약 체결로 태평양 전쟁에서 중립을 견지하던 소련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얄타협정을 통한 미국과 소련의 합의, 그러나...

얄타협정을 통해 미국과 소련은 전후 동아시아 처리에 관해 큰 틀에서 합의했다.특히, 러일전쟁 이전의 러시아의 권리를 확인시켜줌으로써 만주를 소련에 넘겨주기로 약속했다. 포츠머스조약에서처럼 중국과 협의를 거친다는 무의미한 단서조항이 붙긴 했지만 말이다. 이제 남은 것은 패전국 일본 처리 문제였다. 여기에는 일본 본토와 조선, 대만 등 식민지가 모두 포함됐다. 사실, 식민지를 포함한 패전국 일본 처리문제에 대해 미국과 소련은 완전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고,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당시로는 완전한 합의에 도달할 상황도 아니었다.

미국으로서는 소련의 참전이 절실했다. 따라서 패전국 일본의 처리 방향 역시 미소가 유럽에서 했던 방식과 유사하게 진행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 방식이란 스탈린이 주장한대로, 자국 군대가 점령한 지역이 그 나라의 영향권이라는 논리였다. 미국은 이러한 소련의 주장에 대해 현실적 고려를 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여건상 종전 후 만주와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은 소련에 비해 미미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일본 및 태평양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확실히 확보하기로 마음먹었다. 미국과 소련의 극동지역에서 작전반경은 대체로 이 구도 하에서 합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종전원칙의 합의였지, 현실에서의 상황전개는 다르게 흘러갔다. 카이로선언에서 독립을 약속한 한반도를 어떤 식으로 처리할 것인가를 놓고 미국과 소련 사이에 사소한 쟁점이 발생했다. 왜냐하면 큰 줄기는 이미 한반도문제의 처리방향 역시 원칙적으로는 만주는 소련, 일본은 미국이 점령한다는 종전 기본계획안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얄타조항에 관해서 스팀슨 육군부 장관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얄타의 극동 문제 합의에서 소련에 양보한 것은, 미국이 전쟁을 하지 않고도 소련의 군사력을 활용해 얻어낼 수 있는 것들이다. 육군부는 미국군대가 남사할린, 만주, 조선, 북중국을 점령하기 이전에 소련이 일본을 군사적으로 패배시키고 이들 지역을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예외는 쿠릴뿐으로, 미국은 쿠릴에서의 소련 행동을 저지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이 소련의 의도를 좌절시키기 위해 쿠릴 열도를 점거한다면, 그것은 일본을 항복시키기 위한 주요 작전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허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국 병사들의 큰 희생을 초래할 것이다"(하세가와 쓰요시, 2019:166).
 

미국의 군사작전 범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맥아더 태평양지역 사령관의 전략구상 역시 이러한 기본계획 하에서 마련된 것이었다. 일본 본토 점령이 미군의 전략적 목표였다. 이러한 조건에서 한반도 점령에 투입할 미군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것이기 때문에 만주와 조선에서 생기는 전력공백은 곧 참전하게 될 소련군에게 맡기자는 것이 맥아더 사령관의 극동지역에 대한 전략구상이었다.

"마셜에게 보낸 편지에서 맥아더는 일본을 패배시킬 유일한 수단은 일본 본토의 산업중심지를 침공하는 것이라고 했으나, 일본군의 저항력은 만만치 않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는 소련군이 만주에서 행동을 개시하기 전에 일본 본토를 침공해서는 안된다'고 썼다. 소련의 군사행동으로 만주, 조선, 중국 일부가 소련 지배 아래로 들어갈 가능성에 대해 알고도 남음이 있으나 이들 지역은 모두 소련의 지배를 피할 수 없을 것이며, '미국은 소련에 독일 항복 뒤 지체 없이 자신을 희생해서 만주를 침공하도록 요구해야 한다'고 논했다"(하세가와 쓰요시, 2019:94).

한반도 점령계획은 소련의 우선 점령을 용인할 수밖에 없는 작전 상황에 대한 인정을 토대로 수립되었다. 소련의 한반도 단독점령이 기정사실화 되면서 이 소식이 조선에도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1945년 8월 14일 밤 11시경, 일본이 항복할 것이라는 소식이 도메이 통신사 경성지사를 통해 들어왔다. 이 소식을 접한 총독부의 엔도 정무총감은 8월 15일 오전 6시 여운형과의 면담자리에서 천황이 오늘 12시에 항복을 선언할 것이며, 적어도 17일 오후 2시경까지 소련군이 경성에 들어올 것임을 확인했다. 8월 16일, 엔도 총감은 여운형을 다시 불러 미국이 한반도 남단의 부산-목포지역만 점령할 것이며, 반도의 나머지는 소련군이 점령할 예정이라고 전했다(Henderson, 1968:115).

그렇다면 어째서 미국과 소련의 분할 점령으로 한반도 작전계획이 변경되었을까?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작전구상은 대체로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었다. 첫째는 얄타협정의 연장선상에서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권으로 인정하는 방안이다. 둘째는 일본 본토 점령이 예상보다 일찍 종결된다면 한반도 남부 일원에 상륙하여 부산에 군사적 교두보를 확보하는 방안이다. 셋째는 한반도의 분할 점령을 소련에 제안하는 방안이다. 세 구상 가운데, 첫 번째 안인 소련의 단독점령이 당시로는 실현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한반도 분할 점령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 마샬 합참의장 역시 사망 직전인 1959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미국 정보부서가 감청한 일본군 조선사령관으로부터 총참모부로 가는 메시지 전문을 미국 정보부서가 감청했는데 거기에는 소련군이 조선에 쏟아져 들어오고 있으며, 미군이 들어오지 않는 한, 조선 내 일본군은 소련군에게 항복할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U.S. News & World Report, 1959:50).
 

미국이 일본을 사실상 단독점령 한 상황에서 소련군의 한반도 단독점령이 실현가능성이 가장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남하 도중에 멈췄다. 이미 한반도에 소련군이 진주한 상황에 비춰본다면, 미국이 가능한 한 많은 지역을 점령하려는 의도에서 채택한 38선 획정안을 소련이 수용했다는 사실은 상당히 의의라는 반응이었다(FRUS. 1945. vol. Ⅵ, p. 1039). 그렇다면 미국이 별 기대도 안하고 단지 군사편의적 관점에서 던진 분할점령 방안을 소련은 어째서 수용했을까?

일차적으로 한반도문제로 미국과 대립하는 사태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1945년 7월의 포츠담 회담에서도 한반도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소련은 얄타협정을 통해 만주, 특히 제정러시아 시절부터 오랜 숙원이었던 여순 항과 대련 항을 이미 확보한 상황에서, 정치적 득실을 따졌을 때 한반도까지 굳이 점령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 관동군의 무장해제를 목표로 한 군사작전 반경이 필요이상으로 길어져 훗날 폴 케네디가 정의한 '과도팽창'의 위험성도 분명 계산에 넣었을 법 하다.

미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본 본토를 미국 단독으로 확보할 수만 있다면, 최악의 경우 한반도는 소련에 내어줘도 미국의 전략적 지위에는 큰 손상이 없을 것으로 간주했다. 한반도 분할점령은 종전에 즈음한 미소 양국의 군사전략적 판단이 우연히 일치해 내린 합리적 결론이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반도에 대한 미소 양국의 군사편의적 관심과 동시에 정치적 무관심이 한반도의 분할점령으로 귀결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1945년 해방 직후에서 1948년 분단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문제에 대한 관점과 전략적 기조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특히, 미국은 동아시아정책과 한반도문제를 분리시키는 기존의 디커플링 노선을 견지했다. 물론, 이번에는 미국의 동아시아정책의 중심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변경될 예정이었지만 말이다.

이러한 사정은 미국이 전후 한반도처리와 관련하여 구체적 점령계획도 수립하지 않은 채 무작정 한반도에 상륙한 정황을 잘 설명해준다. 미국은 아무런 정치적 구상도 없이 맥아더 사령관이 패전국 일본에 선포한 '일반명령1호'에 준해 한반도를 점령하는 작전계획만 달랑 손에 들고 남한에 진주했다. 한반도가 점령지역인지 해방지역인지 구분조차 하지 않은 채 말이다(Henderson, 1968:122). 궁극적으로 미국은 '떠나기 위해' 한반도에 들어왔다. 해방정국을 뜨겁게 달구며 좌우대립을 격화시킨 '신탁통치구상'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참고문헌

김기조. 2010. "태평양 전쟁에서의 일본의 종전전략과 한반도의 38도선 분할." 이창훈, 이원덕 편. 『한국 근・현대정치와 일본Ⅱ』. 서울: 선인.
안소영. 2010. "태평양전쟁기 미국의 전후 대일・대한정책 및 점령통치 구상." 이창훈, 이원덕 편. 『한국 근・현대정치와 일본Ⅱ』. 서울: 선인.
장박진. 2013. "미국의 전후처리와 한반도 독립 문제: '근거 없는 독립'과 전후 한일관계의 기원." 『아세아연구』 제56권 3호.
하세가와 쓰요시. 2019. 『종전의 설계자들: 1945년 스탈린과 트루먼, 그리고 일본의 항복』. 한승동 옮김. 서울: 메디치.
東鄕茂德. 1989. 『時代の一面』. 東京; 中央公論社
Frank. R. 1999. Downfall: The End of the Imperial Japanese Empire. New York: Random House.
Henderson, G. 1968. 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 Cambridge: Harvard Univ. Press.
Kennan, G. F. 2012. American Diplomacy 1900-1950.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U.S. News & World Report. 1959. "The Story Gen. Marshall Told Me." as reported by John P. Sutherland. Nov. 2.
http://avalon.law.yale.edu/wwii/yalta.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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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 정치이론, 한국정치, 국제관계, 한미관계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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