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밀양‧청도 송전탑 건설 문제가 다시금 화제에 올랐다.

지난 13일 경찰청 인권침해 진상조사위원회는 앞서 2013년 경남 밀양‧청도 송전탑 건설 당시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여러 차례 불법 인권침해를 가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정부는 주민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양시 5개 면에 765kv급 송전선로를, 청도군 2개면에 345kV급 송전선로 건설을 강행했다.

진상조사위는 당시 경찰이 밀양·청도 송전탑 반대 주민에 대해 불법 사찰, 특별관리, 회유 등으로 부당하게 공권력을 행사해 주민간 갈등을 가중시켰다고 전했다. 또한 진상조사위에 따르면 2013년 5월 부북면 위양마을 127번 송전탑 건설 현장에서 모 주민의 자결 기도가 있었고, 경찰이 80대 주민에게 가한 폭력 진압으로 주민이 실신한 사실도 있다고 한다.

"자연은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군주의 지배 아래 두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게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물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를 지적하는 것도 오로지 이 두 군주에게 달려 있다." - <도덕과 입법의 원칙에 대한 서론> 제러미 벤담 저, 강준호 옮김(2013), 아카넷
 
이는 제러미 벤담의 유명한 도덕 원칙,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설명하는 문장이다. 효용, 행복에 최대 가치를 두는 '공리주의'를 설파한 벤담은 쾌락을 증가시키고 고통을 감소시키는 행위가 윤리적으로 옳은 행위라고 주장했다. 송전탑 사건에도 벤담의 '공리주의'가 담겨 있다. 정부는 과거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인 밀양‧청도 주민의 의견은 무시한 채 송전탑 건설을 강행했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포스터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포스터 ⓒ 영화사 하늘

 
2015년 개봉한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역시 '공리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모튼 틸덤 감독이 연출하고 배우 베네딕트 컴버베치가 앨런 튜링 역을 맡아 국내에서도 흥행을 거둔 이 작품은 제67회 미국 작가 조합상에서 각색상, 제39회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미테이션 게임>은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 독일군의 통신암호 '에니그마'를 해독하는 데 결정적 실마리를 제공한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의 삶을 그린다. '인류행복의 최대공약수를 산출해 소를 희생하고 대를 취한다.' 그가 비밀리에 참여한 의문스러운 프로젝트는 '공리'에 관한 고민을 여실히 담아내고 있다. 매 순간이 선택의 기로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무엇을 선택하든 필연적으로 직면할 수밖에 없는 비극에 관한 솔직한 이야기다.
 
최대의 행복

영화는 관객에게 '당신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이냐?'며 계속 질문을 던진다. 암호를 해독해도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였다.
 
"유보트가 수송선을 침몰시키게 두자. 만약 유보트를 파괴시키면 독일군이 어떻게 생각할까? 에니그마를 풀었다고 상부에 보고하면 우리의 수송선은 당연하게 방향을 바꿀테고 영국폭격기 비행중대가 대놓고 유보트 위에 하강하는 것으로 재편성된다면? 독일군은 에니그마가 뚫렸다는 걸 알겠지."
 
영국에서 암호를 해독해 대처하면 독일 또한 가만히 있지 않는다. 암호를 수정한다. 즉,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가게된다. 여기서 튜링은 공리적 방법론을 선택한다. 독일군이 군사기밀을 암호화한 에니그마를 해독하는 데 성공하지만, 전쟁의 실마리를 풀 열쇠를 쥔 그는 철저한 논리와 통계에 근거해 '행복의 최대 공약수'를 도출한다.

생명을 담보로 한 그의 논리는 이상하리만치 냉철하다. 마치 기계처럼 어떤 문제를 연산값으로 뽑아낸 느낌이다. 튜링은 한 번의 전투에서 승리보다 전쟁의 종결을 위한 희생을 택한다. 그의 논리는 대사에서 드러난다.

"모든 감정을 억제하고 논리와 이성으로 생각해야 한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이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소수의 상대적 박탈감
   
매 순간 세 명이 목숨을 잃는 미증유의 유혈사태, 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제한적이었다. 때론 군인 500명과 피터 힐튼의 형이 타고 있는 수송선을 방관하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지만, 결과적으로 종전을 2년 앞당기고 1400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 그리고 폐허가 된 땅 위에서 사람들은 제자리를 찾아 마음 밭에 희망의 작은 새싹을 틔울 수 있었다. 나름의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찜찜함을 느끼는 이유는 뭘까? 선택이 가져오는 상대적 절망 내지 박탈감 때문이다. '어쨌든 살 사람은 살았고 죽을 사람은 죽었다', '어쩔 수 없잖아?' 이 논리만큼 슬픈 것도 없다. 1400만 명은 살았다. 하지만 같은 동료인 피터 힐튼의 형이 타고 있던 수송선 500명의 군인들은 죽었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고 귀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다수의 행복만 중요한 것일까? 1보단 10이고 10보단 100이 더 좋은 것일까?
 
"모든 일을 지능적으로만 대처할 수는 없잖아? 이 배만 빼자. 형이 저 수송선에 타고 있어. 한번 정도 막았다고 독일군이 의심하진 않을텐데 아무도 모를텐데 친구로서 부탁할게. 너가 뭔데? 너가 신도 아니면서, 누가 살고 죽는지 결정할 수 없는 거잖아!"

영화 속 피터 힐튼의 대사다. 그렇다. 사람은 신이 아니다. 튜링도 신이 아니다. 신이 아니고 인간이기에 선택에 있어서 명확한 기준이 없다. 하지만 튜링은 그 기준을 '공리'로 세운 것이다.
 
튜링은 수송선에 타고 있는 500명의 군인과 1400만 명 국민들 중 누굴 구할 것인가 결정해야 했다. 모든 것을 통계적 분석으로 수치화하는 튜링. 그의 논리는 결국 '소탐대실'보다 '사소취대'를 택했다. 숫자가 더 많은 쪽을 택한 것이다. 매우 합리적인 결정이다. 그렇다면 소수행복보단 다수행복만이 더 가치 있는 것일까?
 
벤담은 개개인이 느끼는 고통이나 행복의 정도는 다르다고 말한다. 적당한 기준없이 수치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수치화 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숫자로 값을 매긴다는 뜻이다. 벤담은 모든 사람들의 행복과 고통을 1로 두고 어떠한 상황에서 행복의 느끼는 사람이 3명이고 고통을 받는 사람이 1명이면 3-1=2 이렇게 계산을 해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죽음을 피할 순 없었다. 단지 죽음 대상이 '다수'와 '소수'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다만 선택에 따라 더 많은 생명을 살렸고, 죽음을 맞아야 할 대상이 달라졌다. 사실 개인적인 감정으로는 풀지 못할 문제다.
  
현실의 공리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스틸 컷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스틸 컷 ⓒ 영화사 하늘

 
밀양과 청도 주민들은 밀양765㎸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 청도345kV송전탑반대공동대책위원회를 꾸리고 지난 2011년부터 공사 현장에 농성장을 설치하고 싸웠다. 이를 철거하려는 과정에서 2012년 1월 16일 주민 1명이 분신사망했고, 2013년 12월 6일 유한숙 어르신이 음독사망했다. (2019년 6월 13일 <오마이뉴스> 경찰, 밀양송전탑 반대 할머니들 칼로 상처 내며 진압")
 
안타까운 현실이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걸까? 사실 지역보다는 도시에 더 많은 전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다수'의 인구가 사는 도시에는 안전, 비용 등을 이유로 발전소를 짓기 어렵다. 결국 중앙 정부는 '소수'의 인구가 사는 밀양, 청도 같은 지역에 발전소를 짓기로 결정했다. 다수의 도시 사람들을 위해 소수의 사람들이 희생된 것이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정당한가?', '국민이 국가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가?' 벤담의 공리주의는 우리가 삶에서 선택을 할 때 도움을 주는 참고서일 뿐 정답은 아니다. 중요한 점은 비극 이후에 다시는 이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많은 고민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수와 소수의 차이는 단순히 숫자만이 아니다.
베네딕트 컴버베치 이미테이션 게임 공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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