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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일행은 8월 9일에 열하에 도착하여 예부에 알리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자 8월 11일 황제의 군기대신이 사신들의 숙소인 태학관을 찾아와 반선라마를 만나라는 황제의 명을 전달했다.

그러자 사신 내부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여전히 속으로는 '숭명반청'의 마음이 있는 조선 사신들에게 이제는 중에게까지 가서 인사를 하라고 하니 작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단 정사인 박명원이 완곡한 거절 의사를 군기대신들에게 전했다.

그리고는 황제의 명을 거절했으니 후환을 걱정하며 두려워하고 있을 때 군기대신이 다시 찾아와 황제의 명령을 더욱 강력하게 전갈했다. 이제는 달리 방도가 없어 미적거리다 오후에 숙소를 나서려고 하니 오늘은 늦었다고 다른 날 가라는 전갈이 또 왔다.

황제의 불편한 마음을 알아차린 박명원은 다음날 아침 황제를 알현하러 갔다. 연암이 박명원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열하일기에 묘사한 건륭제는, "얼굴이 희맑고 약간 누런빛을 띠었으며, 수염이 반쯤 희고 나이는 예순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풍모는 춘풍화기했다"라고 적었다.

외팔묘와 라마불교
 
천산산맥 이북을 점령하고 최대의 영토확장이라는 대업을 이루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륭20년(1755년)에 착공하여, 4년 후인 1759년 준공한 사원이다.
▲ 푸닝스(普?寺) 천산산맥 이북을 점령하고 최대의 영토확장이라는 대업을 이루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륭20년(1755년)에 착공하여, 4년 후인 1759년 준공한 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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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일정은 조선사신이 만나러 갔던 반선라마가 있었던 곳을 포함한 피서산장 외곽 외팔묘(外八庙) 순례 일정이다. 청대에는 이번원(理藩院:청대에 몽고·티베트 등의 번원 일을 관장하던 관서) 직속 사원이 북경에 32개소, 청더에 8개소가 있었다.

장성 밖에 있는 8개소를 외팔묘라 하며 라마(티베트불교) 사원의 총칭으로 강희52년(1713년)부터 건륭45년(1780년)까지 건립했다. 외팔묘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수상사(殊像寺), 보타종승묘(普陀宗乘之庙), 수미복수묘(须弥福寿之庙), 보녕사(普宁寺), 안원묘(安远庙), 부선사(溥善寺, 소실), 광연사(广缘寺), 부인사(溥仁寺)다.

사실 티베트는 현재까지도 '하나의 중국'에 있어 중국 정부가 오랫동안 골치를 앓고 있는 지역 중 하나이다. 우리는 티베트하면 달라이라마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면 판첸라마(반선班禅으로 음역)는 누구인가?

티베트에는 부처가 환생한 것으로 믿는 두 명의 종교지도자가 있다. 바로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이다. 달라이라마는 관세음보살, 판첸라마는 아미타불의 화신이라 믿어 살아있는 부처 '활불(活佛)이라 칭송한다.

달라이라마는 1391년부터 티베트불교 겔룩파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라마'는 '스승'이라는 뜻이다. 17세기 들어 달라이라마5세는 스승의 환생을 찾도록 하면서 '판첸라마'가 달라이라마5세의 스승이 되었다. 따라서 판첸라마는 '위대한 스승'이라는 의미이다.

그 후부터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는 서로의 환생을 인정하면서 후계지정에 상호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판첸라마는 정치권력에는 관여하지 않아 달라이라마가 라싸의 포탈라궁을 중심으로 티베트를 지배한 반면, 판첸라마는 라싸에서 280킬로미터 떨어진 시가체의 타쉬룬포에서 종교지도자 역할만 담당했다.

18세기 들어 달라이라마가 잇달아 요절하고, 달라이라마 13세는 영국과 중국에 쫓겨 몽골, 베이징, 인도 등으로 떠돌아다니면서 티베트는 판첸라마 9세가 장악하게 되었다. 1913년 달라이라마 13세가 마침내 티베트로 돌아와 군대를 창설하고 영어학교를 설립하는 등 티베트 근대화를 시작했다.

타쉬룬포 사원에서 조용히 수행하던 판첸라마가 1923년 죽자 중국 국민당정부는 달라이라마 대신 판첸라마 10세를 티베트 지도자로 공인했다. 비록 중국정부의 공인은 받았지만 판첸라마 10세는 중국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다 10년 가까이 구금생활도 했다.

따라서 그때는 완전한 친중국 성향이 아니었기에 1952년 라싸로 돌아온 판첸라마 10세는 달라이라마 14세와 만났다. 그런데 1951년 티베트를 합병한 중국에서 달라이라마 14세를 체포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합병을 반대하고 독립을 주진하던 달라이라마 14세는 신변불안을 느껴 1959년 포탈라궁을 빠져나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 다람살라로 망명했다.

그 후 판첸라마 10세는 1989년 1월 문화대혁명 때 파괴된 불탑 낙성공양을 위해 타쉬룬포사원을 찾았다가 가슴통증으로 사망했다. 달라이라마나 판첸라마가 죽으면 10개월 후부터 환생동자를 찾기 시작하여 6살이 될 때 환생동자를 낙점하는 것이 관례이다. 이 관례에 따라 인도 망명정부에 있던 달라이라마 14세는 1995년 치에키 니마를 판첸라마의 환생으로 공표했다.

그러자 중국정부는 니마를 체포하고 자신들이 세운 기일첸 노르부를 판첸라마 11세로 즉위시켰다. 따라서 지금 30세가 된 니마의 행방은 오리무중이고, 현재의 판첸라마 11세는 티베트인들이 인정하지 않는 중국의 꼭두각시 소리를 듣고 있다.

푸닝스(普宁寺)
 
향을 피우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원에서는 사진을 찍지않는 것이 예의라고 하여 기도하는 사진을 찍지 않았다.
▲ 푸닝스 대웅보전  향을 피우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원에서는 사진을 찍지않는 것이 예의라고 하여 기도하는 사진을 찍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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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방문한 곳은 피서산장 동북쪽에 있는 푸닝스로 건륭20년(1755년)에 착공하여, 4년 후인 1759년 준공한 사원이다. 피서산장 외곽에는 순수한 종교사원인 청 강희 연간에 세운 부인사(溥仁寺)와 부선사(溥善寺)만 있었는데. 푸닝스가 세워지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17세기 초 중국은 몽고족 오이라트부가 천산산맥 이북을 점거하였을 때, 천산을 경계로 북쪽은 준까얼칸국(准噶尔汗国)이, 남쪽은 위구르족(维吾尔族) 야르칸드칸국(叶尔羌汗国)의 회족이 차지하였다. 1755년 건륭제는 준까얼칸국의 내란을 틈타 전쟁을 일으켜 항상 골칫거리였던 서역을 통일하였다.

이것은 강희35년부터 할아버지, 아버지인 옹정제를 거쳐 자신까지 3대 70년 넘게 이어진 전쟁이었고, 마침내 승리했다. 이제 천산남북이 청조의 직접 관리하에 들어오게 되어 청나라 정부는 고토회복(故土新归)이라는 뜻으로 이 지역을 신장(新疆)이라 하였다.

최대의 영토 확장이라는 이 정도 과업을 이루면 보통 유럽에서는 광장을 만들고 그 중앙에 기념비를 세웠지만, 청조에서는 건륭제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사원을 짓기로 했으며, 그게 바로 푸닝스이다.

이런 목적으로 건립되었기에 이 사원의 규모나 장식은 당시 기술의 집대성이었다. 대웅전은 마치 궁전으로 들어가는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건륭제는 공간구조와 배치를 한(汉)식의 사합원(四合院) 양식으로 하면 중국의 기상이나 정신을 표현하기 어렵고, 라마불교의 신앙정신에도 부합되지 않는다고 느껴 불교의 우주관을 적용했다.

불교에서 우주는 다섯 부분으로 동승신주(东胜神州, Purvavideha), 서우화주(西牛贺州, Aparagodaniya), 남섬부주(南赡部洲, Jambudvipa), 북구로주(北俱芦洲), 그리고 가운데에 가장 높은 수미산(须弥山)이 있으며, 해와 달은 수미산의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넘어간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남섬부주에 속한다. 따라서 6개의 전(殿)은 동서남북 4주(州)와 해와 달을 상징한다. 그리고 중앙의 37미터 대형 누각(大乘之阁)이 수미산이다. 대웅전을 경계로 앞쪽은 한족 양식 사원이고, 뒤쪽은 대승각을 중심으로 티베트 양식인 것이 특징이다.

대웅전 앞에는 중국의 여느 사원들처럼 향을 피우고 기도를 하는 공간이다. 안내를 맡은 장 선생은 중국의 많은 지도자들이 열하에 오면 꼭 들르는 곳으로 현재 중국국가주석인 시진핑 주석이 왔을 때도 자신이 안내했다고 말한다. 특히 이곳은 영험한 기운이 있어 속칭 기도발이 잘 받는 곳이라고. 딱히 바라는 소원은 없지만 장 선생의 체면을 생각하여 향을 샀다.

향 3개들이 한 박스 90위엔(한화 약 16,000원), 초 60위엔(한화 약 1만원), 향은 불을 붙여 활활 타도록 하면 좋다고 한다. 그런 다음 불붙은 향을 두 손으로 들고 세 번 절을 했다. 초는 새벽 5시에 라마승이 예불 올리면서 불을 붙여 기도해준다고 하여 이름을 적어서 맡겼다. 중국사원의 승려는 한족들이지만 라마승은 장,토,만주,몽고족 등의 소수민족이다.

대승각은 이 사원의 핵심 건축물로 안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불인 천수관음(千手观音)상이 있다. 천수관음상은 측백나무 재질로 무려 27미터, 120톤에 달한다. 천수관음은 대자비가 무한하고 원만하다는 의미로 각종 난관, 고통, 재난 등을 피하게 하며, 운이 상승하여 일생동안 행복하고 평온하게 해준다고 한다.

'천수'는 가운데 합장한 손 외에 좌,우 각 20개의 손이 있다. 불교의 세계관에서는 지옥에서 천상까지의 육도가 25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하나의 손이 25단계의 중생을 구제한다고 하면 천 개의 손이 된다. 40개의 손에는 각각 눈이 표현되어 있고 손마다 각기 다른 물건을 들고 있다.

중국인들에게 있어 천수관음이 유명한 것은 중국중앙방송(CCTV)에서 매년 설날특집방송(春节联欢晚会)에서 방영되는 21명의 농아인들이 펼치는 천수관음공연 때문이다. 2005년부터 시작된 이 공연은 마치 21명이 한 사람처럼 보이는 통일성, 절제미, 우아함 등으로 중국뿐만 아니라 공연을 본 전 세계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1964년 9월 10일 벼락을 맞고 화재가 발생해 소실 되어 가운데는 사원 터만 남아 있고, 양옆 건물에는 현재 도금한 1.7미터의 176존(尊)이 진열되어 있다.
▲ 푸요우스(普佑寺) 1964년 9월 10일 벼락을 맞고 화재가 발생해 소실 되어 가운데는 사원 터만 남아 있고, 양옆 건물에는 현재 도금한 1.7미터의 176존(尊)이 진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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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닝스 옆에는 1964년 9월 10일 벼락을 맞고 화재가 발생해 소실 된 오백나한상의 푸요우스(普佑寺)가 있다. 가운데는 사원 터만 남아 있고, 양옆 건물에는 현재 도금한 1.7미터의 176존(尊)이 진열되어 있다.

여기에 있는 오백나한은 모두 항주의 장인들이 정성들여 빚은 것으로 중국에서도 매우 높이 평가받는 청대의 진품(珍品)이다. 1933년 일본이 침략하여 방화를 했을 때도 무사했으나 1964년 화재에서 194존을 구했고, 그중 18존은 북경의 국가문물국에서 가져가 현재 176존이 전시된 것이다.

푸요우스는 청건륭25년(1760년) 푸닝스의 부속 건물로 라마승 교육기관으로 세워 경학원(经学院)이라고도 한다. 현종(显宗), 밀종(密宗), 의학(医学), 역산(历算) 등 4가지 경학을 가르쳤다. 라마 승려 배양뿐만 아니라 내몽고 각 지방의 불교경전을 연구하고, 이론을 체계적으로 배웠다. 따리서 모든 비용은 청나라 정부에서 부담했다.

덧붙이는 글 | 게인블로그 '길 위웨서는 구도자가 된다'에도 실립니다.


태그:#신열하일기, #외팔묘, #천수관음, #오백나한, #청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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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지리산 자락 경남 산청, 대한민국 힐링1번지 동의보감촌 특리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여전히 어슬픈 농부입니다. 자연과 건강 그 속에서 역사와 문화 인문정신을 배우고 알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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