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20 15:32최종 업데이트 19.06.20 15:32
1999년 처음 프랑스 땅에 도착했던 해, 파리시가 주관하는 불어 강좌 등록을 위한 반편성 시험을 보았다. 그 때 작문 문제로 제시된 주제.

"왜 프랑스의 교육은 미래를 준비시키지 못하는가?"


외국인들이 불어 좀 배워보겠다고 등록하는 강좌의 반편성 시험에서조차 논술형 문제를 출제하는 프랑스식의 도도함, 이 나라도 한국 못지않게 교육 시스템에 때문에 골머리를 싸매고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기묘한 안도감,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제 막 프랑스에 온 우리더러 뭘 어쩌라고 싶은 황당함을 두루 느끼며 괴발개발 적어 내려갔다. 지금도 그 작문 시간에 내 안에서 세 갈래로 일었던 감정의 파문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이후 20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바로 그 프랑스의 교육시스템 안에서 교육 받은 학생이었고, 10년 전부터는 학부모가 되었다. 사르코지 정권 때부터 프랑스 공교육은 박해의 시련을 겪어왔다. 급변하는 시대에 적응할 줄 모르는 구태의연한 교육제도라는 비판, 인문적 지식을 쌓기보다 실용적 직업교육에 좀더 신경 써야 한다는 늙은 대륙의 조바심을 다루는 기사들이 한동안 지면을 달구는가 싶더니, 민영화와 정원 감축이 시작됐다. 신자유주의 정부의 발 빠른 실천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다.  

그렇게 사르코지 정부(2007-2012) 하에서만 교원 정원은 3만 명이 넘게 축소됐다. 올랑드 정부는 교육 균형을 위해 저소득 지역의 학교들에게 제공하던 지원금을 대폭 감축했다. 그 사이 대학의 인문학과들이 서서히 통폐합되거나 축소되면서 한 학기가 통째로 파업과 저항의 시간으로 메워지기도 했다.

교사들 거리로 불러낸 마크롱
 

지난 2008년 사르코지 정부의 교육 축소에 반대해 시위에 나선 교사들. ⓒ 연합뉴스/EPA


마크롱 정부(2017.5~)는 불과 2년 동안, 과거 진행된 변화들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격변을 감행했다. 과거엔 바칼로레아(프랑스의 논술형 대입자격시험)를 통과한 학생이면 자신이 가고자 하는 대학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크롱 정부는 대학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학생들을 선발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하는 식으로 입시 방식의 엄청난 변화를 감행했다.

또 국적을 불문하고 거의 무상에 가까웠던 대학등록금을 비유럽권 학생들에게만 연간 2770유로(약 360만 원)를 받기로 하면서 대학 성원들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았다. 바칼로레아 시스템의 전면 개혁, 이와 연동된 고교 시스템 개혁들이 줄줄이 예고되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서서히 지쳐간 교사들은 마침내 작정하고 칼을 빼어들었다. 그들은 긴축 재정을 작심하고 가장 먼저 교육 예산을 베어버리는 정부와 직업적 의무감 사이에서 포로 상태로 있었다. 결국 교사들은 지난 17일 시작한 바칼로레아 시험의 시험감독을 보이콧 하는 파업 결정을 내린다. 10여 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교원노조들이 만장일치로 결의한 '초강수'였다. 

교사들의 파업 결의는 5월 말에 결정됐다. 그러나 거센 여론의 저항은 없었다. 반대 여론이 우파언론들을 통해 소소하게 흘러나왔을 뿐이다. 특히 프랑스 양대 학부모협회 중 하나인 '프랑스학부모연맹(FCPE)'은 "이번 교사들 파업을 비난할 수 없으며, 파업의 방해꾼이 되지 않겠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고교 역사교사이자 이번 바칼로레아를 치르게 될 아들을 둔 학부모인 한 익명의 교사는 학부모들을 적으로 돌릴 수도 있는 초강수 투쟁에 참여하게 된 이유를 "교사들의 목소리가 세상에 들리게 할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지난 17일 월요일, 바칼로레아 시험은 이 같은 긴장감 속에서 시작됐다. 교육부에선 전체의 6% 정도가, 노조 측에선 전체의 25% 정도가 파업에 참여했다고 크게 엇갈린 수치를 제시했다. 이런 가운데 바칼로레아 철학시험은 정부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보조 인력을 충분히 준비해두었던 탓에 큰 소란 없이 치러졌다.

파업을 결의한 단체들의 숫자에 비하면 그리 높은 참여율은 아니었지만, 교원노조 측은 이번 파업이 나름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한다. 바칼로레아라는 심리적 금기를 떨쳐버릴 수 있는 교사들의 의지를 확인했고, 교원들의 목소리에 주목하지 않았던 언론이 정부 개혁안이 가지고 있는 핵심 문제점을 상세히 거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신뢰의 학교법?

마크롱식 고교 개혁안의 이름은 '신뢰의 학교법'이다. 골자는 인문-자연-경제사회계로 나뉘어 있는 현재의 계열을 통폐합하고 수학이나 과학, 불어 등에 심화 과정을 두어 원하는 학생들이 선택해 듣게 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기초과목 외에도 대략 5개 정도의 선택과목을 들을 수 있다. 이는 기존의 반 개념으로 구성되던 고등학교의 시스템 자체를 각 개인이 개별적으로 구성하도록 하는 근본적 개혁을 뜻한다. 

자기 적성에 맞는 과목들을 '자유롭게' 골라 듣게 한다는 얘기는 얼핏 들으면 일종의 융통성을 발휘한 것처럼 읽힌다. 그러나 문제는 그 선택의 자유가 모두에게 주어질 리 없다는 데 있다. 정부는 이번 교육 개혁이 "고교 교육 수준의 전반적인 향상과 학교를 통한 사회정의의 실현"이라는 목표를 담고 있다고 밝혔지만, 함정은 교원 정원을 2500명 감축한다는 데 있다. '신뢰의 학교법'이란 어휘가 신뢰를 잃고 마는 대목이다.

2008년, 2만4천 명 정도였던 기간제 교사의 수는 10여 년 만에 4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동안 정부가 감축해 온 교원 정원수는 고스란히 기간제 교사의 증원으로 이어져왔다. 타 직종에 비하여 한없이 더디던 임금 인상도 교사들을 자존감 상실의 늪에 빠뜨렸다. 우울증이나 번아웃 상태에 빠진 교사들의 이야기는 이제 프랑스에서 익숙해졌다. 그럼에도 정부는  보란 듯이 정규 교원 수 축소와 기간제 교사의 확충을 개혁안에 포함시켰다.

교원 인력 충원이 쉽지 않은 지역에선 옵션 과목들이 모두 두루 제시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고, 이 모든 변화의 일관된 결과는 지난 10여 년 동안 확대만 되어왔던 교육 불평등을 더욱 공고하게 심화시키는 것과 결국엔 공교육 자체를 무너뜨리겠다는 것 뿐이라고 교사들은 입 모아 이야기한다. 올해 초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정부의 고교 개혁안에 동의하는 교사와 교장들의 수는 고작 6%에 불과했다.

프랑스 사회가 풀어야 할 질문 
 

지난 2018년 12월 프랑스 남부 몽펠리에 고등학교 앞에서 정부의 교육개혁안에 반대해 고교생들이 시위를 벌이는 모습. ⓒ 연합뉴스/EPA

 
바칼로레아 시험 첫날 일부 시험장에선 파업 교사들이 인간띠를 두르고 "공교육 파괴를 멈추라"고 외쳤다. 이날 4시간 동안 진행된 철학시험에서 학생들은 계열별로 아래와 같은 질문을 받았다. 그중 하나를 골라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적어내야 했다. 
 
인문계 
  1. 시간을 초월하는 것은 가능한가?
  2. 예술 작품을 설명하는 것은 어떤 쓸모가 있는가?
  3. 헤겔의 <법철학> 텍스트 일부를 읽고 의견 제시

 자연계
  1. 문화의 다원성은 인류의 통합에 장애가 되는가?
  2. 자신의 의무를 인지하는 것은 자유를 포기하는 일인가?
  3. 프로이트의 <환상의 미래>(1927년) 텍스트 일부를 읽고 의견 제시 

 경제사회계 
  1. 윤리는 최선의 정치적 선택인가?
  2. 노동은 인간을 분리하는가?
  3. <데카르트의 원칙>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견해(1692)에 대한 의견 제시

불행 중 다행일까. 과목 축소를 골자로 하는 정부의 바칼로레아 개혁안에도 시험 첫날 철학시험이 치러지는 전통은 유지된다. 예정대로라면 2021년부터 프랑스 아이들은 하나로 통합된 계열 안에서 나란히 3개의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그 질문 가운데 하나가 "왜 정부의 모든 개혁은 공공 영역 파괴로 귀결되는가?"가 되면 어떨까.

이제 막 학교문을 박차고 세상으로 나가는 아이들이 그 관문 앞에서 교사들이 왜 파업을 하고 있는지, 왜 모든 개혁은 불평등의 골을 더 깊게 내는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는지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답했으면 한다. 그리하여 프랑스 사회가 마침내 이 질문을 극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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