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민간인학살희생자를 다룰 다큐 독립영화 '태안' 크랭크인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을 다룰 다큐멘터리 ‘태안’이 지난 10일부터 부역혐의로 억울하게 숨진 부친과 형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배광모씨 인터뷰를 첫 촬영으로 크랭크인 됐다. 사진은 태안민간인희생자유족회 사무실에 걸려 있는 그림 한점. 그날의 참상을 낱낱이 보여주는 듯하다.

▲ 태안민간인학살희생자를 다룰 다큐 독립영화 '태안' 크랭크인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을 다룰 다큐멘터리 ‘태안’이 지난 10일부터 부역혐의로 억울하게 숨진 부친과 형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배광모씨 인터뷰를 첫 촬영으로 크랭크인 됐다. 사진은 태안민간인희생자유족회 사무실에 걸려 있는 그림 한점. 그날의 참상을 낱낱이 보여주는 듯하다. ⓒ 김동이


"형을 삽시간에 잡아갔다. 경찰이 와서. 태안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지 6일 만에 총살됐다. 죽인 이후에 휘발유를 뿌려 태웠다. 얼굴이 타서 누군지 몰랐다. 우리 사촌과 형과 내가 지게를 지고 새벽에 가서 수습, 근흥면 안기리로 모셔서 장례를 지냈다. 셋을 한꺼번에 모셔왔다. 음력 6월 여름이었다. 아버지는 전쟁 때 한동네 사람이었던 이광순, 김용철이 빨갱이가 여기 있다고 해서 잡아갔다. 면사무소 창고에 넣었다가 근흥면 길목에서 부역혐의로 죽임을 당했다." - 함재기(86), 당시 16세, 백화산 사기실재 학살 목격자
 
내년 한국전쟁 70주년을 앞두고 태안을 주제로 뜻깊은 다큐멘터리 독립영화가 크랭크인 해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이번 다큐는 태안을 중심으로 한 민간인희생자의 아픔을 그릴 예정이어서 의미를 더하고 있다. 제목도 <태안>이다. 태안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 115명과 인민군 치하에서 희생된 자유수호희생자 115명과 부역혐의 희생자 900명을 포함, 모두 1200여 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희생됐다.

유가족, 유가족을 만나다
 
 크랭크인에 앞서 사전회의 하는 다큐영화 '태안' 제작진

크랭크인에 앞서 사전회의 하는 다큐영화 '태안' 제작진 ⓒ 김동이

 
<민중의소리> 기자 출신이자 현재 레드무비(Red Movie) 대표인 구자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직접 촬영과 연출도 맡았다. 태안민간인희생자 유족과 함께 세월호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유민 아빠' 김영오씨도 특별출연 한다. 강희권 태안민간인희생자유족회 사무국장과 동행하며 '유가족의 아픈 기억'을 마주하는 역할이다.
 
<태안>은 지난 10일부터 부역혐의로 억울하게 숨진 부친과 형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배광모씨 인터뷰를 첫 촬영으로 크랭크인 됐다.
 
시놉시스(synopsis)와 구자환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태안>은 올해 연말까지 태안민간인희생자 유족을 비롯해 정석희 태안유족회장과 곽정근 공주유족회장, 그리고 당시 보도연맹원의 이송 과정을 지켜본 목격자, 백화산 사기실재에서의 학살 목격자 등의 기억과 증언을 통해 그날의 아픔을 재조명한다.
 
구 감독은 이미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을 다룬 다큐 <레드툼>과 <해원(解寃)>을 통해 잊혀진 진실을 파헤치며 제대로 된 진실규명을 위한 험로를 걸어왔다. 전라도 광주와 경남 창원에서의 공동체 상영을 통해 유족들과 직접 만나 눈물도 보듬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태안의 아픔을 보듬기 위해 메가폰을 잡았다.
 
특별출연을 결정한 김영오씨와 구 감독의 인연은 영화 <해원>의 광주 공동체상영에서 시작됐다. 그때 김영오씨에게 출연 제의를 하려 했지만 아픔을 또 한번 안겨주는 것 같아 주저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김영오씨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영화 <해원> 제작비 마련을 위한 SNS 모금운동에 김씨가 후원금을 보낸 것.
 
이를 인연으로 구 감독이 김씨에게 전화로 감사인사를 전하며 출연제의를 했고, 김씨가 이를 선뜻 수락하면서 출연이 전격적으로 성사됐다.
 
구자환 감독 "김영오씨는 동질의 아픔을 간직한 분"  
 세월호 ‘유민 아빠’ 김영오씨도 추모식에 참석해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김영오씨가 지난 6월 8일 열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희생자 제69주기 12차 창원지역 합동추모제에 참석해 유가족을 위로하는 모습. ⓒ 임재근

 
구 감독은 김영오씨를 섭외하게 된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김영오씨는 한국전쟁 유족들과 동질의 아픔을 간직한 분"이라고 답했다. 이어 "사례는 다르지만 결국은 국가의 폭력 방치에서 발생된 사건이다"라며 "김영오씨가 민간인학살사건을 안 지 얼마 안됐는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파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구 감독은 "불과 5년 동안에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하기 위해 너무 힘들게 왔는데, 지금에서 안 것이지만 한국전쟁 당시 유족들은 벌써 69년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어 먹먹하다고 했다"면서 "같은 유형의 피해를 당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감성"이라고 섭외 이유를 밝혔다.
 
구 감독의 섭외 제의에 선뜻 수락했다는 김영오씨는 "아픔을 가진 사람들도 빨갱이로 몰아가는 게 사회현실"이라는 말로 말문을 연 뒤 "대한민국은 아프다. 무슨 사건이나 재난이나 다 똑같다. 참사나 재난이 일어나면 어떻게든 해결해 주려고 진상규명해 주려는 게 아니라 이를 이용해서 서로간에 정치적 이익만 쫓는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씨는 "민간인학살을 몰랐다면 우리만 그렇구나, 나만 억울하구나, 생각했을 것"이라면서 "국민들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은 이승만 정권의 민간인 학살이 뿌리였구나 생각했다. 내용은 덮고 서로간의 이념싸움에만 몰입하는 건 그때부터 시작됐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한편, 태안군의 보도연맹 학살사건과 관련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기록은 이렇다.
 
"이승만 정권은 국민보도연맹을 창설하여 1949년 10월 25일부터 1949년 11월 30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남로당 자수 주간을 설정하고 대대적인 자수, 전향 작업을 진행했다. 충청지역 검경은 11월 1일부터 30일까지 한달 동안 자수 주간을 설정하고 전향을 독려했다. 그 결과 다수의 남로당원들이 탈당하여 전향하였고,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각 지방지부의 결성이 1950년 1월 ~2월 사이에 이루어졌다.

충청남도 보도연맹 결성식은 1949년 12월 27일 대전검찰청 회의실에서 진행됐다. 조직의 구성과 운영은 대부분 권영진 대전지방법원장, 이영진 충남도지사, 이순구 도 경찰청장, 정재환 대전지검 검사장, 송호성 중부전투총사령관, 김진권 판사 등 관이 주도했다. 태안지역 예비검속은 1950년 6월 25일에서 7월 11일 사이에 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에 검속된 보도연맹원은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7월 9일 태안경찰서 소속 경찰이 보도연맹원을 대전형무소로 이송하던 중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증언을 통해 보면 운전사가 보도연맹원이 죽게 되는 것을 알고 고의로 사고를 낸 것으로 보인다. 남아있던 보도연맹원은 7월 12일 태안면 백화산 사기실재(작은 한티재)에서 집단학살 됐다. 충청남도 경찰국이 관내 보도연맹 즉결처분 지시 공문을 내렸다. 7월 후퇴하기 전에 태안경찰서장 최배식의 지시에 따라 사기실재에서 처형됐다. 사찰계 형사들이 주도했다."
덧붙이는 글 구자환 감독과 특별출연의 김영오씨 인터뷰는 다큐영화 태안이 크랭크인 되던 지난 10일 태안민간인희생자유족회 사무실에서 진행됐습니다.
태안민간인학살희생자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 보도연맹 태안 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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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의 지역신문인 태안신문 기자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밝은 빛이 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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