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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가면 만나고 싶었던 커플이 있다. 일본 남자 스즈끼 코우지(39)와 한국 여자 정짱(정형인·33). 정짱은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의류업계에 취업을 했다. 취업한 회사의 사장과 친한 친구였던 스즈끼는 정짱과 자연스럽게 친해지며 6년간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려 했다. 그런데 스즈끼는 2017년 2월에 출장 가는 비행기 안에서 몸의 이상을 느꼈다. 짐칸에 짐을 올릴 수 없었다. '내가 왜 이럴까?' 이후 그는 병원을 전전하였다. 

"다들 비타민 부족이라고 했어요. 계속 안 낫고 여러 병원만 몇 개월을 다니다가 그해 7월에야 근위축성측삭경화증(ALS, 루게릭병)이라는걸 알았어요. 그 병원도 우연히 알게됐어요."

정짱과 스즈끼는 자주 가는 미용실에서 요즘 손에 힘이 빠진다는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미용실 사장은 비슷한 증상을 가진 단골 손님(무토군)을 소개해줬다. 루게릭병은 10만 명 중에 1~2명 있을까 말까한 희귀병인데 신기한 인연이었다. 무토군이 다니는 병원에 가서야 일주일간 입원을 하며 정밀검사를 받았다. 

"병명을 제대로 알기까지 반년 정도 시간을 허비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빠른 편이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다행스러움도 잠시, 그들은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의사는 "이 병은 안 낫는다. 5년 뒤에 죽는다"고 말했다. "처음 들었을 땐 거짓말처럼 들렸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며 스즈끼는 2년 전을 회상했다. 평소에 워낙 낙천적인 성격이었던 스즈끼도 의사의 진단 앞에서는 위축되었다. 진단을 받은 후 3개월간은 친구들도 만나지 않고 집에만 있었다. 부모님에게도 4개월이 지나서야 알렸다. 

"일상을 이어가라"는 메시지
 
지난 5월 18일에 만난 스즈끼와 정짱. 소바를 먹는 내내 정짱(오른쪽)은 스즈끼를 챙겨주었고, 스즈끼도 자연스럽고 편하게 받아들였다. 왼쪽은 기자.
 지난 5월 18일에 만난 스즈끼와 정짱. 소바를 먹는 내내 정짱(오른쪽)은 스즈끼를 챙겨주었고, 스즈끼도 자연스럽고 편하게 받아들였다. 왼쪽은 기자.
ⓒ 수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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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후반인 그는 20대 초부터 의류업계에서 일을 했다. 항상 바쁘게 일하느라 밤 12시, 1시가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던 그는 일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긴 휴식을 취했다.

그와 함께 있었던 정짱 또한 귀를 의심했다.

"드라마 찍는 건가 싶었고, 아무것도 안 들렸어요. 이 의사가 뭐라는 거야? 진짜 이상한 의사라고 생각했어요. 그날은 눈물도 안 날 정도로 머리가 하얘졌어요. 확진 받고도 우리 둘 다 못 믿었고요. 병을 인정하지 않고, 보통사람처럼 걷고, 헬스장도 다녔어요. 정확히 언제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어요. 지금도 그렇고, 아직도 현실감은 잘 없어요."

정짱은 스즈키의 병명을 듣고도 둘의 관계에 대한 변화를 고민하지 않았다. '원래 함께였던 것처럼 이렇게 지내면 되지 뭐' 라는 마음의 소리만 들렸을 뿐. 자연스럽게 둘은 결혼을 하였고, 루게릭병과 대면하기로 한다.

"근위축성측삭경화증(ALS)학회 몇 군데를 다니다 보니까 교수들이 하는 말이, 앞으로 2년 뒤에나 정확한 원인이 나올 수 있는데 연구비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스즈끼는 원인 규명이 빨리 되면 치료의 속도도 더 빨라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연구비에 보태기 위해 자신의 재능을 살려 정짱과 함께 새로운 도전을 하였다. 

지난해 11월부터 루게릭병과 관련한 특별 티셔츠를 제작하여 SNS를 통해 소식을 알렸다. 연구비를 모으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루게릭병을 잘 모르는 일반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미리 죽음을 기다리지 말고 일상을 이어가라는 용기를 주고 싶었다.

희망을 준 사람
 
병명을 알고, 1년이 좀 지나서 스즈끼는 루게릭병을 알리고, 연구비를 지원하기 위해 특별 티셔츠를 제작하여 SNS를 통해 500장을 판매하였다. 결혼한 정짱의 한국 가족들과 남긴 인증샷.
▲ We will beat ALS, Zukkyz(우리 모두는 스즈끼, 루게릭병과 싸울것이다) 병명을 알고, 1년이 좀 지나서 스즈끼는 루게릭병을 알리고, 연구비를 지원하기 위해 특별 티셔츠를 제작하여 SNS를 통해 500장을 판매하였다. 결혼한 정짱의 한국 가족들과 남긴 인증샷.
ⓒ ZUKKY2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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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티셔츠는 연예인 포함 친구들 사이에서 500장 정도 완판을 했어요. 원래는 SNS도 안 했는데 티셔츠 판매를 위해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연락들을 많이 받았고요.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들도 많았고, 티셔츠를 가게에 놓고 싶다는 사람, 카페에서 점원들 옷으로 입는 사람도 있었어요. 또 근위축성측삭경화증(ALS) 걸린 사람이라며 연락이 와서 나 덕분에 힘을 얻었다거나 내가 타는 휠체어에 대한 정보를 주기도 했어요. 두 번째 티셔츠는 세계 ALS데이인 6월 21일 그때쯤 맞출 예정이에요."

휠체어가 멋있어 보인다는 내 말에 둘은 이구동성으로 무토군에 대해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무토군은 단골로 다니는 미용실에서 맺어진 신기한 인연이다. 그가 다니는 병원 덕분에 병명을 알게 된 것 외에도 둘은 무토군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무토군은 'Whill' 이라는 휠체어를 크라우드 펀딩으로 몇 대를 사서 그중에 한 대를 무료로 빌려주었다. "운전하기가 굉장히 편안하다"고 스즈끼는 말했다. 일본에서는 ALS 환자라도 40세 이상이어야 정부 지원이 나온다. 40세 미만은 지원이 없어서 휠체어를 구입하거나 렌트를 해야 하는데 비용이 굉장히 비싸다. 

"그를 만나서 생각이 많이 변했어요. 찾아보는 내용도 많이 바뀌었고요. 장애인 관련 복지 제도 등을 찾아보기 시작했거든요. 그 전에는 병을 인정하지 않고, 치료만 생각했어요."

스즈끼는 무토군을 만나고 다시 회사에도 나갔다. 무토군은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지 6년 정도가 되었지만 잘 살고 있었다. 그래서 둘은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무토군이 ALS관련 사회 활동을 워낙 많이 하고 있어서 소개받은 지 3개월 만에 직접 만날 수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자극을 많이 받았다. 무토군 커플도 병을 알고 나서 결혼을 했다. 그 부인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 같이 대화하며 많이 배운다"고 정짱은 말했다. 

현재 무토군은 ALS와 테크노 기술을 연결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무토군은 광고회사를 다니며 DJ를 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는데, 병이 생기고 나서 손의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아서 제약이 많았다. 하지만 결국에는 안경 회사와 협력하여 눈의 움직임으로 DJ를 할 수 있게 되었다"며 정짱과 스즈끼는 무토군 얘기를 하며 눈을 반짝였다.

무토군이 주최한 모임에서 ALS를 극복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밥도 먹고, 구경도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우리 셋은 무토군을 인터뷰해야 했다며 한참을 웃었다. 

휠체어 타고 본 세상
 
스즈끼는 무토군을 만나면서 병에 걸렸어도 삶은 계속 이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
▲ 동경복지전문학교에서 특별수업을 했던 스즈끼(왼쪽 휠체어), 무토군(오른쪽 휠체어) 스즈끼는 무토군을 만나면서 병에 걸렸어도 삶은 계속 이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
ⓒ zukky2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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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를 탄 지 1년 반 남짓 된 스즈끼. 휠체어를 타고 본 세상은 어떤지 물어보았다.

"처음 가는 곳은 가는 길에 엘리베이터, 화장실 있는지 꼭 확인하게 되고, 사람이 많은 곳은 잘 안 가게 돼요. 길 비켜주는 사람들이나 엘리베이터 눌러주고, 도와줄 거 없냐고 말 걸어주는 사람들이 참 고마워요. 예전에는 몰랐는데 그런 행동 하나하나에 착한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을 구별하게 된 것 같아요."

"핸드폰 보면서 걸어 다니는 사람이 싫어졌다." 정짱 또한 스즈끼와 함께 다니며 느낀 바를 전해주었다. "나 또한 예전에는 신경을 못 썼던 부분인데 횡단보도에 차 세우는 사람들 보면 일부러 차 앞에 가서 비켜달라고 한다. 휠체어 탄 사람들한테는 정말 힘든 점이다. 도쿄도 길이 경사지고 턱이 많은 편이다. 그렇게 되면 몸이 쏠리니까 스스로 가지 못하고 옆에서 잡아 줘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정짱은 "가게 같은데도 좁아서 들어가기 힘들거나 화장실 이용이 불편해 오늘처럼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을 미리 다 확인하고 예약한다"며 "유모차에 아이 태우고 다니는 분들과 비슷할 것 같다. 친구들 모임 할 때 보면 유모차 끌고 오는 친구들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온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일본도 아직 (휠체어 탄 사람들이 다니기에) 그렇게 잘 되어 있다고는 생각 안 한다. 그러나 한국보다는 좀 더 나은 것 같다"고 말했다.

"무토군과 ALS 관련 이벤트를 같이 하면서 홈페이지를 만들어 누구든지 참여해서 티셔츠를 만드는 기부 문화를 만들고 싶어요. 모은 기금은 ALS연구 협회에 드릴 거예요."

스즈끼는 한국의 '승일희망재단'이 이어가는 참여형 기부문화행사나 아이스버킷 챌린지와 같은 운동을 일본에서도 벌일 생각을 하고 있다.

"유명인들의 참여로 전 세계적인 이목을 끌었던 이 운동은 얼음물을 맞을 때 근육이 놀라는데 루게릭병(ALS)을 앓는 사람들은 늘 그런 상태라고 보면 된다"고 정짱이 설명해주었다. 

스즈끼가 물을 마시려고 하자 일회용이 아닌 영구적인 빨대를 꽂아 건네주는 정짱. 그녀가 가지고 다니는 물건 하나하나도 예사롭지 않았다. "일회용을 최대한 줄이는 행동도 병에 걸리면서 하게 되었다"는 그녀는 본인이 직접 미싱으로 글자를 새긴 가방을 보여주었다. '작은 실천이 지구를 위하는 것'

병에 걸리기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부분과 실천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낙담하지 않고 함께 헤쳐나가려는 두 사람과 그들에게 영향을 준 무토군. 이들의 행보가 또 누군가에게 어떤 씨앗이 될지 기대가 된다. 그리고 분명 씨앗 하나가 나에게 뿌리를 내린 것은 분명하다. 나는 걸어 다니면서 핸드폰 보지 않는 것, 우선 그 작은 실천 하나를 해 보려고 한다. 

덧붙이는 글 | 스즈끼와 소통하고싶은 분들을 위하여, 인스타그램 아이디: zukky2408


태그:#루게릭병, #ALS, #아이스버킷 챌린지, #휠체어, #ZUKKY2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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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세계사가 나의 삶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일임을 깨닫고 몸으로 시대를 느끼고, 기억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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