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 편으로 인생이 바뀐 배우들이 있습니다.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든 배우들의 결정적 영화를 살펴보면서 작품과 배우의 궁합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편집자말]
 영화 <올랜도> 포스터

영화 <올랜도> 포스터 ⓒ 동림영화

 
스코틀랜드 출신의 배우, 틸다 스윈튼. 그녀에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귀족적이면서도 중성적인 그녀의 근사한 외모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프레임 속 그녀는 미장센을 완성하는 한 부분인 동시에,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서의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어낸다. 또 등장만으로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특별할 거라는 기대를 하게 만든다. 

1992년 완성된 영화 <올랜도>는 버지니아 울프가 쓴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작품으로 400년 동안 늙지도 병 들지도 않는 올랜도의 일생을 따라간다. 그 과정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는 '여성'과 '남성'에 대한 인식과 요구에 질문을 던지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난해한 소설을 시대별로 간결하게 압축해 아름다운 영상으로 엮어낸 이 작품은 영국 출신의 뛰어난 영화인 샐리 포터가 쓰고 연출했다. 남성으로 태어나 여성으로 정착한 주인공 올랜도는 틸다 스윈튼이 연기했는데, 그녀 외에 다른 배우를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남성일 때의 올랜도, 여성일 때의 올랜도 모두를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1610년 찾아온 지독한 한파, 그리고
 
 영화 <올랜도>의 한 장면

영화 <올랜도>의 한 장면 ⓒ 동림영화

 
영화는 1600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영국을 통치하던 때에서 시작한다. 16세의 귀족 올랜도(틸다 스윈튼)는 여왕(쿠엔틴 크리스프)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시를 만찬장에서 낭독한다. 여왕은 시의 내용보다 젊고 아름다운 그의 외모에 감탄해 그날 이후 어디를 가든 그를 곁에 두려 하고 그에 대한 애정도 숨기지 않는다.

여왕은 그의 늘씬하게 뻗은 다리와 맑고 부드러운 피부 등 여성적인 아름다움과 젊음에 감탄했다. 여왕은 여러 가지 장신구를 하고 화장을 했지만, 그의 옆에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여왕은 올랜도에게 거대한 저택을 선물하며, 늙지도, 병이 들지도 말고 지금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간직하라고 말한다. 올랜도는 마법을 거는 주문과 같은 여왕의 이 말 그대로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400년을 살아간다.
 
여왕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올랜도는 자신의 인생에서 첫 죽음을 경험한다. 이로써 그의 소년기는 끝이 나고 1610년 지독한 한파가 찾아와 온 세상을 꽁꽁 얼려 버린다. 과일 바구니를 든 가난한 소녀는 템즈 강 아래에 꽁꽁 얼어 죽어있고, 이를 본 귀족은 재밌는 그림을 봤다는 듯 호탕하게 웃는다. 혹한은 유독, 아니 오직 가난한 자에게 가혹한 것인지 올랜도를 비롯한 귀족들은 매일 밤 파티를 즐긴다. 

올랜도는 이제 청년이 되었다. 약혼녀와 결혼을 앞두고 있지만 그는 러시아 대사의 딸 사샤에게 첫눈에 반해 버린다. 사랑에 빠진 그는 행복한 동시에 불행하다. 이 행복이 언젠가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그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 당신은 내 것이다. 러시아로 떠나지 말고 나와 결혼해 달라!" 올랜도는 사샤에게 애원한다. 하지만 젊고 부유하고 잘생긴 그의 자기중심적인 사랑은 실패로 끝이 나고, 실연에 괴로워하던 그는 7일 동안 깊은 잠에 빠져든다. 
 
 영화 <올랜도>의 한 장면

영화 <올랜도>의 한 장면 ⓒ 동림영화

 
1650년. 잠에서 깨어난 올랜도는 자신이 겪은 사랑의 아픔을 시로 옮긴다. 자신이 존경하던 시인 그린을 저택으로 초대해 자신의 넘치는 열정을 고백하고 시인을 향해서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그린의 눈에 올랜도의 '시'는 팔자 좋은 도련님의 신세 한탄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의 조롱에 상처 받은 올랜도는 시 쓰기를 그만두고 정치계에 입문한다.

1700년. 앤 여왕이 영국을 통치하던 시대에 올랜도는 영국 대사 자격으로 영국을 떠나 오스만 제국(현재의 터키)으로 향한다. 현지 사람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10년 동안 평화로운 일상을 이어가던 중에 전쟁이 일어나고, 영국군의 총에 맞아 쓰러진 적군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올랜도는 다시 깊은 잠에 빠진다.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7일간의 잠에서 깨어난 올랜도는 자신의 몸이 여성으로 바뀌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이 변화를 혼란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한다. 

"같은 사람이야. 변한 건 없어. 다만 성(性)이 바뀌었을 뿐."
 
 영화 <올랜도>의 한 장면

영화 <올랜도>의 한 장면 ⓒ 동림영화

 
1750년. 로코코 시대의 화려한 드레스와 가발, 화장을 한 올랜도는 설레는 마음으로 사교계에 발을 들인다. 소위 '유머'와 '시'로 흥미로운 대화를 한다고 하지만, 실은 말로 상대방을 조롱하고 공격하는 지성인들의 대화에서 올랜도는 그들이 여성에 대한 그 어떤 존경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놀란다.

애초 개성이라곤 없는 (모든) '여성'은 남성의 도움 없이 정체성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며 스스로 찾는 것을 시도한다 하더라도 길을 잃을 것이 분명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여성은 자기 자신을 가질 수도 없는 존재'라고 믿는 남성들의 인식은 '법'에도 영향을 미친다. 올랜도는 남편이 없으면 저택을 잃게 될 것이라는 안내장을 받는다. 이때 해리 대공은 마치 자신이 올랜도를 구해 줄 정의의 기사라도 되는 양 그녀에게 청혼을 하는데, 이 장면은 청년 올랜도가 사샤에게 사랑고백을 하는 장면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영화 <올랜도>의 한 장면

영화 <올랜도>의 한 장면 ⓒ 동림영화

 
청혼을 거절한 올랜도는 미로 모양의 정원을 달리고 또 달려 안개를 뚫고 들판으로 나아간다. 열차가 달리는 1850년, 올랜도는 미국에서 온 매력적인 청년 쉘머딘을 만나 사랑을 나누고, 전에 느껴본 적 없는 행복을 느낀다. 자유를 찬양하는 쉘머딘은 그녀에게 자신과 함께 떠나자고 하지만 올랜도는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 이전까지의 인생에서 남성은 여성의 거절을 받아들이지 못했으나 쉘머딘은 과거의 올랜도, 혹은 해리 대공(여성을 소유의 개념으로 받아들였던 과거의 남자들)처럼 그녀의 거절에 상처받지 않는다. 

올랜도는 또 다시 안내장을 받는다. 아들이 없으면 저택을 지키기 힘들 것이라는 내용이다. 1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건이 남편에서 아들로 바뀌었을 뿐, 여성이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선 여전히 누군가 필요하다. 하지만 변화의 바람은 더욱 강하고 빠르게 그녀의 인생을 향해 불어온다.
 
 영화 <올랜도>의 한 장면

영화 <올랜도>의 한 장면 ⓒ 동림영화

 
임신한 올랜도는 폭탄이 떨어지는 전쟁터를 온 힘을 다해 뛰어간다. 죽음의 공포가 사방에서 터져 오르지만 그녀는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녀는 살아남았고, 예쁜 딸아이의 엄마가 되었으며 또한 '작가'가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에게서 선물 받은 저택은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니지만 지금의 올랜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정적이고 행복해 보인다. 

올랜도는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400년을 살아왔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몸이 바뀌었고, 여성으로 더 긴 시간을 살았다. 그는 여전히 같은 사람이지만 여성일 때 그의 성별이 더욱 강하게 인식된다. 이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압력에 의한 것으로, '여성'이 마치 하나의 장애처럼 작용해 주체적인 삶을 산다는 게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시대가 변하면서 인식도 변화하지만 한계는 여전히 존재한다. <올랜도>는 신비로운 판타지 작품인 동시에 지난 400년 역사 동안의 '남성성', '여성성', 그러니까 '성'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변화를 유머러스하게 해석한 보고서다. 이 영화는 성에 대한 고정관념, 우리가 각각의 성에 부여한 당연한 역할을 캐스팅 단계에서부터 거부한다.

영화에서 엘리자베스 1세를 연기한 사람은 쿠엔틴 크리스프라는 남자 배우다. 그는 20세기 초 보수적인 영국사회에서 화장을 하고 동성애자라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과감하게 드러냄으로써 많은 젊은 예술가들과 성소수자들에게 영감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영화 <올랜도>의 한 장면

영화 <올랜도>의 한 장면 ⓒ 동림영화

 
이 영화는 기묘한 힘으로 보는 사람을 끌어당긴다. 원작이 가진 예술성과 간결한 각색, 여러 대가들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영상과 더불어 틸다 스윈튼의 신비로운 매력 덕분이 분명하다. 올랜도에게 결정적 순간이 닥칠 때마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그녀의 두 눈 속 부드러운 카리스마는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이 영화를 찍기 전까지 그녀는 지금은 세상을 떠난 데릭 저먼 감독의 뮤즈로서 그의 문제작들에 주로 출연했으며 대중적으로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배우였다.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유명세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좋은 영화를 보는 안목, 예술을 대하는 열린 태도가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현재 그녀는 짐 자무쉬, 웨스 앤더슨, 루카 구아다니노, 그리고 봉준호까지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거장들의 러브콜을 받는, 가장 바쁜 배우 중 하나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버지니아 울프가 살아서 이 영화를 본다면 틸다 스윈튼의 연기를 보고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하다. 이 소설에 영감을 준 자신의 절친한 친구(연인이었다는 소문도 있다), 비타 색빌웨스트를 떠올릴까? 아니, 어쩌면 틸다 스윈튼에게 영감을 받아 또 다른 소설을 쓸지도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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