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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대에 접어드니 지나온 시간이 이제야 제대로 보입니다. 서른과 마흔 사이에서 방황하던 삼십 대의 나에게 들려주고픈, 지나갔지만 늦진 않은 후회입니다.[편집자말]
사십대에 들어서면서 가장 많이 고민이 된 문제는 '시간'이었다. 실패한 줄 몰랐는데 돌아보니 실패가 많았다. 열심히 사는 것 외에 내가 원하는 시간을 제대로 만들어낸다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좋은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을까 해서 주변을 봐도 모두 비슷했다.

이 화두에 있어서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 있다. 그녀는 나보다 나이가 7살 어린 SNS 친구다. "저 사람은 어떻게 저 일을 다 해내지? 그것도 정성스럽게." 그녀를 볼 때마다 나오는 감탄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자유기고가로 치열하게 칼럼도 쓰고, 의미 있는 집회나 세미나에도 참석하며, 가끔 강의도 한다.

바쁜 와중에 지인들과 독서모임도 하는 눈치다. 잘 모르면 배우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일상의 단상이나 좋은 제품에 대한 정보도 쏠쏠하게 재밌고 유익하다. 물론 이 많은 일들을 해내느라 본인은 좀 허덕거리고 내가 가늠치 못하는 고민과 어려움이 있겠지만, 제3자로서 무책임하게 이야기하자면 "감탄한다."

단순히 많은 활동을 해서가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과 낯선 것에 대한 도전, 잘 모르거나 이상한 것에 대해 던지는 집요한 사유와 질문, 일상의 사소한 순간에 대한 다정한 응시, 필요하고 유익한 것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정성. 그녀가 만들어내는 일상의 시간들과 일상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다. 밀도 높은 시간을 보내는 만큼 존재는 단단해진다. 나보다 7살 어리지만 내가 존경하는 이유다.

인생에 지진을 일으킨 두 번의 글쓰기 수업
 
내가 쓴 글에 대한 합평도 다 다르다. 부정적 평을 들을 땐 등이 선득거리지만, 깨지지 않으려면 이 수업에 올 필요가 없었다.
 내가 쓴 글에 대한 합평도 다 다르다. 부정적 평을 들을 땐 등이 선득거리지만, 깨지지 않으려면 이 수업에 올 필요가 없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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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모르겠지만 그녀 덕분에 나는 두 번의 글쓰기 수업을 들었다. 그녀가 참여하고 소개하는 수업이라면 믿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그 두 번 수업은 내 인생에 지진을 일으켰다.

첫 번째는 독서토론을 겸한 글쓰기 수업이었다. 선생님이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강의가 아니라 책을 읽고 토론하고, 각자 써 온 글에 대해 합평을 하는 수업이었다. 주입식 교육에 익숙하기도 했고, 독서 토론 같은 것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사실 좀 부담이 되었다. 뭔가 있어 보이고 싶은데 그렇지 못한 내 본전이 드러날까 봐 두려웠다.

첫 수업 시간 때, 그 수업이 아니면 아마 평생 보지 않았을 책들이 과제로 주어졌다. <여공문학> <일하지 않을 권리> <노년은 아름다워> <아픈 몸을 살다> 등 처음 읽어보는 난해한 책들. 더 난해한 건 그 책을 읽으면서 아무 생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무심함과 무관심이 낳은 무지였다.

또한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TV나 신문에서만 접하던 사람들을 만났다. 동성을 좋아하는 친구,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고 옥살이를 하고 나온 친구 등등. 그동안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바로 옆자리에서 생생하게 그들이 사회의 편견으로 인해 겪는 불편함들, 고뇌, 선한 소시민으로서의 평범한 일상을 들으며 부끄러웠다. 뉴스나 기사에서 다뤄지는 짤막한 정보만으로 함부로 판단했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즘엔 그녀가 흘린(?) 정보로 시사 칼럼 쓰는 수업도 듣고 있다. 얄팍한 시사 상식에, 한 번도 시사 칼럼이란 걸 써 본 적이 없어서 4주째 매일 장벽을 넘고 있는 기분이다. 장벽 넘는 과정에 좌절은 필수다.

글을 쓰다가 맥락을 놓치고 헤매는 일도 다반사고 내가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싶어서 자괴감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매주 '이번 주는 빠질까' 하는 유혹과 '뻔뻔하게 넘어서자'는 의지 사이에서 자아분열을 하곤 한다.

그래도 그 수업 시간이 기다려지는 이유는, '다른' 의견을 들을 수 있어서이다. 한 가지 이슈에 대해 써오는 글이 모두 다르고, 관점도 다르다. 한 이슈는 개인이 처한 환경이나 경험에 따라 매우 다르게 해석되고 통찰된다.

내가 쓴 글에 대한 합평도 다 다르다. 부정적 평을 들을 땐 등이 선득거리지만, 깨지지 않으려면 이 수업에 올 필요가 없었다. 내가 일부러 '좌절'이라는 지뢰가 많은 자리로 나를 던지기로 결정했으니 그 결정에 책임을 다하는 수밖에.

그리고 이제는 안다. 매번 자존심 상하고 좌절하고 소심해지는 이 고개를 넘으면 한 발자국 정도는 나아가 있을 거라는 걸. 나보다 어리지만 이미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훨씬 밀도 있게 사는 친구의 뒤를 쫓으며 얻은 용기다.

30대를 돌아보면 아쉬운 건, 내가 이런 시간을 적극적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무언가 일을 벌이려면 많이 알아야 할 것 같고, 그러려면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은 부담(이라고 쓰고 게으름이라고 읽는다)이 되었다. 굳이 그런 수고를 하고 싶지 않아서 대충 내가 익숙한 시간에만 머물렀다. 사람도 그렇다. 굳이 낯설고 나와 다른 사람들 속에 가지 않았다. 많이 만날 필요는 없다 해도 다양하게 만나지 않은 것은 후회스럽다.

'어떤 관계를 맺느냐'는 '어떤 시간을 보내느냐'는 것
 
<대화의 희열>에 나온 모델 한혜진
 <대화의 희열>에 나온 모델 한혜진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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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대화의 희열>이라는 프로그램에 모델 한혜진씨가 출연해서 모델로 정점을 찍을 때 해외 진출을 했던 사연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해외는 100% 대표님 때문에 간 거다. 너무 가기 싫어서 피해 도망다녔다. 난 되게 안주하는 스타일이다. 7년 동안 한 가지 일을 했으니 난 이미 베테랑이고 일도 많았다. 이미 너무 배가 부른데 갑자기 가난해지라는 거다. 누가 그러고 싶겠나. 지구 반대편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신인으로 돌아가는 거다."

결국 그녀는 갔고, 패션계 거장 칼 라커펠트 쇼에 서며 모델로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맛보며 전성기를 누렸다. 생각해 보면 나도 신인의 마음으로 열심히 한 적은 있다. 하지만 그건 생존하기 위한 필승의 자세였지, 배부른 데도 가난한 자리로 간 건 아니었다.

꼭 물리적으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해외만 낯선 곳이 아니다. 내가 익숙하지 않은 모임, 만남, 관계는 모두 해외만큼이나 심리적 거리가 멀고 낯선 곳이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 있어서 글쓰기 모임은 지구 반대편 아무도 없는 곳에서 신인이 되는 자리인 셈이었다.

이제라도 겪어서 다행이라고 여기지만, 마흔을 훌쩍 넘겨서 하려니 이미 굳어진 게 너무 많다. 깨는 데만 시간이 오래 걸리고 30대 때보다 잃을 게 더 많아서인지 두려움과 망설임의 지분이 지나치게 많다.

어떤 관계를 맺느냐는 어떤 시간을 보내느냐와 연결된다. 타인과의 관계는 물론 내 자신과의 관계도 포함된다. 사람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할 만한 시간을 만들어내는 방법이나 내용은 다를 수 있다. 여기에도 정답은 없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백지 수표 같은 시간. 누군가와 함께, 혹은 나 혼자, 좋은 시간을 만들어내려 한다. 기왕이면 독서모임 같은 사소한 일부터 좀 벌여봐야겠다. 지금 내 수준에서는 그 정도가 지구 반대편이다. '고작'이지만 누가 아나. 이 고작이 쌓이다 보면 때늦은 전성기가 올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태그:#30대에 알았다면 좋았을 것들, #시간을 만들어내는 능력, #낯선 사람 낯선 모임, #내가 원하는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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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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