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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의 현 지도부. 왼쪽부터 천영세 부대표, 권영길 대표, 노회찬 사무총장. 민주노동당의 현 지도부. 왼쪽부터 천영세 부대표, 권영길 대표, 노회찬 사무총장.
▲ 민주노동당의 현 지도부. 왼쪽부터 천영세 부대표, 권영길 대표, 노회찬 사무총장. 민주노동당의 현 지도부. 왼쪽부터 천영세 부대표, 권영길 대표, 노회찬 사무총장.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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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국회의원 선거의 특징은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밀어붙였던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의 지지도가 급락한 대신 열린우리당이 제1당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측면과 함께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은 민주노동당이 권영길 대표의 선거구를 포함, 두 곳의 지역구에서 당선되었고, 13.0%의 정당투표 득표율로 8명의 비례대표 의석을 차지하여 원내 3당의 위치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민주노동당은 그야말로 '거대한 소수'가 되었다.

그럼에도 '원내 20석'을 기준으로 하는 규정 때문에 민주노동당은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없었다. 유권자 13.0%의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는 구조인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을 상대로 교섭단체 구성을 10석으로 하향조정을 요구했지만, 거대 양당은 독점적 지위를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다. 노회찬은 개원 국회에서 발언권을 얻어 이 문제를 거듭 제기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특히 한나라당이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당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지 못하면 국회에서 불이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국회 운영이나 여야 협상에서 제외되고 서자 취급을 받는다. 노회찬을 비롯해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같은 국회의원이면서도 거대 양당 의원들에 비해 훨씬 불리한 위치에서 의정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당백(一當百)의 의지와 노력이 있어야 했다.
  
 5일 국회 본회의에서 교섭단체간 합의에 따라 상임위 정수규칙 개정특위 구성안을 표결에  붙여 통과시키자,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이 의사진행발언을 하고 있다.
 5일 국회 본회의에서 교섭단체간 합의에 따라 상임위 정수규칙 개정특위 구성안을 표결에 붙여 통과시키자,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이 의사진행발언을 하고 있다.
ⓒ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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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은 자신과 민주노동당의 성취에 대해 시대의 변화에 그 공을 돌린다.

"창당한 지 4년 만에 원내에 진출했는데, 그 배경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일단은 민주화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김대중 정부에 이어 노무현 정부까지 연속적으로 민주정부가 탄생하면서 우리 국민들이 민주화를 신뢰하고 확신하는 수준이 그 전보다 많이 높아졌다. 그런 것들이 진보정당을 경계하기보다 힘이 약하더라도 저런 세력은 하나 있어야 정치가 좋아진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런 과정에서 진보정당에 작게나마 문을 열어주는 태도의 변화가 있었다.

그만큼 1987년 이후 민주화가 안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제는 국민들도 무상교육, 무상의료 등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외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인 2표에서 후보는 민주당을 찍으면서도 정당은 우리 당을 찍었다. 우리가 지역구에서 상품성이 있고 바로 호응받을 수 있는 후보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당은 한번 밀어줘야겠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여기에 1인 2표제 도입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주석 5)

 
지난 4일 오후 법사위 회의장에서 의사진행발언을 하는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 지난 4일 오후 법사위 회의장에서 의사진행발언을 하는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
▲ 지난 4일 오후 법사위 회의장에서 의사진행발언을 하는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 지난 4일 오후 법사위 회의장에서 의사진행발언을 하는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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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은 국회 법사위원회에 배속되었다.

우군이 한 사람도 없는 고독한 1인 위원으로서 활동해야 했다. 그래서 항상 소수화되고 아무리 알찬 법률안을 내더라도 거대 정당의 숫자에 밀리기 십상이었다. 노회찬의 17대 국회 본회의 발언의 첫 등장은 9월 10일 국가보안법 관련 5분 발언이었다.

지난날 민주화운동ㆍ학생운동ㆍ노동운동가들이 국보법의 희생물이 되었고, 자신도 희생자의 하나였다. 국보법은 민주정부로 정권이 바뀌어도 수구세력의 버티기로 개정이나 폐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5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국보법의 폐해와 폐기 이유를 통렬하게 주장했다.

그 무렵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기자회견에서 국가보안법과 생사를 같이할 것을 주장하면서 정가의 이슈가 되어 민주노동당 원내대표단이 노회찬에게 긴급 발언을 하도록 한 것이다.

"이 나라의 역사가 정도를 걸어왔다면 1972년 10월 국회를 불법적으로 해산하고 무력으로 헌법의 기능을 정지시킨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한 자로서 형법상 내란죄로 사형ㆍ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에 처해졌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박근혜 대표가 제1야당의 당대표를 맡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주석 6)

그의 발언은 울림이 컸지만 법은 폐기되지도, 바뀌지도 않았다.

국회는 정당간 세의 대결장이기도 하지만 300명 개인간의 격투장이기도 하다. 능력이 있으면 아무리 군소정당이나 무소속의원이라도 빛을 발하고, 무능하면 아무리 집권당이나 거대 야당에 적을 두어도 존재성이 보이지 않는다. 기껏 거수기 노릇을 하거나 선거구를 돌면서 재선 운동에만 열중한다.

노회찬의 의정활동은 단연 돋보였다.

3선 의원이 되었지만 세 번 다 임기를 채우지 못한, 의정활동 7년여 동안 총 127건의 법안 및 결의안 등을 대표 발의했고, 이 가운데 34건(원안가결. ㆍ수정가결ㆍ대안반영)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노회찬이 국회의원이 된 후 처음 발의해 통과시킨 법안은 '민법개정벌률안'이었다. 2004년 9월에 발의해 2005년 3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이 개정안은, 변화된 사회상을 반영하지 못한 채 호주와 다른 가족 구성원들의 관계를 종적이고 권위적인 관계로 규율한 호주제를 폐지해 개인의 존엄과 성평등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었다. (주석 7)

노회찬은 오래전부터 전통적인 가부장제의 유제인 남성 위주의 호주제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남녀평등을 명시하고 있는 헌법에도 위배되는 제도였다.

"제가 호주제 폐지라든가 여성들의 참정권 확대라든가 여성문제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습니다. 제가 과격할 정도로 양성평등론자로서 생각하고 행동해온 점들이 다른 당 의원들에게까지 전달된 게 아닌가 생각되고요." (주석 8)

민주노동당은 당세가 소수정당에 불과했으나 17대 국회에서 활동상은 돋보였다. 10명의 의원이 각기 재능과 기량에서 손색이 없는 인재들이었다.

거대 정당들이 낙하산 공천을 일삼을 때 민주노동당은 산전수전을 겪으며 야생마처럼 단련된 후보들의 치열한 경선을 통해 선발된 의원들이었다. 민주노동당은 17대 국회의 풍향을 가늠하는 '거대한 소수'였다. 그 중심에 노회찬이 자리잡고 있었다.


주석
5>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125~126쪽.
6> 『노회찬의 진심 - 노회찬 유고산문, 2004년부터 2018년까지의 기록』, 62쪽, 사회평론, 2019.
7> 박창균, 「노회찬의 법안들」, 『노회찬, 함께 꾸는 꿈』, 284~285쪽, 후마니타스, 2019.
8> 지승호, 「유연한 사회주의자 노회찬」, 『7인 7색』, 239쪽, 북라인, 2005.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진보의 아이콘' 노회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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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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