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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4월 1일 노회찬은 2년 반의 옥고를 치르고 만기 출소했다.

35살, 심신이 건강한 상태로 사회에 복귀했으나, 사회환경은 14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파끼리, 진영끼리 치열하게 내부경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지난 92년 대선을 앞두고 이루어진 김영삼과 노태우, 김종필의 담합을 통한 3당합당을 반대하는 순간의 노무현. 지난 92년 대선을 앞두고 이루어진 김영삼과 노태우, 김종필의 담합을 통한 3당합당을 반대하는 순간의 노무현.
▲ 지난 92년 대선을 앞두고 이루어진 김영삼과 노태우, 김종필의 담합을 통한 3당합당을 반대하는 순간의 노무현. 지난 92년 대선을 앞두고 이루어진 김영삼과 노태우, 김종필의 담합을 통한 3당합당을 반대하는 순간의 노무현.
ⓒ 김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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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옥살이하는 동안 정국은 많이 변했다. 여소야대로 출발했던 노태우 정권은 1990년 1월 노태우ㆍ김영삼ㆍ김종필의 3당 야합으로 거대 여당 민자당이 태어나고, 이를 배경으로 공안정국이 조성되어 여러 명의 학생ㆍ노동자가 분신하는 등 정국은 5공으로 회귀하고 있었다. 노회찬은 이 같은 사실을 옥중에서 듣고 6월항쟁의 성과가 묻히는 것 같아 마음이 괴로웠다.

그가 출소하기 며칠 전(3월 24일)에 제14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김영삼의 민자당은 총선 전 218석에서 69석을 잃은 116석, 김대중의 민주당은 97석을 얻었다. 민주당이 서울 등 대도시에서 크게 진출하여 민자당의 비민주성을 비판하는 표심을 보여 주었다. 혁신정당 민중당은 51개 선거구에 후보를 내 출마지역 평균 6%의 득표율을 거두었으나 한 석도 당선자는 없었다. 참패였다.

이에 앞서 1991년에는 지방자치제가 30년 만에 부분적으로 부활하여, 3월에는 시ㆍ군ㆍ구ㆍ기초의회 의원선거, 6월에는 서울특별시 등 시ㆍ도 광역의회 의원선거가 각각 실시되었다.

단체장은 여전히 묶어두고 자치단체 의회 의원선거만 실시한 반쪽 지방자치선거였다. 선거는 진보진영이 세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공간이다.

노회찬은 감옥에서 진보ㆍ혁신세력의 장래와 관련, 여러 가지 구상을 하였다. 한국 정치를 바꾸고 효과적으로 노동계급의 권익을 향상시키는 데는 합법정당 운동이 시급하다고 보았다. 노동운동에서 정당운동으로 이행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평소 즐겨 읽었던 이탈리아의 곱사등이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이빨이 빠지고 위장이 망가지는" 감옥생활을 하면서 쓴 『옥중수고』의 정신이었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모두 역사의 경작자가 되고싶어 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맡고 싶어했다. 아무도 역사의 '거름'이 되고싶어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먼저 땅에 거름을 주지 않고 경작을 할 수가 있을까? 그러므로 경작자와 거름은 둘 다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추상적으로는 모두 이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거름은 희미한 그림자로 사라버리곤 했다."

노회찬은 혁신정당의 '거름'이 되고자 다짐했다.
  
92년 대선에 민중후보로 출마한 백기완 선생. ⓒ 오마이뉴스 이종호 92년 대선에 민중후보로 출마한 백기완 선생. ⓒ 오마이뉴스 이종호
▲ 92년 대선에 민중후보로 출마한 백기완 선생. ⓒ 오마이뉴스 이종호 92년 대선에 민중후보로 출마한 백기완 선생.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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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대통령선거는 유신쿠데타 이래 16년 만에 처음 실시된 직선제 대통령 선거였다. 그만큼 국민의 관심이 많았다. 민자당 김영삼, 민주당 김대중에 이어 통일국민당의 정주영, 신정당의 박찬종, 정의당의 이병호, 무소속의 김옥선이 출마하고, 진보진영에서는 '독자정당론'을 펴며 민중후보로 재야운동가 백기완이 입후보하였다. 백기완의 출마와 관련 김영삼ㆍ김대중 측에서 비판이 쏟아졌다. 양김 진영은 각각 자신들의 승리를 점치면서 백기완이 자기 쪽의 표를 잠식한다는 논리였다.

노회찬은 백기완 후보의 선거대책본부 조직위원장으로 발탁되었다. 민주세력의 표 잠식이라는 뼈아픈 질책이 따랐지만, 이런 기회에 진보세력의 확장이 중요하다고 믿었기에 당선과는 무관하게 선거운동에 열과 성을 다했다.

결국 백기완은 총 유효표의 1% 수준의 득표에 불과한 참패였다.

  
 사진③ 고가의 악기가 다 모였다. '키보드 아코디언'부터 '허리띠 색스폰'과 '빗자루 기타'까지. 노회찬 대표이 진지하게 '솔로 연주'에 나선 모습이 흥미롭다.
 사진③ 고가의 악기가 다 모였다. "키보드 아코디언"부터 "허리띠 색스폰"과 "빗자루 기타"까지. 노회찬 대표이 진지하게 "솔로 연주"에 나선 모습이 흥미롭다.
ⓒ 이상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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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의 꿈은 이땅의 기층을 이루고 있는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함이었다. 이를 위해 노동자를 위한 정당을 조직하고자 했다. 한국 사회는 노동자를 굳이 근로자라고 부르는 등 '노동'에 대한 거부감에 심한 편이다.

원인 중에는 1946년 12월 조선공산당ㆍ남조선신민당ㆍ인민당 3당이  합당하여 결성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의 행적 때문인 듯 하다. 공산주의자 허헌ㆍ박헌영 등이 조직한 남로당은 미군정의 탄압을 받아 많은 당원이 체포되거나 당이 불법화되자 주요 간부들이 월북하여 북조선노동당과 합당, 조선노동당이 되었다.

남로당 계열은 1955년 말까지 갖가지 명목으로 숙청되어 북한에서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었다. 이같은 연유로 하여 남한에서 '노동당'하면 공산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연상작용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진보신당 노회찬 당대표 후보자 2차 토론회 - 국민과의 대화'(오마이TV 생중계)가 20일 오후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스튜디오에서 시민패널 6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진보신당 노회찬 당대표 후보자 2차 토론회 - 국민과의 대화"(오마이TV 생중계)가 20일 오후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스튜디오에서 시민패널 6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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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의 노동자에 기반한 대중정당 결성에 대한 인식은 각별하다.

노동에 기반한 대중정당은 진보정당 정체성의 가장 중요한 축이다. 강한 노동은 복지국가 건설의 물적 기반이며 정책의 중심가치여야 한다. 이를 실천할 방법은 과거의 관성을 벗어난 새로운 로드맵으로 기획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주노총의 배타적지지 방식은 과거의 낡은 방식이 되었으며 민주노총 조직률이 5퍼센트 남짓한 현실에서 내부 정파 구조에 위탁하는 조직화 방식의 한계와 폐단도 분명하다.

이제부터 노동과 정치는 직접 만나야 한다. 비정규직 등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노동 대중과 진보정당이 직접 만나는 다양한 장과 소통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진보정당의 미래는 노동자와 청년과 여성의 어깨 위에 놓여있다.


1990년대 한국정치 판도에서 노동자 정당의 결성은 여전히 쉽지 않는 과제였다.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은 초기에는 고위공직자재산 등록ㆍ금융실명제 실시ㆍ하나회 척결 등 개혁의 칼을 뽑았지만, 얼마 뒤부터 수구기득권 세력에 포획되어 남북문제는 냉온탕 정책으로 변하고 노동문제 등에서 보수화로 돌아섰다.
  
브라질 노동당 대통령 후보 룰라를 만나 민주노동당 노회찬 사무총장이 고려인삼을 선물하는 장면. 브라질 노동당 대통령 후보 룰라를 만나 민주노동당 노회찬 사무총장이 고려인삼을 선물하는 장면.
▲ 브라질 노동당 대통령 후보 룰라를 만나 민주노동당 노회찬 사무총장이 고려인삼을 선물하는 장면. 브라질 노동당 대통령 후보 룰라를 만나 민주노동당 노회찬 사무총장이 고려인삼을 선물하는 장면.
ⓒ 민주노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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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후보에 백기완을 추대했던 진보진영은 선대본부를 해체하면서 "진보적 정당창당 추진 위구성을 위한 수임위원회'를 구성하고, "노동자 중심의 민중대표자회의 건설, 독점재벌 해체 등을 표방하였다. 노회찬이 꿈꾸던 진보정당의 첫 걸음이었다. 노회찬의 회고.

저는 더 이상 현장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고요. 자발성에 기초해서 운동이 이루어져 나가니까. 그럼 내가 뭘 할거냐 해서 진보정당 한건데, 사실 진보정당 가지고 제일 고생한 사람 중에 하나가 저일 겁니다. 당은 2000년에 만들어졌지만, 본격적으로는 92년부터 시작했고, 그전부터 따지면 88년부터 이 작업을 해왔던 것인데 초기에 얼마나 멸시와 천대를 받았나. 특히 우리에게 제일 괴로웠던 것은 같은 운동진영에서 보여준 냉소와 비판이었죠.

민주정부 세워야 되는데 쟤들 뭐하는 짓이냐는 시각도 충분히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과도하게 짓밟혔던 것이죠. 92년도에 제가 진정추(진보정당 추진위원회) 처음 할 때 중앙당에 상근자가 열다섯 명인가 됐었어요. 정말 깃발 하나 들고 나중에는 옮기다 옮기다가 강서구까지 사무실이 옮겨갔었죠. 고난의 세월 끝에 당은 창당됐는데, 저는 진심으로 너무 기뻤습니다. 그때 어떤 생각이었냐면, 제 인생의 목표의 반은 이루어졌다. 창당을 한 것만으로도.

주석
1> 노회찬, 「진보정당의 위기와 정체성 찾기」, 2013년 1월 25일, 진보정의연구소 발표문.
2> 『진보의 재탄생』, 12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진보의 아이콘' 노회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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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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