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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서울에서, 나는 파주에서 살고 있습니다.

둘째 딸이 내 일을 감당해주는 3박4일 동안 서울의 아내집에서 휴가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아내의 집에 가는 동안 여행자의 마음이 되었습니다. 아내가 출근한 시간에도 집을 나와 낯선 곳을 산책하는 마음으로, 혹은 내 마을에 개입하는 당사자의 시선으로 느리게 마을을 걸었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설렘과 정주자의 애착 그 사이 어디쯤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발길이 출발지인 아내의 집으로 되돌아왔을 때 골목에서 오감을 통해 가슴으로 스며 남은 것은 골목을 사는 사람들의 말 없는 질서 같은 것이었습니다. 소소한 그 시간을 되뇌어봅니다.

#1

우이신설경전철의 솔밭공원역에 내릴 때 역이름만으로 마치 소나무숲으로 들어가는 듯한 우아하고 여유로운 마음이 됩니다. 우이천을 건너면 나를 맞는 것이 마을지도입니다.

어느 곳에 가나 그곳의 시작은 지도를 머릿속에 담는 일입니다. 30년이 넘는 여행자의 습관입니다. 다음에는 그 지역의 거리명이나 공간을 천천히 가슴에 담는데 담기는 이름에 따라 그 커뮤니티의 이미지가 결정됩니다.
 
지역 지도는 그 지역의 거리뿐만 아니라 정서와 환경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지역 지도는 그 지역의 거리뿐만 아니라 정서와 환경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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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천'과 숲을 따라 마을을 감싼 '쌍문1동둘레길'이, '해오름길'과 '7개의보물이있는골목길', '왕실묘역길'이, '희망의길'과 '시인의길', '감사의길'이, '미나리깡'과 '아카시아숲', '겸재정선묘'가, '약초원'과 '나눔텃밭'이, 그리고 '덕성여대'가 차례로 눈길이 갔습니다.

외국의 어느 지역을 여행할 때도 대학방문을 빼놓지 않습니다. 대학은 학생이 아닌 여행자에게도 값싸고 질 좋은 식당이 있고, 박물관이 있고, 도서관이 있고, 멋진 산책길이 있고, 무엇보다도 건학이념이 푸른 정신으로 살아있는 큰 복합문화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2

백운재래시장과 쌍문1동마을마당을 지나는 길에 걸린 현수막 하나가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2019년부터 주민세 주민자치회로 환원!! 주민세로 실행할 다양한 주민아이디어를 기다립니다"는. 수십 년간 주민세를 냈지만 그것이 어떻게 쓰이는지는 한 번도 관심을 둔 적이 없었습니다.
 
이 현수막은 주민세를 주민의 아이디어로 실행한다는 당연한 생각을 일깨워주었다.
 이 현수막은 주민세를 주민의 아이디어로 실행한다는 당연한 생각을 일깨워주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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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집이 있는 약초원 골목길에 접어드니 먼저 눈이 가는 것은 새로 단장된 약초들 명패입니다. 황기, 기린초, 톱풀, 지모... 덕성여대 약대에 속한 녹색공간입니다. 지역민들에게는 그곳이 아파트의 숲이 아님이 얼마나 축복인지.

약초원 펜스에 걸린 2개의 공지문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헌책방 외갓집에가자'와 '5월7일 오전 08시에 이삿짐 차량이 들어옵니다. 죄송합니다.'라는. 이 짧고 외진 골목에 헌책방이 있다는 것이, 이사를 가기 위해서는 좁은 골목에 이삿짐 차량이 들어올 수 있도록 동네사람들이 각자 차량을 비켜주어야 하는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 A4용지 3장 때문일까요, 이삿짐 차량은 무사히 들어왔고 이삿짐도 잘 실리고 있었습니다.
 
좁은 골목길, 이사를 가기 위해서도 동네사람들의 상호배려가 필요하다.
 좁은 골목길, 이사를 가기 위해서도 동네사람들의 상호배려가 필요하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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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내의 집 처마 기왓장 아래 틈새는 참새들이 숙소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아침부터 재잘되던 참새 소리의 연유였습니다. 옆집은 정원이 아름다운 노부부가 사는 집이었습니다. 아내가 어젯밤 저녁밥상에서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옆집 할아버님은 좀처럼 얼굴 뵙기가 어려워요. 90 연세 탓에 주로 집에서 지내시고 여든 넘으신 할머니께서는 솔밭공원옆 도봉도서관을 걸어서 오가시며 책을 빌려다 보시는 참 고운 어른이세요. 그제 그 어른을 집 앞에서 뵈었어요. 넓은 정원 한쪽에 푸성귀를 심으시면 좋지 않겠냐고 말씀드렸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저희집 마당으로 들어오시는 거예요. 손에는 물뿌리개가 들려있고... 마당의 장독대로 오르시더니 물을 뿌렸어요. 할머니댁 창고 지붕에 화분을 올려 상추와 고추를 심으셨는데 우리집 장독대 위에서 물을 주는 것이 편했던 거예요."
 
옆집 할머님은 이웃집을 자유롭게 들락이며 자기집 옥상의 물도 주고 때때로 이웃집의 마당도 쓸어주신다. 서울의 이 골목에서는 집과 집의 경계없는 섞임이 여전히 가능하다.
 옆집 할머님은 이웃집을 자유롭게 들락이며 자기집 옥상의 물도 주고 때때로 이웃집의 마당도 쓸어주신다. 서울의 이 골목에서는 집과 집의 경계없는 섞임이 여전히 가능하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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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내가 심은 덩굴장미가 한뼘 높이로 담 위로 나와 있었습니다. 아내는 담이 덩굴장미로 덮일 상상에 들떠 있습니다. 좁은 골목길 담 아래에 나무로 흙상자를 만들어 심은 식물들이 모두 초록잎으로 무성했습니다.

회색 골목에 생기를 돌게 하는 마법같습니다. 4년 전 서울시의 골목길 사업, '서울, 꽃으로 피다'로 단장했던 결과입니다. '7가지 보물이 있는 희망골목길' 벽에 걸린 쟁반 옆에 '언제나 손님이 오시면 희망을 대접하는 쟁반'이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언제나 손님이 오시면 희망을 대접하는 쟁반'이라는 설치미술. 생각해보니 저희 부모님이 손님을 맞아 고봉밥을 퍼냈던 그 쟁반이다.
 "언제나 손님이 오시면 희망을 대접하는 쟁반"이라는 설치미술. 생각해보니 저희 부모님이 손님을 맞아 고봉밥을 퍼냈던 그 쟁반이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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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지도에 표기된 7가지 보물은 희망슈퍼, 희망테이블, 희망쟁판, 사과나무, 텃밭과 빗물저장통, 만복계단, 도봉산진경입니다. 앞집 지붕 위로 혹은 골목 사이로 어디서나 북한산과 도봉산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이 마을의 가장 큰 보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비록 콘크리트 바닥을 딛고 살고 있지만 고개를 들면 산의 바위와 숲의 녹색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비록 콘크리트 바닥을 딛고 살고 있지만 고개를 들면 산의 바위와 숲의 녹색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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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집집마다 빈 공간에 채마밭을 만들고 화분에 고추와 호박까지 심어 푸성귀를 자급할만했습니다. 시멘트 빈틈으로도 풀들이 고개를 내밀어 삶을 분투하고 있습니다.
 
한 뼘의 땅이라도 봄이 오면 채마밭으로 변한다. 콘크리트 위에라도 빈 상자에 흙을 담아 생명을 키운다.
 한 뼘의 땅이라도 봄이 오면 채마밭으로 변한다. 콘크리트 위에라도 빈 상자에 흙을 담아 생명을 키운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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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기네집은 '우정빌라 주차장옆 긴골목 끝'에 새로운 대문을 내고 옛 대문이었던 곳에는 큰 나무 한 그루를 벽화로 그렸습니다. 그 나무에는 빵고와 빵기, 성염, 시아, 시우, 전순란, 오지선이 열매로 달렸습니다.

큰 숲속 산책로로 이어지는 골목의 위쪽 끝 나뭇잎들은 동쪽 햇살을 밭아 꽃잎처럼 화사했습니다.

다시 내리막길. 옆 골목 여기저기에는 감나무 양쪽으로는 흰목단꽃과 노란 죽단화가 담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오래된 대문의 문양에는 노송과 두 마리의 학이 노닐고 있습니다.

#6

1.3평 '쓸모의발견' 책방이 문을 열기에는 이른 시각이었지만 담장 옆에는 세 그릇의 물과 사료가 그대로입니다. 길고양이도 아직 아침 게으름을 피우고 있나 봅니다.

그 앞에는 항아리가 놓여있습니다. "필요하신 분 가져가셔도 좋아요." 바닥을 뚫어 화분으로 사용하던 것을 새 주인을 만나게 해주려는 안내문구를 달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쓰일 일이 없어진 것에 '필요하신 분 가져가시라'라는 공지를 달고 새 주인을 기다리는 골목의 풍경이 얼마나 따뜻한지... 그리고 'CCTV!'라는 경구가 얼마나 우울한지...
 자신에게 쓰일 일이 없어진 것에 "필요하신 분 가져가시라"라는 공지를 달고 새 주인을 기다리는 골목의 풍경이 얼마나 따뜻한지... 그리고 "CCTV!"라는 경구가 얼마나 우울한지...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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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절모를 쓴 동네 어르신은 아침 나들이에서 돌아오시고 약초원쉼터슈퍼는 막 문을 열고 있습니다. 약초원 김을 매는 할머니와 눈 맞추고 집으로 돌아온 뒤 책 한 권을 거의 읽었을 때쯤 아내가 퇴근해 전을 부쳤습니다.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태그:#쌍문동,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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