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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민주노동당 '2004 총선 대책위원회' 본부장.
▲ 노회찬 민주노동당 "2004 총선 대책위원회" 본부장. 노회찬 민주노동당 "2004 총선 대책위원회" 본부장.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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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은 군 복무를 마치고 1979년 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재수와 군 입대를 하느라 만학이었다. 그의 재학 시절은 박정희 정권의 광기로 가득 찬 긴급조치시대였다. 긴급조치는 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 경제상의 위기에 처하거나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어 신속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 대통령이 내정ㆍ외교ㆍ국방ㆍ경제ㆍ재정ㆍ사법 등 국정 전반에 걸쳐서 내리는 특별한 조치를 말한다.

그런데 박정희는 1974년 1월 8일 유신헌법 개정 논의를 금지하는 내용의 긴급조치 1호와 위반자를 군사재판에 회부하는 내용의 2호를 시발로, 같은 해 4월 민청학련사건을 날조하여 긴급조치 4호, 1974년 가을에는 날로 가속화되는 유신철폐 운동에 대처하여 고려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군대를 투입하는 긴급조치 7호를 발령했다.

이어서 1975년 5월에는 긴급조치 종합세트격인 9호를 선포한다.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부정적 행위를 금한다. 이에 따른 명령이나 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아니한다."는 내용이었다. 단순한 행정명령 하나만으로 국민의 기본권과 헌정질서를 유린하는 반민주 폭거였다.

노회찬은 '긴급'을 요하는 긴급조치가 장장 4년 이상이나 지속될 만큼, '긴조시대' 한국 사회가 폭압과 야만이 절정에 이른 1979년 대학에 들어가, 온몸으로 시대적 광기를 겪어야 했다. 그가 입학한 고려대학은 특히 반유신 운동이 치열하여 무장한 군부대를 교정에 투입하고, 그 후유증이 가시지 않고 있던 시기였다.
  
'삼성 뇌물 X-파일 전면 공개 및 이건희·홍석현 회장 수사 촉구를 위한 촛불문화제'가 9일 저녁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본관앞에서 '삼성 불법뇌물 공여사건 등 정·경·검·언 유착의혹 및 불법도청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공대위(X파일 공대위)' 소속단체 회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이 “이건희 회장을 법정에 세울 때까지 피땀 흘려 끝까지 싸우겠다"고 밝혀 큰 박수를 받았다.
▲ "삼성 뇌물 X-파일 전면 공개 및 이건희·홍석현 회장 수사 촉구를 위한 촛불문화제"가 9일 저녁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본관앞에서 "삼성 불법뇌물 공여사건 등 정·경·검·언 유착의혹 및 불법도청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공대위(X파일 공대위)" 소속단체 회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이 “이건희 회장을 법정에 세울 때까지 피땀 흘려 끝까지 싸우겠다"고 밝혀 큰 박수를 받았다. "삼성 뇌물 X-파일 전면 공개 및 이건희·홍석현 회장 수사 촉구를 위한 촛불문화제"가 9일 저녁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본관앞에서 "삼성 불법뇌물 공여사건 등 정·경·검·언 유착의혹 및 불법도청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공대위(X파일 공대위)" 소속단체 회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이 “이건희 회장을 법정에 세울 때까지 피땀 흘려 끝까지 싸우겠다"고 밝혀 큰 박수를 받았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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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고 시절에 이미 반유신 유인물을 뿌렸던 노회찬은 대학생이 되어서도 긴급조치에 침묵하거나 몸을 사리지 않았다. 1학년생이라 시위를 주도할 위치는 아니었으나 고교 때의 경력이 알려지면서 선배들이 끌어들여 이념 서클의 책임을 맡겼다. 그래서 반유신 시위를 준비하고 각종 시위에 앞장섰다.

고려대학에 처음으로 학회를 만들고 이를 지도했다. 고교시절의 행적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어서 경찰은 그를 주시하였다. 여러 차례 경찰서에 불려다니고 관악경찰서로 끌려가서는 극심한 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해 가을(1979년 10월 26일)의 사태로 박정희가 암살되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성향으로 보아 노회찬은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을 터이고, 긴 세월 옥고를 치렀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10·26사태는 그에게도 큰 행운이었다.

하지만 '행운'은 오래 가지 않았다.
희망차게 열린 1980년 '서울의 봄'은 박정희 정권에서 권력의 맛을 즐겨온 전두환 일당이 광주에서 엄청난 살상극을 자행하고,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비참하게 막을 내렸다. 승냥이와 싸우다가 늑대를 만난 격이었다.

노회찬은 대학 시절에 긴급조치→10ㆍ26사태→5ㆍ18 광주민주화운동→신군부의 쿠데타를 오롯이 겪었다. 지극히 불운한 대학시절이었다.

누구 못지않게 사회의식에 예민하고 정의감이 남달랐던 그에게 민주주의의 좌절과 유신체제와 5공의 폭압은 삶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을 불러왔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묻고 또 물었다.

그때 마침 사귀던 여성과의 이성 문제까지 겹쳐 25살 만학도를 어렵게 하였다. 노회찬은 1981년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 대신 전라북도 고창에 있는 창담암을 찾았다. 통일신라 때 지은 고찰이었다. 그가 사회과학 서적을 배낭에 잔뜩 짊어지고 이 고찰을 찾았을 때 절방은 고시 준비생들이 다 차지하고 명부전밖에 없었다. 명부전은 죽어서 극락과 지옥을 결정한다는 절방이었다.

밤에는 박쥐가 날고 바닥에서 찬 기운이 올라오는 명부전에서 한 달을 기숙하였다. 입신출세를 꿈꾸며 머리를 싸매고 고시 공부를 하는 동년배들을 지켜보면서 노회찬은 고뇌의 나날을 보내었다. 장남이니까 부모님 문제, 여자 친구 문제, 진로 문제 등 그야말로 백팔번뇌, 온갖 상념과 고뇌가 얽히고설키고 거듭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단하기에 이른다. 노동운동을 하기로.

아, 당시 전기가 안 들어왔던 그 절에서 지내면서 촛불을 켰던 촛대까지도 아직 가지고 있어. 나 혼자서 결의를 한 거지. 나는 간다. 노동운동으로. 그때부터 학생운동도 손을 떼기 시작하고, 본격적으로 노동운동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용접도 배우고. (주석 10)

머리 좋고 시대 의식이 투철했던 고려대생 노회찬은 25살 창창한 나이에 극락과 지옥을 결정한다는 명부전(冥府殿)에서 '극락'의 길을 버리고 '지옥의 길'을 택한다. 옆방의 학생들이 극락의 길을 찾아 불경 대신 법률서적에 매몰되고 있을 때, 그는 가시밭길을 찾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땅에서 노동운동은 지옥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길이다.

노회찬이 생애의 갈림길이 되는 고창 창담암 명부전에 기숙하게 된 것은 어떤 운명적인 서사처럼 보인다. 불교에서 명부는 명계(冥界)에 있다고 하는 법정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죽은 뒤에 심판을 받는다고 하는 곳으로서 명조(冥曹)라고도 일컫는다.

그때 창담암에서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학도 중에 합격자가 있었을 것이고, 그중에는 뒷날 법비(法匪)가 되거나 사법농단의 법조인이 된 인물은 없었을까.

노회찬이 하필이면 창담암을 찾게 되고 빈방이 없어서 명부전에 기숙하면서 노동운동의 길을 택하게 된 과정은 향후 그가 짊어지고 갈 어떤 운명의 작용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극락과 지옥을 심판하는 명부전의 시왕(十王)들은 노회찬과 법비들을 어떤 곳으로 보낼지 궁금하다.
  
용접공 시절을 회상하는 노회찬 의원
 용접공 시절을 회상하는 노회찬 의원
ⓒ 노회찬 의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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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올라온 노회찬은 대학을 졸업한 후 학생운동을 접고 노동운동가의 길을 준비한다. 그리고 대학 4학년 때인 1982년 영등포기계공고 부설 청소년직업학교를 6개월 다니며 1983년에 전기용접 기능사 2급 자격을 취득한다.

왜 하필 용접공인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우선 기능 익히기가 다른 기능보다 쉬웠어요. 선반ㆍ밀림보다는 익히기가 쉬웠어요. 두 번째는 더 흔해요. 이게. 그래서 쉽게 취직할 수 있는. 그때는 도망 다니다가도 취직할 수 있는 걸 연구 많이 했어요. 누구처럼 보일러 기사할 거냐. 그거 아니다. 토론도 많이 했고. 내린 결론이 용접이다. 해서 용접했고.(주석 11)

노회찬은 용접공이 되어 노동자들과 고락을 함께 하면서 노동운동가의 길을 걷는다. 당시 운동권 학생 중에는 대학생 신분을 감추고 노동자가 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주석
10> 『진보의 재탄생』, 59쪽.
11> 앞의 책, 8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진보의 아이콘' 노회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진보의_아이콘_노회찬_평전, #노회찬, #노회찬평전, #긴급조치시대, #용접공_노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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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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