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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자신들이 현실에서 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상황이나 장소를 종종 '동화'로 비유합니다.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어쩌면 "동화는 아름답고 환상적이어야 해" 혹은 "어린이는 몰라도 되는 세상이 있어"라고 믿기 때문 아닐까요? 

출판 검열이 있던 시절에는 쓰면 안 되는 표현이 있었다고 합니다. 정보기관은 출판물을 사전 검열하며 문제 구절에 까만 먹줄을 쳤고, 출판사는 이를 수정해 출판해야 했다고 하네요. 동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권정생의 <몽실언니>가 검열 때문에 제한적으로 표현된 부분이 있었다는 건 많은 이가 아는 사실입니다. 불과 30여 년 전 일입니다.

어린이들에게 알려주기 싫은, 보여주기 싫은 게 있던 시절에는 몇몇 어른들이 동화의 세계마저 제멋대로 각색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현실을 잊게 하거나 역사를 입맛에 맞춰 고치거나 하면서요. 그런 동화 속 이야기를 믿는 어린이는 나중에 커서 어떤 어른이 될까요?

물론 어린이들의 순수한 정서에 맞게 그린 동화도 있어야 하겠죠. 하지만 현실과 역사를 보여주는 동화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그런 동화는 어떻게 현실과 역사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요? 적어도 왜곡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부끄러워도 솔직해야 합니다.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입니다. 약 40년 전에 벌어진 아픈 역사입니다. 많은 사람이 직접 겪었거나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어른뿐 아니라 어린이들도 그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자가 되거나 목격자가 됐지요. 역사는 죽은 사람뿐 아니라 '목격자도 희생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그런 동화를 소개합니다. 어린이들에게 오월의 역사를 바로 보여주려는 동화들입니다.

오월 뜨거운 봄날을 이야기하는 <오월의 달리기>
  
국가대표를 꿈꾸었던 어느 아이의 광주민주화운동 이야기
▲ <오월의 달리기>  국가대표를 꿈꾸었던 어느 아이의 광주민주화운동 이야기
ⓒ 푸른숲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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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화는 김해원 작가가 쓰고 전국초등사회교과모임에서 감수했습니다. 창작이라는 틀을 가지고 있지만, 당시 역사를 충실히 녹여낸 작품입니다. 동화를 통해 어린이들에게 5.18민주화운동을 제대로 알려주겠다는 목적이 보였습니다.
 
이 책은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5·18민주화운동을 조명합니다. 역사가 어떤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이기만 한 게 아니라 우리와 가까운 누군가의 이야기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지요. (추천의 말에서)
 
동화의 배경은 1980년 5월 어느 날 전국소년체전에 나갈 전남 육상 대표들이 모인 광주 합숙소입니다. 국가대표가 되는 것이 목표인 아이들이 처음에는 갈등을 겪지만, 서로의 고민을 이해하면서 친구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대회가 가까워져 오던 어느 날 시내에서 흉흉한 소식이 전해집니다. 군인들이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때리더니 급기야는 총으로 쏴 죽였다고요. 대회는 연기되고 합숙소에 남은 아이들은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큰 불안에 빠집니다.
 
합숙소에 남은 아이들은 여섯뿐이었다. 늘 떠들썩하던 합숙소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명수는 합숙소가 외딴섬같이 느껴졌다. 뭍으로 나갈 배가 모두 끊겨 버려 출렁이는 바다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듯이, 명수는 장독대에 올라 양동시장 쪽을 쳐다봤다. (122쪽)
 
양동시장은 명수의 아버지가 일하는 곳입니다. 시내에서 들려오는 총성과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보며 아이는 걱정이 점점 커집니다. 불길한 걱정은 왜 항상 현실로 나타나는 걸까요.
 
명수는 아버지를 덮은 흰 천을 내려다봤다. 아버지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은 몸이었다. 흰 천 한 귀퉁이에는 붉은 피가 배어있었다. (129쪽)
 
이렇듯 동화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졌던 비극을 우회적으로, 때로는 직접 표현합니다. 동화의 끝에서 국가대표 육상선수 되는 게 목표였던 아이의 꿈이 깨졌다는 걸 보여줍니다.

이렇듯 <오월의 달리기>는 역사의 작은 이음새가 힘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잘 보여주는 동화입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오월 광주, <이름 도둑>
  
제 10회 518 문학상 동화 부문 신인상
▲ <이름 도둑> 제 10회 518 문학상 동화 부문 신인상
ⓒ 웅진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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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달리기>가 1980년으로 돌아가 5.18민주화운동을 직접 묘사했다면 <이름 도둑>은 약 40년 전 벌어진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바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요.

문은아가 쓴 <이름 도둑>은 제10회 '5·18 문학상' 동화 부문 신인상을 받은 작품입니다. 우리의 미래인 어린이들에게 5.18민주화운동을 제대로 전해 줄 문학성 높은 작품으로 뽑은 거지요.

동화는 어느 5월 학교에 이상한 소문이 도는 거로 시작합니다.
 
구령대 옆 이팝꽃이 막 피어난 날, 한 아이가 전학을 왔다. 소문이 돈 지 사흘 만이었다. 소문은 괴담처럼 흉흉했다. 바로 이름을 도난당한다는 거였다. (프롤로그에서)
 
동화는 이팝나무 꽃이 피는 5월에서 시작합니다. 광주에 지금 가면 많이 볼 수 있는 꽃이지요. 이런 아름다운 시절에 흉흉한 소문이 아이들을 떨게 합니다. 이름을 도둑맞은 아이는 황당하지만 자기의 이름을 까맣게 잊고 말고요. 이름을 기억하게 할 흔적이 싹 사라졌고, 다른 아이들도 그 친구의 이름을 역시 까맣게 잊거든요.

그렇지만 도둑맞았던 이름은 다음 날이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주인공 아이의 호기심이 시작됩니다. 바로 자기 차례가 시작됐거든요. 그러나 다음날이 되어도 이름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얼마간 아이는 이름 없는 날들을 즐깁니다. 그런 날이 길어집니다.

이름이 영영 사라질까 불안한 아이는 직접 해결하고자 평소 수상했던 전학생 뒤를 밟습니다. 그 아이는 어느 무덤가로 향했고 주인공은 전학생이 혼령인 걸 알게 됩니다. 그리고 연고 없이 묻혀서 이름을 모른다는 사연도 알게 됩니다.
 
야산에는 이름 없는 봉분들이 제법 있었다. 하나같이 1980년 5월에 생긴 것들이었다. (중략) "이름 없는 혼령들은 내내 잠들어 있다가 이팝꽃이 피면 깨어나. 참 이상해." (33쪽)
 
그 오월 광주에서 실종된 사람들의 묘였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전학생은 주인공 아이의 큰 아버지였고요. 주인공 준호의 할아버지는 그 5월에 군것질을 한다고 나가서 아직 안 들어온 아들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죽은 몸이라도 찾고 싶으니까요.

할아버지는 마침내 이름 없던 묘비에 새 묘비를 세워줍니다. 준호에겐 이런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준호야, 나 잊지 마. 이름 없는 혼령들을 잊지 마. (56쪽)
 
동화는 이렇듯 실종자를 소재로 1980년 5월에 벌어진 일들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 참극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도 아픔을 잘 표현을 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잘 전달될 수 있도록요. 어쩌면 현대사의 아픔을 소재로 한 동화의 모범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팝꽃이 등장한 것에서도 작가가 담고자 한 마음을 느꼈습니다. 이팝나무는 광주의 오월을 상징하기도 하니까요.

이팝나무에 꽃이 하얗게 피면 마치 그릇에 가득 담은 하얀 쌀밥 같습니다. 이 계절에 많이 피기도 하지만 그 5월에 주먹밥을 함께 나누던 모습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시신들을 묻었던 망월동 묘역 가는 길에 이팝나무가 많습니다. 지금 활짝 피었겠네요.

지난 3월 광주에 일이 있어 갔다가 국립 5.18민주묘지에 들렀습니다. 시신을 묻은 봉분들 옆에 실종자들 묘역도 있습니다. 봉분은 없고 묘비만 있습니다. 어쩌면 이 동화의 모델일 수 있는 아이를 거기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1973년에 태어나 1980년 5월에 실종된 이창현군입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아직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연을 볼 수 있었습니다. 거기를 다녀간 어린이들의 편지도요. "꼭 돌아오세요!"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광주의 아픔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계절에 많은 어른이 목소리를 높여 광주의 오월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우리의 미래인 어린이들의 눈망울을 잘 들여다보았으면 합니다. 어른들이 무슨 말을 할지 그 입들을 지켜보고 있는 어린이의 눈을.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오월의 달리기

김해원 지음, 홍정선 그림, 전국초등사회교과 모임 감수, 푸른숲주니어(2013)


이름 도둑 - 제10회 5.18 문학상 동화 부문 신인상 수상작

문은아 지음, 전명진 그림, 웅진주니어(2018)


태그:#518 동화, #오월의 달리기 , #이름 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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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을 지나며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을 답사하며 얻은 성찰과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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