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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여성들을 함부로 대하는 소위 '나쁜 남성'과 다른 '선한 남성'이라고 생각했다. 이 글을 읽을 많은 남성도 자신은 절대 여성을 강간하거나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차별하는 나쁜 남성이 아니라고 여기고 있을 거다.

<맨박스>라는 책을 읽으면서 나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나는 여성을 차별하지 않고, 길을 가다 여성의 신체를 만지고 도망치는 그런 행위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평소 내 생각이 어떻게, 얼마나 잘못됐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맨 박스 MAN BOX, 한빛비즈
 맨 박스 MAN BOX, 한빛비즈
ⓒ 노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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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박스>라는 책은 남자다움에 갇힌 남자들이 어떤 잘못을 반복하고 있는지 말한다. 책을 읽는 내내 '과연 나는 저자가 던진 질문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그 탓에 책을 읽는 시간이 너무나 불편했고, 살짝 머쓱한 기분으로 잠시 책을 내려놓고 싶을 때도 많았다.

 저자는 책의 목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이 바라는 목표는 남성들이 맨박스 안에서의 삶이 불편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남성들이 맨박스 밖으로만 나와야만 성평등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196쪽)

난 이 책에 담긴 정보와 관점이 남성 관련 이슈를 이해하고 인정하며 책임감을 느끼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199쪽)
   
저자가 책의 마지막에 밝힌 이 목표는 <맨박스>라는 책을 다 읽었을 때 어느 정도 나에게 실현됐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는 '당연한 남성성'이라는 문제를 확실하게 바라볼 수 있었고, 그러한 남성성을 어떻게 우리 사회가 극복해나가야 할 것인지 함께 고민하며 책을 읽었다.

저자가 책을 통해 말하는 건 복잡하지 않고 굉장히 단순할 뿐더러, 우리가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가 아니다. 저자가 말하는 남성의 '잘못된 남자다움'은 우리가 어렸을 때(특히 가부장적인 문화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는 더) 몇 번이나 겪었고, 어쩌면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건 '남자다움'이 아니다

한국에서 남자로 살아가면서 듣는 가장 흔한 말 중 하나는 "여자애처럼 울지 마라. 남자가 뭘 질질 짜냐?"라는 말이다. 울지 않아야 사나이라고 말하는 어른들은 자신도 모르게 남자다움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것이고, 여자는 그런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열등하다고 느낀다.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남자다운 건 어떠해야 한다고 배운 남성들은 점차 자신도 모르게 남자다움이라는 이름의 맨박스에 갇히고 만다. 우리는 좁은 맨박스 안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 채 "하여간 여자들이란"이라며 여성을 나무하거나 혹은 "남자 녀석이 여자처럼 왜 그래?"라고 꾸짖는다.

이러한 남자다움은 조직을 이루는 단위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특히, 나처럼 남중·남고를 졸업한 사람들은 그 시절에 겪은 남자다움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는지 잘 알고 있을 거다. 당시 남학교에서 잘 울거나 예민한 애는 계급이 최하위로 밀려났고, 운동하거나 거친 애는 최상위 계급을 누렸다.

그중에서도 여성에게 성적인 관심을 당당히 드러내는 일은 상위 계급에 있는 녀석들이 '남자다움'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자주 이용됐다. 남자들이 속한 조직 내에서 여자에게 성적인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건 자진해서 최하위 계급으로 내려가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주 음담패설이 나오기도 했다.

<맨박스>의 저자 또한 어릴 적에 그런 경험이 있다며 털어놓으면서, 우리가 어릴 적에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던 남자다움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한다.
 
당시의 난 그것 또한 정답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나처럼 진짜 남자다운 남자가 되고자 하는 (또는 이미 진짜 남자가 된 양 행동하던) 소년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진짜 남자는 섹스를 사양하지 않는다는 것을, 남자라면 늘 섹스를 원하고 절대 사양하거나 거절하지 않는 것이 철칙이었다. 남자라면 어린아이든 성인이든 섹스할 기회를 반겨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남성성에 큰 의심이 따라붙었다. (38쪽)

조직 단위로 움직이는 단체 생활에서 남자다움은 심각하게 왜곡돼 있었다. 지금도 잘못된 남자다움의 맨박스에 갇혀서 '섹스할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차는 건 남자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남자가 우리 주변에서는 적지 않을 거다.

극우 성향의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의 남성 유저들은 여전히 자신의 남자다움을 강조하기 위해 여성들을 성적으로 희화화하고 다른 사람을 폄하하면서 자신의 낮은 자존감을 위로하고 있다.

또한 가수 승리, 정준영을 비롯한 일부 유명 남자 연예인들의 '단체 채팅방'에서 벌어진 성범죄나 버닝썬 클럽에서 일어난 성 매수 및 성폭행 사건들. 그 모든 것들은 그들 사이에서 통한 '잘못된 남자다움' 때문 아니었을까?

평범한 남성들이 읽어야 할 책

지나치게 극단적인 사례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남자다움에 대해 잘못된 시선을 갖고 있다. <맨박스>라는 책은 그런 악질적인 남성과 다른 선한 남성일지라도, 은연중에 그들의 행동에 침묵으로 묵인하며 그런 일이 일어난 구조적 성차별에 동의하고 있다는 걸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래서 <맨박스>라는 책을 읽는 시간은 불편했고, 나는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렇지 않아'라며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변명할 수가 없었다. 그저 나는 저자가 말한 그 불편한 진실에 대해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리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책에서 여러 질문을 던지며 독자 스스로 묻게 한다.

<맨박스>라는 책은 너무나 익숙했던, 어릴 때부터 '잘못'이라고 제대로 지적받지 않았던 '잘못된 남자다움'과 마주하게 해준다. 이 책은 남성 독자가 주된 대상이지만, '잘못된 남자다움'에 맞추기 위해 '잘못된 여자다움'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평범한 여성들이 읽어도 좋은 책이다.

책의 저자는 우리를 향해 페미니스트가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저자는 단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인식을 돌아보라는 당부를 책에 담았다. "난 이 책에 담긴 정보와 관점이 남성 관련 이슈를 이해하고 인정하며 책임감을 느끼는 데 도움 되기를 바란다"면서.

평범한 남성으로 길러져, 평범한 남성으로 살아가는 모든 남성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현재 남자아이를 기르는 부모들에게도 앞으로 아이를 어떤 '남성'으로 길러야 할지 시사점을 던지리라 확신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노지현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노지의 소박한 이야기'에도 실립니다


맨박스 (리커버 개정판) - 남자다움에 갇힌 남자들

토니 포터 지음, 김영진 옮김, 한빛비즈(2019)


태그:#맨 박스, #남자다움, #페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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