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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자유여, 너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죄악을 범하는가!"

프랑스 혁명 지도자로 '지롱드 파의 여왕'이라 불린 마담 롤랑은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기 전 이렇게 외쳤다.

자유는 보편적 민주주의의 기초다. 인류의 역사는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이었다. 선사 시대에는 개인의 생명과 신체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 이후 인간은 획득한 물적 재산을 부당하게 빼앗기지 않을 자유를 원했다. 더 나아가 국가에 인간다운 생활을 요구하는 적극적 자유를 위해 참정권, 청구권 등을 피 흘려 얻어냈다.

자유의 신장을 위한 투쟁은 여전히 격하다. 이번엔 표현의 자유다.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인정할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아직 도출 못 했다. 다만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해를 끼치면서까지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면 안 된다는 원칙은 명확하다.

독립운동가 강간하는 친일파, 이것도 표현의 자유?
 
웹툰 '홍화당'은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당주의 동성애를 그리고 있다.
 웹툰 "홍화당"은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당주의 동성애를 그리고 있다.
ⓒ 미스터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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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웹툰 플랫폼 '미스터블루'에 남성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간 동성애를 다룬 BL 웹툰 <홍화당>이 연재를 시작했다. BL은 Boy's Love의 약자로 남성의 동성애를 소재로 한 성인물이다. 

<홍화당>의 내용은 다분히 충격적이다. 1화부터 독립운동가 이경민이 친일파 당주 조희원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강간을 당한다. 이후 강요에 의한 성관계를 지속하다가 둘 사이 사랑이 싹튼다. 개인의 성적 취향은 존중해야 하지만 그걸 어떤 형태로 표출하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진다. 형식적 표현은 자유일지라도 내용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져야 한다. 

<홍화당>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차가웠다. SNS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가의 성적 대상화를 문제 삼았다. 독립운동가의 유족들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시대의 아픔을 희화화하는 행위라는 게 중론이었다. 

특히 웹툰의 주인공 이경민의 이름이 실제 독립유공자와 같다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경민 지사는 경남 함안군에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순국한 인물로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비난 여론이 들끓자 <홍화당>의 작가 중 한 명인 '팀 조무래김'는 4일 트위터를 통해 "영화나 책, 드라마 같은 매체처럼 BL 장르에서도 다양한 소재를 표현하고 싶었다"며 "<홍화당>을 통해 역사를 반추하고, 우리나라를 구한 그분(독립운동가)들을 더 자주 떠올릴 수 있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홍화당'의 작가팀인 팀 조무래김은 4일 트위터에 "영화나 책, 드라마와 같은 다른 매체들처럼 우리가 몸담고 있는 분야의 장르에서도 좀 더 다양한 이야기와 소재를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고 밝혔다.
 "홍화당"의 작가팀인 팀 조무래김은 4일 트위터에 "영화나 책, 드라마와 같은 다른 매체들처럼 우리가 몸담고 있는 분야의 장르에서도 좀 더 다양한 이야기와 소재를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고 밝혔다.
ⓒ 팀 조무래김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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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블루 측 또한 7일 홈페이지에 "독립운동이라는 역사적 소재를 사용하는 데 좀 더 신중하지 못했던 점에 대한 비판을 통렬히 받아들이며, 차후 유사한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역사적 이슈와 장르에 대하여 더욱 깊이 고민하도록 하겠습니다"라는 사과문과 함께 연재 중단을 결정했다. 

그러나 '굳이 성적으로 독립운동가를 상기시킬 이유가 있냐'는 것은 차치하고 '이들의 표현을 자유란 이름으로 존중해야 하는가'란 의문이 남는다.

표현의 자유, 어디까지 인정해야 할까?  

표현의 자유는 헌법에 명시된 기본권 중 하나다. 이는 제 생각이나 의견을 표현할 자유를 뜻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21조 제1항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2항에는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즉 <홍화당>이 국민 정서에 반한다고 해서 처벌할 수도, 창작 행위를 막을 법적 근거도 부족하다. 

웹툰의 주인공 이름이 실제 독립유공자와 같다는 논란에 대해 팀 조무래김은 "<홍화당>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경민은 만세운동에 참여하시고 1919년에 작고하신 이경민 독립투사와 인적사항, 특징, 세대, 활동 시기, 행보 등 모든 면에 있어서 겹치지 않으며(연관이 없으며) 주인공 이경민의 이름은 흔한 이름으로 사용되었음을 알린다"고 주장했다. 동일 인물이 아닌 가상 인물이란 소리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홍화당>의 법적 책임은 없어 보인다.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사회 통념상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이 멀쩡히 살아있고 우리나라는 아직 당시의 아픔을 품고 있다. 물론 예술가는 하고 싶은 작품을 만들고 발표할 권리를 가졌다. 하지만 대중이 무조건 인정하고 수용할 필요는 없다. 예술가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듯 대중도 비판할 권리가 있다. 이는 작가를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창작 활동을 돕는 행위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표현의 자유고, 받아들여야 할까? 

<혐오 표현, 자유는 어떻게 해악이 되는가>의 저자 제러미 월드론 뉴욕대학교 교수는 "방식과 내용의 문제로 표현을 제한하면 안 된다.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때는 사회 전반적으로 보편적이고 모종의 객관성을 띠는 해악이 있을 경우"라며 "특정한 표현으로 어떤 한 사람이나 집단의 '존재 기반'이 허물어질 때 표현의 자유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자의 관점으로 볼 때 팀 조무래김의 표현의 자유는 금지되어야 한다. 
 
<혐오표현 자유는 어떻게 해악이 되는가?>의 저자 제러미 월드런은 때에 따라 표현의 자유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혐오표현 자유는 어떻게 해악이 되는가?>의 저자 제러미 월드런은 때에 따라 표현의 자유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출처 : 이후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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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국권 수복을 위해 민족운동을 전문적으로 하던 사람을 '독립운동가'라 칭한다. 일제는 식민지배를 방해하는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고 제거하는 데 열중했다. 끔찍한 고문과 형벌을 자행했고 많은 독립운동가의 목숨을 앗아갔다. 살아남은 독립운동가들도 건강과 재산을 잃고 비참한 인생을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 과정에서 많은 변절자가 생겼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암살>에서 변절자 이정재(염석진 역)는 이렇게 말한다. "몰랐으니까, 해방될 줄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냐?" 독립운동가는 전망을 믿지 않는 불합리한 사람들이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조국의 미래에 목숨을 내던진 것이다. 그들의 지상과제는 나라를 수탈한 일제와 앞잡이인 친일파들의 손아귀에서 조국을 구하는 것뿐이었다. 웹툰 속 독립운동가가 아무리 '허구'라 하더라도 변절자인 친일파의 성적 노리개라는 점만큼 치욕적인 게 있을까? 적과 붙어먹는 건 독립운동가의 근간을 뒤흔드는 이야기다. 독립운동가란 집단의 존재 기반이 허물어진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은 13일 기자와 전화 인터뷰에서 "일차적으로 플랫폼 운영자의 문제라 생각한다"며 "사전 심의를 통해 일반 독자까지 전해지지 않게 할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웹툰 심의는 지난 2012년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한국만화가협회의 업무협약을 통해 자율규제로 가닥을 잡았다. 영화는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사전에 등급을 결정하지만 웹툰은 업체나 작가가 자체적으로 등급을 정한다. 큰 영향력을 가진 대중매체인 인터넷에 실린 콘텐츠는 국민의 역사의식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명확하고 체계적인 심의 시스템이 필요하다. 

창작자가 독립운동가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방 기획실장은 "독립운동가를 우상화할 필요는 없다. 원한다면 여러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다"며 성역이 아님을 강조했다. 하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이 5.18 민주화 운동을 폄하하는 게 표현의 자유가 아니듯 사안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가령 독일은 2차 대전 때 나치의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을 찬양·부인·경시하는 행위를 '대중선동죄'로 규정한다.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와 나치의 만행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노예제도로 아프리카계 흑인을 착취하던 미국에선 흑인에 대한 제한 없는 표현을 암묵적으로 금지한다.

유야무야 넘어 갈 일이 아니다

해명 글과 사과문을 올렸지만 이후에도 <홍화당>의 작가팀은 사안의 중대함을 깨닫지 못한 듯 보인다. 독립유공자 유족뿐 아니라 그들의 희생 위에 발 딛고 사는 국민에게도 모욕적 행위를 했음에도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맞다. 잘못을 인정하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 미국의 강연가 데일 카네기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 시간이 지난다고 없던 일이 되지 않는다. 

사람은 성인(聖人)이 아닌 이상 잘못을 저지른다. 문제는 허물의 여부에 있지 않다. 그에 대해 어떤 태도와 마음을 갖느냐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 같이 게재됩니다.


태그:#표현의 자유, #홍화당, #웹툰, #독립운동가, #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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