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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의 아버지, 박정기를 만나다
▲ 책 <유월의 아버지>(송기억, 후마니타스, 2015) 출간 소개 유월의 아버지, 박정기를 만나다
ⓒ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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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 중 '산자여 따르라'라는 가사 구절을 마음에 가슴 아프게 담고, 남은 삶을 결연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바로 사회운동을 하다 죽은 자식을 둔 부모들이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이 그러했고, 책 <유월의 아버지>(송기억, 후마니타스)에서 다루는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가 그랬다. 이소선은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새카맣게 불에 타 죽어간 아들이 왜 죽음을 감수하면서 자신의 뜻을 세상에 외쳤는지 어떻게든 이해하기 위해 남은 삶을 살아갔다. 박정기는 지독한 고문에도 동지를 위해 끝끝내 입을 다물며 죽어간 아들이 꿈꿨던 세상을 만들어보려고 남은 삶을 보냈다.

지난 2018년 개봉한 영화 <1987>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6월 민주항쟁엔 박종철과 이한열이라는 두 대학생의 죽음이 자리 잡고 있다. 박정기는 막내아들의 죽음을 계기로 그야말로 다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부산에서 공무원 신분으로 평생을 살아가며 몸가짐을 조심했던 그는 18살 때 어머니와 여동생을 동시에 잃었기 때문에 가족에 대한 애착이 더욱 컸다고 한다. 서울대에 입학한 후 열심히 운동을 하던 아들을 만류하던 부부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아들의 죽음이었다. 양심 있는 의사들의 용기 있는 증언으로 고문사임이 밝혀졌지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부검을 해치워버리고 사고사로 넘어갈 수도 있던 사건이었다.
 
그는 부검을 마친 아들의 몸을 염했다. 갓 태어난 아기를 씻길 때처럼 정성을 다한 몸짓이었다. 그것은 아비로서 아들을 보내기 위한 마지막 의식이었다. (59)

갓 태어난 아기의 모습이었던 아들과 주검이 되어버린 아들의 몸을 둘다 기억하게 된 부모의 심정이란 어떤 것일까.

자식이 세상에 태어난 삶의 시작, 그리고 끝인 죽음의 순간을 다 보아야 했기에 두 장면을 모두 가슴에 안고 남은 평생을 살아야 하는 부모의 마음이란,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대개 장례식에 가면 어르신들의 영정 사진이 놓여있고 그보단 젊은 자식들이 상주 역할을 한다. 그 반대의 상황을 딱 한 번 접한 적이 있다. 세월호 참사 때였다. 이제 막 20대 후반, 한창 곱고 예쁠 나이인 자식의 영정 사진 앞에 서 있는 부모의 표정을 보자마자 나는 눈물이 났다. 사람의 생기라고 할 만한 것이 그들에게서 이미 다 빠져나가 버린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박정기는 버스 안에서 종철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 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극한의 고통이 동반된 고문을 견디며 아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것이 무엇이기에 아들은 목숨과 맞바꾼걸까? (61)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살아남은 자로서 아들의 '그것'을 따르고 이어나가기 위해 박정기는 남은 삶을 바친다. 훗날 그의 큰 아들은 박종철이 3년 간 학생운동을 했다면, 박정기는 30년 간 운동을 했다고 술회한다.

유가협(민주화운동유가족 협의회)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과는 평생 동지가 되어 함께 비슷한 아픔을 겪은 사람들을 위해 서울과 부산을 부지런히 오갔다.

누군가 공권력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맨 먼저 병원을 찾아가 시신 탈취가 일어나지 않도록 주검을 지켰다. 이후에는 의문사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군대에서 죽어간 젊은 장병들의 문제에 함께 나서기도 했다. 당시 학생운동 전력이 있는 상태에서 징집된 청년들은 모진 구타로 죽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 외롭지 않다.
한 인생살이가 이런 것이지, 어디 특별한 것 있겠느냐고 생각한다.
철아, 어머니 아버지는 너를 길렀고 너는 어머니, 아버지의 남은 인생살이를 개조한 큰 일을 했다.
막내야,
다음에도 나는, 이 아버지는 민주화 운동을 할 거야.
역사에 없어도 나는 네가 하다 간 그것 할 거야!
-박정기의 일기장(1994년 4월 26일)

슬픔을 참아가며 30년간 꾹꾹 써내려갔을 그의 일기장 속 한 구절이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와 결핍은 어떻게 해도 채울 수 없다. 그럼에도 산 자로서 죽은 자를 더 뜨겁게 사랑하고 기억하는 방식으로, 그의 삶을 이해하고 따르려 애 쓴, 한 아버지의 삶을 따라가다보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떠난 이들의 뜻을 좇는 사람들

5월 1일은 노동절이다. 고 김용균 노동자의 어머니 김미숙씨 또한 박정기와 같은 삶을 따르는 듯하다. 김씨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너는 갔지만 엄마는 네가 원했던 그 뜻을 찾아 살 거야"라고 말했다.

김용균씨가 생전에 들었던 피켓에는 '노동 악법 없애고! 불법파견책임자 혼내고! 정규직 전환은 직접고용으로!'라고 적혀있다. 아마도 그의 어머니는 이를 아들의 생전 간절한 소원이자 남은 유언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 아닐까.

그녀는 노동자들과 활발하게 연대하며 비정규직의 처우개선,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애쓰고 있다. 지난 29일 고려대학교에서는 '청년 노동자의 죽음이 한국사회에 던지는 화두'라는 주제로 강연도 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아픔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삭이는 데 그치지 않고, 비슷한 아픔을 가진 다른 이들을 위해, 그리고 더이상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서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산 자여 따르라'는 말을 가장 아프게, 그리나 뜨겁게 따르는 일일지도 모른다.

1984년 11월 30일, 동료의 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단식 밤샘 농성을 하던 박종만은 택시 회사 사무실 난로에서 석유를 빼내 몸에 끼얹는다. 분신 직전 박종만은 배차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내 한 목숨 희생되더라도 기사들이 더는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해야겠다.'

박종철은 이 글을 읽고, 그간 부모님의 학업에 대한 기대와 자신의 투쟁 사이에서 겪었던 갈등과 방황을 접었다고 한다. 그가 남긴 글은 이렇다.
 
'그동안 나는 내 고민에만 빠져 있었는데 부끄럽구나. 내 갈등과 고민이란 살아 있는 자의, 살아서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가지려는 자의 부끄러운 하소연에 불과했구나." (82)

​박종만의 삶을, 박종철의 삶을, 박정기의 삶을 누군가는 따를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응시는 삶에 대한 응시가 되고, 남은 자에게 살아갈 또다른 방향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한동안 고민과 방황이 길었다. 이 또한 살아있는 자로서 그저 나 자신만을 위해 무언가를 가지려는 욕심과 투정은 아니었는지, 책을 읽으며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나 또한 산 자로서 앞서서 나간 그들을 따를 수 있기를.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태그:#임을위한행진곡, #산자여따르라, #유월의아버지, #박정기, #김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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