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30 14:44최종 업데이트 19.04.30 14:44
남산 둘레길 7.6㎞를 돌다가 시비 두 개를 보았다. 남산의 북쪽 와룡묘 근처의 기운 좋은 곳에 조지훈(1920~1968)의 시비가 있고, 서쪽 남산도서관과 남산타워로 올라가는 갈림길 아늑한 곳에 김소월(1902~1934)의 시비가 있다.

두 시인의 명성이 높기도 해서겠지만, 두 시비가 남산에 있는 이유를 그 시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소월의 시비 주변에 꽃이 피어 있고, 시비에는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라는 구절이 담긴 <산유화>가 새겨져 있었다. 조지훈의 시비에는 "들어도 싫지 않은/ 물 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라는 구절이 담긴 <파초우>가 새겨져 있었다.
 

서울 남산에 있는 조지훈의 시비 ⓒ 막걸리학교

 
두 시인은 한자에서 한글 문화로 전환되는 시기에, 남녀노소 모두가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자연을 소재로 한 순박한 시를 남겼다. 지금 다시 읽으면, 난해한 현대 시 들에 견주어 평이하고 잔잔해 보인다. 하지만 한국인이라면 그 시인들의 시로 감성을 키우고 언어의 리듬을 배웠기에, 결코 잊힐 수 없는 존재들이다.

두 시인 다 길지 않은 생을 살다 갔다. 소월은 33세 되던 1934년 12월 23일에 부인과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셨는데, 이튿날 깨어나지 못했다. 전날 장에서 사온 아편을 술과 함께 먹어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지훈은 49세에 작고했는데, 그가 술을 멀리했다면 더 긴 생을 살았을 것이다.


조지훈에 얽힌 술 이야기는 많다. 그는 주도 유단론을 펼쳤는데, "많이 안다고 해서 다 교양이 높은 것이 아니듯이 많이 떠드는 것만으로 주격(酒格)이 높아지지 않는다. 주도(酒道)에도 엄연히 단이 있다"라며 술의 품격을 9급부터 9단까지 나누었다.

조지훈은 스스로 "내 비록 학주(學酒)의 소졸이지만 아마추어 주원(酒院)의 사범쯤은 능히 감당할 수 있건만 20년 정진에 겨우 초급으로 이미 몸은 관주(觀酒)의 경에 있으니 돌돌(咄咄), 인생사 한도 많음이여!"라고 했다.

학주는 술의 진경을 배우는 단계로 1급이요, 관주는 술을 즐거워 하되 마실 수 없는 경지로 8단이다. 아마추어 술학교의 사범인 내가, 이제 그를 9단으로 승격시켜도 그는 마다지 않을 듯하다. 그가 설정한 9단은 술로 세상을 떠난 폐주(廢酒)의 경지다.

그런데 조지훈의 술 이야기 중에서 가장 귀한 사연은 박목월 시인과 주고받은 시 속에 담겨있다. 조지훈은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1946년 6월에 시집 <청록집>(靑鹿集)을 펴내면서 청록파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들은 1939년 <문장>지를 통해 등단하면서 인연을 맺었는데, 조지훈과 박목월이 처음 만난 것은 1942년 3월 중순이었다. 서울 살던 지훈이 전보를 치고 목월이 있는 경주로 내려갔다.

"그에게서 전보가 왔다. 경주에 도착하는 차 시간을 알린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인사조차 한 일이 없었다. <문장> 지에 나 있는 동전만한 사진으로서는 서로 얼굴을 알 것 같지 않았다. 궁여책으로 나는 박목월이라고 써 붙인 깃대를 들고 마중 나갔다. …그날 밤에는 월성여관에서 이야기로 밤을 새웠다. 무진장하였다. 지훈은 문단 소식에 정통하고, 나는 비로소 문단 사회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되었다.

다음날은 불국사로 갔다. …그가 다녀간 그해 시월에 조선어학회사건이라는 것이 터졌다. 일제는 독립운동 죄로 몰아 최현배, 김윤경, 이희승 등등 30여명의 회원들을 검거하였다. 지훈은 그가 돕고 있던 한글학회가 해체되자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되고, 아예 서울을 벗어나 낙향하게 되었다. 월정사로 가는 길에 내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 속에는 조지훈의 <낙화>라는 시가 들어 있었다. 박목월은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낙화>의 1절이다. 나는 그가 보내준 이 작품을 낭독하면서, 그가 경주에서 내게 보여준 <완화삼>에 대한 화답시를 보냈다. 그것이 <나그네>"라고 밝히고 있다. 1942년 3월에 이미 조지훈은 <완화삼>이라는 시를 지어 목월에게 보여주었는데, 단순하게 보여준 것에 그치지 않고 그에게 헌정했다.
 
완화삼(玩花衫)
- 木月에게

차운 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七百里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이 시를 난해하게 하는 것은 제목 '완화삼'이다. 나는 한동안 완화삼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스쳐 읽으면서 옷감인가 혹은 적삼 이름인가 싶기만 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아도 완화삼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았다. 이제 다시 보니 완화삼은 한자식 조어로 '꽃 적삼을 완상하다' 정도가 되는데, 이 시의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에서 생성된 조어임을 알 수 있다.

1942년에 목월은 "나는 지방의 조그만 금융기관에 은신하여 낮에는 공출미의 대금 지불을 위하여 주판알을 퉁기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시에 대한 정열과 집념은 끈질기게 나의 내면에 타오르고 있었"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술을 소재로 한 절창이자 낭만시의 최고의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나그네>가 잉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지훈이 1942년 찾아갔던 경주 안강의 독락당의 계정. ⓒ 막걸리학교

 
조지훈은 그때의 정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불국사 나무 그늘에서 나눈 찬 술에 취하여 떨리는 봄 옷을 외투로 덮어 주던 목월의 체온도 새로이 생각난다. 그리하여 나는 보름 동안을 경주에서 머물렀고, 옥산서원의 독락당에 눕기도 하였으며, <완화삼>이란 졸시를 목월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목월의 시 <나그네>는 이 <완화삼>에 화답하여 보내준 시이다. 붓을 꺾고 떠돌며 살던 5년간을 우리는 이렇게 편지로 서로의 마음을 하소연하며 해방을 맞았던 것이다."
 
나그네
―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 芝薰


江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 三百里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나그네>는 56자로 이뤄진 짧은 시다. 7·5조를 기본으로 삼고 있다. 첫 연은 '가앙나루 건너서, 미일밭 길을'이라고 좀 천천히 늘여 읽어야 제 맛이다. 2연과 5연은 반복되고 있는데, 나그네라는 명사가 마치 '하네, 가네'처럼 문장을 깔끔하게 마무리 짓는 동사처럼 읽힌다. 5·5조의 3연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는 허리띠처럼 시를 야무지게 동여매고 있다. 이 3연이 1·2연과 4·5연을 대칭 구도로 만들고 있다. 시는 짧지만 여운은 아주 길다.

목월은 <나그네>를 발표한 지 30년이 지나 그 초고를 공개했다. 그는 이 초고를 백 번 가까이 갈고 다듬은 끝에 <나그네>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나그네> 초고

나루를 건너서
외줄기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달빛 어린
남도 팔백리

구비마다 여울이
우는 가람을
바람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미발표 초고 <나그네>에는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는 완성되어 있지만, 뜻밖에도 '밀밭'이나 '술 익는 마을'이 등장하진 않는다. 나는 <나그네> 시를 읊조릴 때마다, 목월이 걸었던 강나루 건너 밀밭 길은 어디이며, 하룻밤 묵었을 법한 술 익는 마을이 어디였을까, 무척 궁금했다. 그런데 목월은 그 공간이 구체적으로 어디라는 얘기를 남기지 않았다.
 

남도의 밑밭길을 걸어가는 나그네, 경남 하동의 악양들에서. ⓒ 막걸리학교

 
그렇다면 <나그네>의 '술 익는 마을'은 부제에서 밝히고 있듯이 조지훈의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라는 시적 공간에서 건너온 것이다. 두 시인이 술잔을 주고받듯이 시를 주고받으면서 '술 익는 마을'이 구축된 것이다.

그럼 조지훈의 술 익는 마을은 어디서 왔을까? 조지훈의 고향은 경북 영양이고, 그는 자라면서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그는 어려서 한시도 지었는데, 술 익는 마을은 그가 지은 한시 '苔封路石寒山雨/ 酒熟江村暖夕暉(산속 이끼 낀 돌길에 찬비 내리고, 술 익는 강마을엔 저녁놀이 따뜻하네)'이라는 구절에서 전이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酒熟江村暖夕暉(주숙강촌난석휘)'와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과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은 서로 닮아있지만, 확연하게 다르다. '찬비'에 대구(對句)를 이루는 '따뜻한 노을'이, <나그네>에 이르러 강렬하게 '타는 노을'이 되었다. 특정 장소였던 '술 익는 강마을'은 무수히 많은 '술 익는 마을마다'로 확장되었다.

시 구절은 한글의 운율을 살려 부드러워졌고, 시적 공간은 선명하게 시각화되었다. 술잔을 나누듯이 시를 주고받았지만, 같은 술을 다르게 맛보듯이 표현이 달라졌다. 조선의 선비들이 차운하며 시를 주고받던 관행을 따라, 젊은 그들도 마음을 건네 불후의 명작을 얻어낸 것이다.

박목월의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1942년 말 조지훈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서울을 떠나 오대산 월정사로 거처를 옮겼다. 조지훈은 혜화전문학교(동국대의 전신)를 졸업하고 1941년에 월정사 불교 강원의 외전(外典) 강사로 10개월쯤 지낸 인연이 있어서였다. 조지훈은 해방될 때까지 월정사와 고향 경북 영양을 오가면서 숨어 지냈다.

술을 좋아한 조지훈은 월정사에 강사로 지낼 때 직접 술을 빚기까지 했다. 그는 직접 술 이름을 지었는데 "중니(仲尼, 공자) 선생이 애써 가꾸신 쌀과 노담옹(老聃翁, 노자)이 손수 만든 누룩과 실달다상인(悉達多上人, 석가)이 길어 오신 샘물로 빚은 술인 연고"로 삼도주(三道酒)라고 했다.

그는 달빛 아래에서 직접 술을 거르면서 "손수 따온 머루와 솔잎과 당귀로 빚은 술"인데, 그 맛은 "칼칼한 막걸리지만 청신한 맛이 천하일품"이라서 "머루 맛에서 노자가 웃는다. 솔잎 맛에서 불타가 웃는다. 당귀 맛에서 공자가 웃는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그는 월정사에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쓰러지기도 했고, 그 소식을 듣고 내려온 아버지에 이끌려 서울로 돌아가기도 했다.

술학교 사범인 나는 더러 조지훈 시인의 주도 유단론을 꺼내면서 삼도주를 말한다. 그런데 서너해 전에 오십대 후반에 접어든 중학교 동창 넷이서 막걸리학교를 찾아와 초급과 중급 강좌를 열심히 듣더니, 삼도주를 빚겠다고 오대산에 솔잎을 따러가는 일이 벌어졌다. 의리 좋은 친구 넷이서 모이느니 술이라, 기왕 마시느니 제대로 마셔보자며 삼도주 빚기에 열의를 보인 것이다.
 

중학교 동창 넷이서 의기투합하여 조지훈의 삼도주를 복원했다. ⓒ 막걸리학교

 
나는 주문 제작할 수 있는 양조장을 소개해주며 부추겼더니, 중학 동창 4인방이 서예가로부터 글자도 받고 급기야는 삼도주라는 술까지 만들어냈다. 지금까지 추석이나 설 명절에 네 차례에 걸쳐 2천병쯤 만들었는데, 처음 만든 술은 제주로 올려달라고 조지훈 선생의 집안에 보내는 예까지 갖췄다고 한다. 의리 좋은 그들이 조지훈 시인에 화답하는 술을 지어, 시인에게 헌정한 것이다.

나 또한 술 때문에 <완화삼>과 <나그네>를 다시 읽지만, 아마도 이태백도 술 시를 쓰지 않았다면 지금 세상까지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 술 이야기를 핑계로 술을 찾아대니, 술이 마를 때까지 시인의 이름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건네는 말이니, 시인이여! 술을 마시고 시를 지어라, 그러면 그대 이름이 술과 함께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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