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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원만한 인간관계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도움을 받고 싶어 한다. 마찬가지로 '어떻게 하면 연애를 할 수 있을까', '연인 간의 갈등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등의 연애 고민들이 생겨나고, 해법을 고민한다. 예전에는 어떻게 하면 연애를 '잘' 할 수 있을까, 즉 상대방을 속된 말로 '꼬시기' 위해서는 어떤 전략이 필요한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시중에는 '전략으로서의 연애'를 가르쳐 준다는 명목 하에 연애 코치, 상담 콘텐츠들이 많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해보니까 마치 게임 가이드북을 읽는 것 같은 천편일률적인 조언은 연애가 또 다른 형태의 인간관계임을 잊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우리는 서로에게 더 나은 방법을 찾지 않고 게임 캐릭터를 조종하는 듯 한 전략에 매달리는 걸까? 혹시 그게 더 쉬워서 그런 것은 아닐까?

상호 간의 존중, 말로는 쉽지만 
 
<연애도 계약이다> 책 표지.
 <연애도 계약이다> 책 표지.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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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다루는 변호사라면, 사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올해 3월 출간된 <연애도 계약이다>를 쓴 박수빈 변호사는 더 나은 연애를 하기 위한 노력을 '계약'에 빗대 표현한다. 교섭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왜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 내가 생각하는 당연한 연애에 대해 상대방과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나 비혼주의자야" "결혼해서 가정을 꾸릴 생각이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다못해 "나는 혼후관계주의자야" 라든지,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만나는 친밀한 연애를 하고 싶어"라는 말이라도 제대로 주고받으며 앞으로 사랑을 유지하는 방식에 대해 각자가 원하는 바를 미리 교섭하면 좋지 않았을까. 사회가 정해둔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연애 당사자들이 원하는 방식을 정하기 위한 교섭 말이다.

계약을 체결하기에 앞서 서로가 서로에게 계약 목적에 맞는 상대방인지를 확인하고, 서로가 계약의 내용대로 약속을 하고 이것을 지킬 의지가 있는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완료될 때까지 계약이 유지될 수 있는가 같은 부분을 점검하기. 계약을 연애라고 바꾸면 아주 잘 들어맞는다. 

연애를 시작하는 과정.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장에서 법을 다루는 변호사다 보니 생생한 사례도 덤이다. 예를 들어 돈을 빌릴 때 갚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상대방에게 특정 시기까지 꼭 갚겠다고 말하면서 돈을 빌리면 실제로 사기죄에 해당한다. 이 얘기가 나오는 이유는 자명하다. "실제로 본인이 원하는 연애관계와 상대방이 원하는 연애관계를 제대로 내어놓고 교섭하는 일은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서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논의하고 협의해 가는 것. 어느 관계에서나 중요한 일이지만 저자도 언급하듯 '연애하는 사이라면 이런 것은 해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넘어가는 부분이 연애라는 교섭 단계에 있으면 곤란하다. 이것은 사소한 취향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단순하게, 흡연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사전에 알아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일이 중요한 이유를 저자는 "연애는 '해지'할 수는 있어도 '해제'할 수는 없는 특별한 계약"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연애 관계를 끝내는 일(해지)은 가능해도 연애를 처음부터 하지 않은 상태로 만드는 일(해제)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변호사인 저자가 연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법적인 용어를 재치 있게 사용하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다. 

'썸'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연애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서로 특별한 감정은 있는 상태. 과연 여기서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일까. 실제로 계약을 체결한 상황이 아니므로 책임과 의무는 발생하지 않지만 도의적인 문제가 생긴다.
 
일정 시간 동안 서로 연인인 것처럼 시간을 보내고 감정을 나누고 관계를 형성해 왔다면, '사귀자'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연인이 되었을 때 감당해야 할 상대방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 그건 연애관계에서도 자유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다.

'썸'이라고 해도 저마다 상호간에 보낸 시간과 감정의 깊이에 따라서 지켜야 할 예절이나 책임 같은 것이 분명히 있다. 사귀지 않더라도 관계에 책임을 져야 하는 일들이 생긴다.

관계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이후에 생겨나는 문제들
 
연애가 계약이 될 수 있는 것은 연애가 특별하면서도 상호존중에 기반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연애가 계약이 될 수 있는 것은 연애가 특별하면서도 상호존중에 기반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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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섭이 끝나고 계약을 체결하는 순간 고려해야 할 것들이 늘어난다. 앞서 내가 '게임 가이드북 같은 연애 조언'이 불편하다고 느꼈던 것처럼, 저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쌍무계약으로서의 연애'는 상호 존중을 전제로 하고 있다.  
 
연애관계에서의 '기준'은 서로가 합의한 것이어야 하지, '일반적인 기준'으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연인에 대한 배려의 내용도 '일반적으로 연인이 좋아한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나는 특별한 한 사람이 원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관계에 있어서 서로가 서로를 개인으로 인정하고, 두 사람의 관계가 '한 사람'과 그의 종속물이 아니라 계약에 따른 동등한 관계임을 인식하는 것이 관계의 상호 존중을 낳는 출발점이다. 

특히 '게임 가이드북' 같은 조언들은 하나 같이 늘 '남성 혹은 여성에게 보편적으로 좋다고 인식되는 것'에 대해 재빨리 파악하는 것을 '눈치'라고 포장하는 게 불편했었다. 하지만 책에서 드는 예시를 보자. "머리 길이는 끝만 조금 잘라주시고 염색 해주세요"라고 주문했는데 미용사가 무심결에 단발로 잘라 버렸다면 우리는 항의를 할 것이고 미용사는 사과를 하는게 맞다.

반면에 "저한테 어울리는 길이로 적당히 잘라주세요"라고만 요청했더니 미용사가 속으로만 '이 손님은 단발이 어울리겠는 걸?'이라고 생각하고 단발로 잘라 버렸다면? 소통상의 문제가 있었고 맘에 들지 않아 화가 날 수는 있어도 미용사에게 잘못을 따지기 힘들다. 연애 역시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달하기 위한 '노력' 역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고서는, 취할 수 있는 행동 중 최악은 '잠수'가 아닐까. "카카오톡 메신저의 '1'이 '중요한 문제'가 되자 우리는 불행해졌다"고 지인이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소통의 속도가 빨라진 세상에서 얼만큼 빨리 답변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런데 사귀는 사이에서 메신저의 '1'이 사라지지 않거나 사라지고 나서도 아무런 답이 없다면 그것만큼 애가 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상대방이 의무를 이행하기는커녕 연락을 받지 않고, 의무를 이행해야 할 때 그저 모르쇠 혹은 가만히 있음으로 일관한 채 시간이 마냥 흐른다면? '잠수 타기'는 계약의 이행을 멈추는 일과 같다. (중략) 연애에도 정확하게 '해지'의 의사표시가 있어야 한다. 나는 도망감으로써 상대방에게 충분히 신호를 주었다고 생각하고 상대방이 알아서 헤어져주기를 기대했는데 상대방은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듯 시시콜콜하지만 당사자들에겐 중요한 문제들을 법적인 논리와 연결시켜 바라보게 되면 무엇이 좋을까. 저자는 법학전문대학원에서 계약법을 공부하면서 연애가 계약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이야기한다. 처음 연애에 비유해 계약법의 각종 법리를 풀어내 보려다가, 오히려 계약법의 법리를 통해 연애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내 것'과 '네 것'이 되는 연애관계와 계약에 빗대어지는 연애관계가 근본적으로 다름을, 이 책은 꾸준히 이야기한다. '내 것'과 '네 것'의 관계가 아닌, '너와 나' 사이의 계약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이다. 마침 내가 하는 고민에 걸맞은 책이 나온 것 같아서 새삼 반갑다. 어렵고 복잡하게 법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주요한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참신하고 새롭다. 

연애도 계약이다 - 안전하고 자유로운 사랑을 위하여

박수빈 지음, 창비(2019)


태그:##연애도계약이다, ##창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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