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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이용자와 도서관 사서가 함께 쓴 도서관 역사 여행기입니다. 대한제국부터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역사 속 도서관,  도서관 속 역사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편집자말]
오늘날 서울은 한강을 기준으로 강북과 강남으로 나뉜다. 조선시대 한양은 어땠을까? 한양은 북촌과 남촌으로 나뉘었는데, 그 경계는 청계천이었다. 청계천을 기준으로 북쪽 동네는 북촌, 남쪽은 남촌이라 했다. 경복궁과 창덕궁에서 가까운 북촌에는 집권층인 노론이 살았고, 남산 인근 남촌에는 권력에서 소외된 소론, 남인, 북인이 살았다.

북촌, 남촌 외에 윗대와 아랫대라는 구분도 있었는데, 청계천 상류인 인왕산 아래 지역을 윗대(또는 웃대, 上垈)라 하고, 청계천 하류인 동대문, 왕십리 근처를 아랫대(下垈)라 했다. 윗대에는 경복궁에서 일하는 아전들이, 아랫대에는 하급군인들이 살았다.

조선 건국 무렵 경복궁 바로 옆 서촌엔 왕족이 자리를 잡고 살았다. 왕이 되기 전 이방원의 사저(私邸)가 서촌에 있었다. 서촌 주민들이 서촌을 '세종마을'이라 부르는 이유는 세종이 이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태종과 세종의 잠저(潛邸)가 있었고 세도가문의 세거지였던 서촌은 문인과 예술인의 요람이었다. 안평대군, 추사 김정희, 겸재 정선이 머물렀고, 중인의 시문학 활동인 위항문학이 송석원을 중심으로 꽃 피기도 했다. 근대에 들어서는 이상, 윤동주, 현진건, 노천명, 김광규 같은 문인과 구본웅, 이상범, 이여성, 이쾌대, 이중섭 같은 화가가 이 일대에 자취를 남겼다. 

서촌 일대의 문인들
 
이상의 집 통인동 '이상의 집'은 이상이 실제 살았던 집은 아니다. 이상이 살던 집터에 새로 지은 집이다. 이상이 죽은 후 그의 아내였던 변동림은 유부남이던 화가와 사랑에 빠진다. 가족의 반대에도 그녀는 김향안으로 이름을 바꾸고 1944년 재혼한다. 그녀가 이름을 바꾸면서까지 사랑한 화가는 김환기다. 1974년 화가가 죽은 후 그녀는 서촌에서 멀지 않은 부암동에 자비로 환기미술관을 열었다.
▲ 이상의 집 통인동 "이상의 집"은 이상이 실제 살았던 집은 아니다. 이상이 살던 집터에 새로 지은 집이다. 이상이 죽은 후 그의 아내였던 변동림은 유부남이던 화가와 사랑에 빠진다. 가족의 반대에도 그녀는 김향안으로 이름을 바꾸고 1944년 재혼한다. 그녀가 이름을 바꾸면서까지 사랑한 화가는 김환기다. 1974년 화가가 죽은 후 그녀는 서촌에서 멀지 않은 부암동에 자비로 환기미술관을 열었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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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경. 시인이자 소설가, 화가이자 건축가인 이상의 본명이다. 1910년 사직동에서 태어난 이상은 세 살 때 큰아버지에게 입양돼 통인동에서 자랐다. 이상은 신명학교와 동광학교, 경성고등공업학교(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전신)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사로 일했다. 그는 스물여섯 인생 대부분을 서촌에서 살았다. 통인동 154-10번지, 이상이 살던 집은 이제 '집터'만 남았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상은 요양을 위해 배천온천에 갔다가 기생 금홍을 만나 종로 1가에 '제비다방'을 열기도 했다. 금홍과 헤어진 후 순옥이라는 여인을 만났으나 다시 헤어졌다. 1936년 6월 이상은 절친이자 화가 구본웅의 이모 변동림과 결혼, 다동 33-1번지에 신혼집을 마련했다. 이상은 1936년 10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1937년 4월 17일 그는 서촌이 아닌 도쿄에서 26년 7개월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사인은 폐결핵이었다. 

통의동 '보안여관'은 문인들이 자주 투숙하며 이용하던 곳이다. 1936년 스물두 살 서정주도 이곳에 머물렀다. 서정주는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과 문학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하며 '생명파' 활동을 이어갔다. 서촌은 생명파의 요람이기도 했다. 

서촌과 인접한 부암동에는 'B사감과 러브레터', '빈처', '술 권하는 사회'의 작가 현진건 집터가 있다. 현진건이 살던 부암동 325-5번지는 안평대군 이용의 집터와 가깝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진건은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동아일보> 기자를 지냈다. <동아일보> 사회부장 시절 현진건은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1937년 <동아일보>를 그만둔 후 작품 활동에 매진하다가 장결핵에 걸려 1943년 4월 마흔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동주의 누상동 하숙집 시절 
 
윤동주 하숙집 터 누상동 9번지 윤동주가 하숙했던 한옥은 안타깝게도 1995년 철거됐다. 지금 있는 다세대 주택은 한옥을 허물고 새로 지은 집이다. 정병욱은 누상동 하숙집 시절에 대해 "아침식사 전에는 누상동 뒷산인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을 할 수 있었다. 세수는 산골짜기 아무데서나 할 수 있었다"라는 기록을 남긴 바 있다. 윤동주 하숙집터를 가보면 인왕산 수성동 계곡 바로 아래 자리하고 있다.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풍광 좋은 수성동 계곡을 두고 1.9km나 떨어진 창의문 근처, 지금의 '윤동주 시인의 언덕'까지 산책을 갔을까. 윤동주 시인의 언덕은 아침식사 전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종로구가 조성한 시인의 언덕은 윤동주의 발길이 단 한번도 닿지 않은 언덕일 수 있다.
▲ 윤동주 하숙집 터 누상동 9번지 윤동주가 하숙했던 한옥은 안타깝게도 1995년 철거됐다. 지금 있는 다세대 주택은 한옥을 허물고 새로 지은 집이다. 정병욱은 누상동 하숙집 시절에 대해 "아침식사 전에는 누상동 뒷산인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을 할 수 있었다. 세수는 산골짜기 아무데서나 할 수 있었다"라는 기록을 남긴 바 있다. 윤동주 하숙집터를 가보면 인왕산 수성동 계곡 바로 아래 자리하고 있다.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풍광 좋은 수성동 계곡을 두고 1.9km나 떨어진 창의문 근처, 지금의 "윤동주 시인의 언덕"까지 산책을 갔을까. 윤동주 시인의 언덕은 아침식사 전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종로구가 조성한 시인의 언덕은 윤동주의 발길이 단 한번도 닿지 않은 언덕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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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윤동주는 서촌에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윤동주가 하숙했던 곳이 바로 서촌 누상동이다. 윤동주는 연희전문 졸업반이던 1941년 5월 말부터 9월 초까지 후배 정병욱과 함께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을 했다. 3층짜리 다세대 주택으로 바뀐 누상동 9번지가 윤동주가 하숙했던 곳이다. 윤동주가 서촌에서 하숙한 기간은 4개월이 채 되지 않는데, 여름방학 때 한 달 동안 고향인 북간도 용정(龍井)에 다녀왔다고 하니, 2개월 남짓 이곳에 살았던 셈이다. 

서촌에서 4개월 머문 윤동주는 1941년 9월 북아현동으로 하숙을 옮긴다. 누상동 하숙집 주인 김송이 일제 고등경찰의 요시찰 인물이다 보니 하숙생 윤동주도 주목의 대상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 해 연말까지 윤동주는 북아현동에 머무는데 '서시'와 '별 헤는 밤', '또다른 고향', '간(肝)'을 비롯한 그의 대표 시가 이때 쓰인다. 

윤동주 시집에 실린 시 중 '십자가', '바람이 불어', '눈 감고 간다' 같은 몇 편만이 누상동 시절에 쓰였다. 누상동에서 2개월 밖에 살지 않은 그를 기리는 문학관이 서촌 근처에 문을 연 건 살짝 낯 간지러운 게 아닐까. 윤동주문학관 뒤편에 만든 '시인의 언덕'도 윤동주가 살던 하숙집과 꽤 멀어서 그가 후배 정병욱과 함께 오르내렸다는 인왕산 중턱일 리가 없다. 

윤동주는 1938년 4월 9일 연희전문 문과 입학과 함께 경성에 와서 1학년 때는 송몽규, 강처중과 기숙사 생활을 하고 2학년 때인 1939년엔 북아현동과 서소문 일대에서 하숙 생활을 했다. 3학년 때인 1940년 다시 연희전문 기숙사에 들어갔다가 졸업반인 1941년엔 신촌 하숙과 기숙사, 누상동, 북아현동에서 하숙을 하며 학교에 다녔다. 기간만 놓고 보면 윤동주는 연희전문 시절 대부분을 학교 기숙사 포함해 북아현동과 신촌, 즉 지금의 서대문구 일대에서 지냈다. 

어쨌거나 종로구는 발 빠르게 청운공원 끝자락에 윤동주문학관을 건립했다. 재미있는 건 정작 윤동주 대표작의 또 다른 산실인 서대문구 북아현동 일대에서는 시인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찾기 어렵다는 것. 윤동주의 모교 연희전문(지금의 연세대학교)에 세운 윤동주 시비와 윤동주 기념실이 관내에 있다고 안심한 걸까? 서대문구가 어물어물하는 사이 종로구는 윤동주문학관과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조성하고 2017년 9월에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윤동주문학제도 열었다. 

시인 동주의 사랑 이야기
 
윤동주가 연희전문 시절 머문 기숙사, 핀슨홀 1922년 지어진 핀슨홀은 2층으로 보이지만 다락방 공간이 있어서 3층이다. 윤동주가 연전 1학년 때 송몽규, 강처중과 함께 사용한 방은 3층 다락방 공간이다. 핀슨홀 앞에는 1968년 연세대학교 총학생회가 세운 ‘윤동주 시비’가 있다.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는 핀슨홀을 ‘윤동주기념관’으로 새롭게 조성하는 중이다.
▲ 윤동주가 연희전문 시절 머문 기숙사, 핀슨홀 1922년 지어진 핀슨홀은 2층으로 보이지만 다락방 공간이 있어서 3층이다. 윤동주가 연전 1학년 때 송몽규, 강처중과 함께 사용한 방은 3층 다락방 공간이다. 핀슨홀 앞에는 1968년 연세대학교 총학생회가 세운 ‘윤동주 시비’가 있다.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는 핀슨홀을 ‘윤동주기념관’으로 새롭게 조성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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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윤동주는 4학년 때인 북아현동 하숙 시절 이화여전 문과 졸업반 여학생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북아현동에서 하숙하는 동안 윤동주는 그 여학생과 "매일 같은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렸고 같은 차로 통학했으며 교회와 바이블 클래스에서 서로 건너다보는"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윤동주의 "그 여자에 대한 감정이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정병욱이 피부로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동주가 쓴 '사랑스런 추억'은 기차역에서 이 여학생을 기다리던 추억을 시로 남긴 건 아닐까.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강하늘 분)와 서로 좋아하는 사이로 나오는 옥천 출신 이여진(신윤주 분)은 이화여전 여학생을 염두에 두고 영화 속에 그려낸 인물이다. 

윤동주의 사랑은 실제로 이어졌을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실린 친구 강처중의 '발문'을 보면 윤동주가 사랑한 여성은 그의 연모를 몰랐고 그가 여성에게 고백조차 하지 않았다 하니, 동주의 사랑은 가슴 아픈 짝사랑으로 끝이 났다.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고 쓴 그의 시처럼 말이다. 

반듯한 미남이어서인지 윤동주는 북간도 명동학교 시절에도 여학생에게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얼굴이 잘 생겨서 거리에 나가면 여학생들이 유심히 그의 얼굴을 보기도 하고 여자로부터 말을 건네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데, 수줍음 많은 윤동주는 "한 번도 여자를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동주를 만든 건 독서가 팔할
 
윤동주가 소장했던 장서 윤동주는 고향 집에 8백 권 정도 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윤동주 고향 집 한쪽 벽면을 모두 채웠다는 그의 장서를 보면 잡지와 책을 가리지 않고 광범위하게 독서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책을 구하기 쉽지 않았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윤동주가 얼마나 대단한 독서가이자 장서가였는지 확인할 수 있다. 윤동주문학관 제1전시실에 전시된 윤동주 소장 도서.
▲ 윤동주가 소장했던 장서 윤동주는 고향 집에 8백 권 정도 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윤동주 고향 집 한쪽 벽면을 모두 채웠다는 그의 장서를 보면 잡지와 책을 가리지 않고 광범위하게 독서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책을 구하기 쉽지 않았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윤동주가 얼마나 대단한 독서가이자 장서가였는지 확인할 수 있다. 윤동주문학관 제1전시실에 전시된 윤동주 소장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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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생전에 정식 출간되지 않았다. 윤동주는 원래 시집 제목을 '지금 세상이 온통 아픈 환자 투성이'라는 의미로 '병원'이라 붙이려 했다. 졸업을 기념해 77부 한정판으로 시집 출판을 희망했지만 일제의 검열과 출간 비용 부족 때문에 시집 출간을 포기한다. 윤동주는 정식 출간 대신 자신의 육필로 수기(手記) 시집을 3권 만들어 지도교수인 이양하, 후배 정병욱과 한 부씩 나눠 가졌다. 

1942년 1월 29일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위해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沼東柱)로 창씨개명하고 4월 2일 도쿄 릿쿄(立敎)대학에 입학한다. 릿쿄대는 도쿄대, 게이오대, 와세다대, 메이지대, 호세이대와 함께 '도쿄 6대학'으로 꼽히는 명문이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1941년 12월 7일, 미군의 도쿄 첫 폭격이 1942년 4월 18일이니까 윤동주는 긴박하고 어수선한 상황에서 도쿄 유학 생활을 시작했을 것이다. 당시 일본으로 건너가는 배를 타려면 도항증명서가 필요했는데 이 서류 발급을 위해서는 창씨개명이 필수적이었다. 

창씨개명 5일 전 윤동주가 쓴 시가 '참회록'이다.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기 전 윤동주는 자신의 책과 시 원고, 쓰던 책상을 친구 강처중에게 맡긴다. 강처중은 연희전문 1학년 때 윤동주, 송몽규와 함께 기숙사 핀슨홀 3층 한 방에서 지낸 친구다. 우리가 윤동주문학관에서 윤동주 소장도서를 만날 수 있는 건 친구 강처중이 소중히 간직했다가 윤동주 가족에게 전한 덕분이다.

이 대목에서 시인 윤동주의 독서에 대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는데, 절친이자 윤동주와 명동학교, 숭실중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문익환 목사의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대단한 독서가였다. 방학 때마다 사 가지고 돌아와서 벽장 속에 쌓아둔 그의 장서를 나는 못내 부러워했었다. 그의 장서 중에는 문학에 관한 책도 있었지만 많은 철학서적이 있었다고 기억된다. 한번 나는 그와 키에르케고르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의 키에르케고르에 관한 이해가 신학생인 나보다 훨씬 깊은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함께 하숙했던 정병욱도 그의 독서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다. 
 
"그만큼 그의 독서 범위가 넓었다. 문학·역사·철학, 이런 책들을 그는 그야말로 종이 뒤가 뚫어지도록 정독했다. 꼭 다문 입술이 팽팽히 조인 채 눈에서는 불덩이가 튀는 듯 했었다.

그러고는 눈을 꼭 감고 한참 동안을 새김질을 하고 다음 구절로 넘어가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메모를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읽는 책에 좀처럼 줄을 치는 일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만큼 그는 결벽성이 심했다고 하겠다." 

정병욱과 서촌에서 하숙하던 무렵 윤동주는 학교를 마치고 혼마치(本町: 지금의 충무로) 일대와 적선동 '책방 순례'도 자주 했던 모양이다. 정병욱은 '하교 후 충무로 지성당(至誠堂), 일한서방(日韓書房), 마루젠(丸善), 군서당(群書堂) 같은 신간 서점과 고서점, 적선동 유길서점(有吉書店) 을 자주 순방하다가 하숙집으로 가곤 했다'고 회고했다.

윤동주는 어떤 책을 소장했을까
 
연세대학교 교정에 서있는 언더우드 1세 동상 언더우드 1세(Horace Grant Underwood)의 한국 이름은 원두우(元杜尤)다. 1885년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들어온 언더우드는 새문안교회와 기독교서회를 창설하고,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했다. 경신학교 대학부를 ‘연희전문학교’로 발전시켰고, 1916년 사망했다. 그의 장남이 언더우드 2세인 원한경(Horace Horton Underwood)이고, 손자가 언더우드 3세(Horace Grant Underwood Jr.)인 원일한이다. 1927년 세운 언더우드 동상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때 파괴됐다가 1955년 다시 세웠다. 연희전문 시절 윤동주도 이 동상 앞에서 이양하 교수,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남긴 바 있다.
▲ 연세대학교 교정에 서있는 언더우드 1세 동상 언더우드 1세(Horace Grant Underwood)의 한국 이름은 원두우(元杜尤)다. 1885년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들어온 언더우드는 새문안교회와 기독교서회를 창설하고,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했다. 경신학교 대학부를 ‘연희전문학교’로 발전시켰고, 1916년 사망했다. 그의 장남이 언더우드 2세인 원한경(Horace Horton Underwood)이고, 손자가 언더우드 3세(Horace Grant Underwood Jr.)인 원일한이다. 1927년 세운 언더우드 동상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때 파괴됐다가 1955년 다시 세웠다. 연희전문 시절 윤동주도 이 동상 앞에서 이양하 교수,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남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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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동생 윤일주 교수는 북간도 고향집 벽 한쪽을 전부 메웠던 윤동주의 장서에 대해 흥미로운 기록을 남겼다. 
 
"그가 방학 때마다 이불 짐 속에 한 아름씩 넣어 오는 책은 8백 권 정도 모이었고, 그것은 우리 동생들에게 참으로 좋은 자양이 되었다. 그가 전문학교 시절 읽던 잡지로는 <문장>, <인문평론>이 있었고, 일본 잡지로는 <세르빵>, <시지>(詩誌), <사계>, <시와 시론>, 수필과 판화 전문지 <흑과 백> 등이었다. 그밖에 더 있었겠지만 생각나는 것은 그 정도이다.

벽 한쪽을 전부 메웠던 서가에서 생각나는 책을 차례로 들면 다음과 같다. 조선일보사 간행의 <현대조선문학전집>(전8권), 삼중당 발행의 <조선고전문학전집> 모두, <호암(湖岩) 전집>(전3권), <진단학보> 기간본 전부,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본>, 잡지로서 <문장>, <인문평론> 전부, 우리말 시집들과, 일본 책으로는 앙드레 지드 전집, 발레리 시 전집, 도스또옙스끼의 연구 서적, 릴케 시집, 프랑스의 시집들인데, 역시 그가 애독하는 것들이었다. 그밖에 일본 연구사의 영문학 관계의 책들, 영어 원서 등이었다. (중략)

그리고 그의 책 속에서는 흔히 마른 꽃잎이나 단풍잎이 끼여 있었다. 그가 즐기는 산책길이나 여행에서 가져온 것인데, 단풍잎에는 으레 장소와 날짜가 씌어 있었다. 그의 시 전작품에 작품 날짜가 거의 기입되어 있듯, 그의 장서에도 대부분 책을 산 날짜가 이름과 함께 기입되어 있다."

윤동주가 시인 백석의 <사슴>을 사본으로 입수한 사연도 눈에 띈다. 1936년 1백 부 한정으로 나온 <사슴>을 구할 길이 없어 안타까워하다가 1937년 8월 5일 광명중학교 도서실에서 하루 종일 베껴서 사본으로 소장했다는 것이다. 도서관에 얽힌 윤동주의 흔치 않은 일화다. 

추운 겨울 학생복을 수선하라고 부모가 준 돈으로 책을 사 볼 정도로 동주는 책을 좋아했다. 유학 생활 동안 동생들에게 책 선물을 자주 보내고 방학 기간 고향 집에 머물 때도 "손에는 책이 쥐어 있지 않은 때가 없었다"고 한다. 

스물일곱 젊은 나이에 요절한 그가 한국뿐 아니라 일본인도 사랑하는 명시를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윤동주의 탁월한 시는 그가 뛰어난 독서가이자 장서가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명시를 남긴 윤동주는 시를 어떻게 썼을까. 원고지에 쓰고 고치기를 반복하며 무수한 수정을 거치지 않았을까. 정병욱은 이런 증언을 남겼다. 
 
"동주는 시를 함부로 써서 원고지 위에서 고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즉 한 편의 시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몇 달 몇 주일 동안을 마음 속에서 소용돌이치다가 한 번 종이 위에 적혀지면 그것으로 완성되는 것이었다." 

강처중도 비슷한 회고를 남겼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 않는다. 이미 보여준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玉)이다."

동주는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지만 그가 시를 쓱쓱 쉽게 써댄 시인은 아니었다.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는 격주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윤동주와 그의 문학관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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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사람사이에 조용히 부는 따스한 봄바람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 동물, 책을 좋아하는 고양이 집사입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가 지금은 소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