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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시절 수화 동아리가 있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는 예쁜 노래를 수화로 했다. 늘 음악이 함께 했다. 그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친구들은 모두 청인이었다. 

그리고 1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 나는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농인을 만났다. 그냥 만났다. 인간으로 만났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귀 기울인다는 것이 얼마나 무례한 행동임을. 표정으로, 얼굴로, 손짓으로 이야기를 하다가, 그 사람의 언어를 잘 이해하지 못했을 때 나는 습관적으로 귀에 손을 대고 '뭐라고?'라고 말했다. 

귀를 기울인다는 건 그 사람의 말을 좀 더 정확하게 알고 싶을 때 하는 행동이다. 대화하는 사람의 말을 집중해서 잘 듣고 있다는, 잘 듣고 싶다는 행동이다. 예의바른 행위라고 인식했다. 하지만 농인과 대화할 때, 이 행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동임을 깨달았다. 오히려 너무나도 무례한 행동이다. 순간 깨달았고, 나는 부끄러웠다. 

입에서 먹을 것을 넣고 우물우물 하고 있을 때, 나는 입을 가리고 이야기했다. 그런건 예의바른 행동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으니까. 순간 깨달았고, 나는 부끄러웠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얼마나 당연하지 않은 일인지, 나는 그를 만나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예전에 언론사 사회부에서 일을 하면서 '장애인'에 대한 기사를 쓴 적이 있다. 나는 누구보다 '그들'의 일을 공감하고, 분노하고, 연대한다고 생각했었다. 문제의식을 가진 기자로서가 아니라, 취재 대상이 아니라 처음으로 농인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을 때, 이때까지의 내 화두가 얼마나 잘못 설정되어 있었는가를 알게 되었다. 

독일에 살면서 이 화두는 더욱 커졌다. 독일에서 강조하는 '모두를 위한 접근성(Zugang für alle)' 개념이 끈질기게 나를 붙잡았다. 장애인만의 이슈가 아니다. 그건 휠체어를 타는 사람이든, 유모차를 끄는 사람이든, 흰색 지팡이를 들고 있는 사람이든, 보행 보조기구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든, 아직 다리 길이가 짧은 어린아이이든 말 그대로 모두를 위한 개념이다. 말을 하는 사람이든, 수어를 하는 사람이든, 보이는 사람이든, 보이지 않는 사람이든 모두를 위한 개념이다. 

독일 길거리에서 봤던 수많은 휠체어와 유모차.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 어려운 어르신들. 아나운서보다 수어 통역사의 화면이 훨씬 큰 독일 공영방송의 화면. 외국인뿐만 아니라 문자를 모르는 독일인을 위해서 독일 정부 홈페이지에 마련해 놓은 '쉬운 언어', 혹은 음성 서비스. 이 얼마나 '모두'를 위한 사회인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나눌 필요가 없다. 장애인을 위한 접근성? 장애인을 위한 배려? 그런 것은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그저 우리 사회를, 우리 공동체를 '모두'에게 열어놓으면 된다. 

태그:#모두를 위한 접근성, #장애와 비장애, #FUR A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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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을 공부했다. 지금은 베를린에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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