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난설헌생가에 왕벚꽃이 피었나요?" 
"지금 활짝 피었어요."


벚꽃이 지면서부터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쯤 강릉 난설헌생가에 왕벚꽃이
피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생가 곁에 있는 허균허난설헌기념관에 전화를 했다. 그리고 다섯 시간을 차로 달려 우선 하루 묵을 숙소에 도착했다.
 
난설헌생가의 정문. 왕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난설헌생가의 정문. 왕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 김숙귀

관련사진보기

 
묵호 등대 아래 넓은 동해바다를 마당으로 들여놓은 펜션은 멋진 풍경과 주인장의 소탈한 성격이 마음에 들어 자주 들리는 곳이다. 나는 수평선 너머로 몸을 숨기는 해와 끝없이 펼쳐진 바다에 어둠이 내려 앉는 광경을 지켜보며 오래 깨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강릉으로 내달렸다. 순두부 끓이는 고소한 냄새가 퍼지는 초당마을 솔숲 속에 차를 세우고 허초희, 그녀의 흔적을 따라 들어갔다. 분홍빛 왕벚나무로 둘러싸인 난설헌 생가는 마치 솜씨 좋은 화가가 정성 들여 그려놓은 한 폭의 그림같다.
 
안채 뒤쪽에 활짝 핀 왕벚꽃과 장독들이 그림같다.
 안채 뒤쪽에 활짝 핀 왕벚꽃과 장독들이 그림같다.
ⓒ 김숙귀

관련사진보기

  
뛰어난 재주를 지녔음에도 시대가 품어내지 못한 불운의 시인 난설헌. 그녀의 개인적인 불행까지 더해져 난설헌을 생각하면 애달픈 마음이 된다.
 뛰어난 재주를 지녔음에도 시대가 품어내지 못한 불운의 시인 난설헌. 그녀의 개인적인 불행까지 더해져 난설헌을 생각하면 애달픈 마음이 된다.
ⓒ 김숙귀

관련사진보기

 
집안 마당도 꽃천지로 변해 있다. 생가 여기 저기를 둘러본다. 사랑채에 이르니 어린 난설헌의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리는 듯하다. 난설헌의 아버지인 초당 허엽은 슬하에 허성, 허봉, 허균, 세 아들과 딸 난설헌을 두었다.

그는 딸의 재주를 일찍부터 눈여겨보고 세 아들과 똑같이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특히 둘째 오빠인 허봉은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올 때면 여동생을 위해 귀한 책을 일부러 구해오기도 하고 친구였던 손곡 이달에게 누이의 글공부를 부탁하기도 했다.

손곡 이달이 누구인가. 조선시대 삼당시인(三唐詩人)중의 한 사람으로 서얼 출신이다. 신분의 한계로 불우한 일생을 보낸 이달의 삶은 난설헌의 동생인 허균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허균은 당시로서는 개혁적인 소설 '홍길동전'을 쓰게 되었다.
 
난설헌생가의 사랑채...사랑채에는 교산 허균의 영정도 모셔놓았다. 총명하고 진취적이었으나 이단아로 낙인찍혀 결국 역적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허균. 소설 홍길동전에서 그의 개혁적인 사고의 한 편린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생전에, 불행하게 죽은 누이의 글을 모아 중국과 일본에서 난설헌시집이 발간되게 했으며 난설헌의 시가 칭송을 받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난설헌생가의 사랑채...사랑채에는 교산 허균의 영정도 모셔놓았다. 총명하고 진취적이었으나 이단아로 낙인찍혀 결국 역적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허균. 소설 홍길동전에서 그의 개혁적인 사고의 한 편린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생전에, 불행하게 죽은 누이의 글을 모아 중국과 일본에서 난설헌시집이 발간되게 했으며 난설헌의 시가 칭송을 받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 김숙귀

관련사진보기

  
꽃밭으로 변한 난설헌생가.
 꽃밭으로 변한 난설헌생가.
ⓒ 김숙귀

관련사진보기

     
작은 쪽문을 지나 안채로 건너왔다. 정갈한 마당 한쪽에 모란 꽃이 탐스럽게 피어있다. 난설헌 영정 앞에 섰다. 모란 꽃만큼이나 고운 얼굴이 슬퍼 보이는 것은 그녀의 아픔과 고통이 내게 슬픔으로 투영된 탓일까.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부족함 없이 자란 난설헌은 열다섯 살에 김성립과 혼인을 하게 된다. 불행의 시작이었다. 신혼의 단꿈은 잠시였고 김성립은 아내의 뛰어난 글솜씨와 자주 비교되자 점점 아내를 멀리하고 기방 출입이 잦아졌다. 급기야는 집을 나가 오지 않았다.

난설헌이 지어 전해지는 '규원가(閨怨歌)' 한 구절이 떠오른다.

'곳 피고 날 저물 제 정처(定處)없이 나가 있어, 백마 금편(白馬金鞭)으로 어디어디 머무는고. 원근(遠近)을 모르거니 소식(消息)이야 더욱 알랴.'

난설헌은 자신을 멀리 하고 밖에 나가 오지 않는 남편이 몹시 원망스러웠으리라. 하지만 또 그만큼 남편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아버지 허엽이 객사하고 허봉과 허균이 유배를 가는 등 친정이 몰락하자 시댁의
냉대는 심해지고 두 아이마저 잃은 난설헌은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스물 일곱의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난설헌은 뛰어난 재주를 지녔음에도 시대가 품어내지 못한 불운의 시인이었다.

영정 앞에 서서 그녀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조선에 태어난 것, 여자로 태어난 것, 김성립과 혼인한 것, 이 세 가지가 한스러웠다는 난설헌의 굴곡진 삶이 현대를 사는 내게 더욱 안타깝게 다가온다.
 
생가 곁에 있는 솔숲을 거닐다가 대문 앞 의자에 앉았다. 당시로서는 비교적 자유로웠던 집안 분위기 속에서 가족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행복하게 자랐을 난설헌....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생가 곁에 있는 솔숲을 거닐다가 대문 앞 의자에 앉았다. 당시로서는 비교적 자유로웠던 집안 분위기 속에서 가족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행복하게 자랐을 난설헌....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 김숙귀

관련사진보기

 
생가 바로 곁에 있는 기념관으로 가는 길에 강릉 허씨 5문장으로 불리는 허엽,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의 시비가 서 있다. 두 아이를 잃은 슬픔을 쓴 난설헌의 작품, '곡자(哭子)'를 읽노라니 그녀의 애절한 심정이 내마음을 울린다.

난설헌의 슬픔을 온 마음으로 느끼며 곁에 있는 솔숲을 거닐다가 생가 대문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양갈래로 곱게 머리를 땋은 어린 난설헌이 환하게 웃으며 어디선가 뛰어나올 것 같다. 한자락 바람에 왕벚꽃 잎이 떨어진다. 내 마음도 가라앉는다. 화사한 분홍빛으로 변한 생가의 아름다운 풍경에 오히려 가슴이 시리다.  

4월 27일부터 28일까지 초당동 허균허난설헌기념공원에서 난설헌 438주기를 맞아추모헌다례 및 난설헌 문화제가 열린다. 생가 주위로 초당순두부집들이 많다. 난설헌의 아버지 초당 허엽이 깨끗한 바닷물로 간을 맞추어 두부를 만들었는데 맛이 좋기로 소문이 나자 자신의 아호를 붙여 초당 두부라 했다고 전해진다. 생가를 찾을 때마다 초당순두부를 먹는데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난설헌생가에서 가슴 시리고도 아름다운 봄을 만났다.

태그:#난설헌생가, #허초희, #왕벚꽃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여행은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나를 살아있게 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풍광과 객창감을 글로 풀어낼 때 나는 행복하다. 꽃잎에 매달린 이슬 한 방울, 삽상한 가을바람 한 자락, 허리를 굽혀야 보이는 한 송이 들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날마다 꿈꾼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