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19 07:51최종 업데이트 21.11.05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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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이 꽃망울을 터트리며 어깨 위에 내려 앉아 놀던 것이 어제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 봄기운이 홀연히 사라지고 꾸물꾸물한 날씨에 찬바람까지 더해져 겨울이 다시 온 듯했다.

김종분은 이래나 저래나 몸을 추스려 경동시장(서울 동대문구)을 향한다. 언제부턴가 비탈에 선 나무처럼 기울어진 몸, 아직 지팡이 없이도 걸을 수 있음을 고마워하며 버스에 올랐다. 남들은 꽃샘추위라며 겨울 외투를 다시 꺼내고 목도리까지 챙겼건만, 김종분은 홑겹 옷차림에 전대 자루 하나 걸쳤을 뿐이다.

"에구. 만 원에 가, 가자구."
"아이구! 할머니, 너무 하셔요. 용달 기본요금이 2만원이에요."
"무신 소리야, 늘 그렇게 갔어."
 

잠시 실랑이를 했지만 흥정은 싱겁게 끝났다. 김종분이 호박, 오이, 옥수수 등을 떼다가 왕십리 노점에서 판 세월이 벌써 삼십 년이다.
 

김종분 할머니를 가까이에서 클로즈한 모습 행당시장에서 노점을 하며 더울때, 추울 때는 인근 맥도날드에서 잠시 피난(?)을 하기도 한다. 그곳에서 찍은 사진. ⓒ 민병래

   
38년생이니 올해 팔순이 넘은 나이. 기계 운반 일을 하던 남편이 50대 중반에 뇌진탕으로 세상을 등지자 그녀는 노점으로 나섰다. 그때 그녀의 나이 쉰 살이었다. 삼남매는 아직 생활 터전을 잡기 전이었다. 무작정 거리에 나가 좌판을 펼친 곳이 왕십리 행당시장 앞 건널목이었다.

경동시장에서 왕십리까지는 용달차로 10분 남짓거리, 고산자로를 따라 가다가 청계천을 건너면 손에 닿을 듯한 거리에 있다. 그의 가게(?) 앞에 야채 상자를 내려놓으려니 바람이 매서워 천막으로 만든 그의 노점이 마구 흔들린다.


사실 구청에서 무허가노점을 단속한다고 천막을 뜯어간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쫓겨난 적도 많았다. 하지만 뜯어가면 뜯어가는 대로, 쫓아내고 전기를 끊으면 또 그런 대로 버티고 버티며 오늘까지 왔다.

"할머니, 요 오이 한 봉지 값 2000원 낼모레 줄게!"
"그려, 가지고 가. 요담에 줘."


오후 3시경, 막 장사를 시작할 때면 나타나는 동네 할머니다. 김종분은 2000원짜리 외상을 흔쾌히 달아준다. 그렇다고 장부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머릿속에 기억해두고 잊으면 잊는 대로 장사를 한다. 30년 세월, 한자리를 지켰으니 길거리 사랑방이 된 셈이다.
 

김종분 할머니가 손님에게 물건을 건네는 모습 김종분 할머니는 오후 3시부터 자정을 넘겨 새벽1시까지 자리를 지킨다. ⓒ 민병래

 
김종분의 가게는 두 평이 채 안 된다. 천막 한 구석에는 강냉이며 튀밥이, 앞에는 오이, 호박, 깐마늘, 가래떡이 귀한 손님상 보듯 가지런히 놓여있다. 안으로는 옥수수 삶는 큰 솥이 의젓하게, 가래떡 굽는 연탄화로는 얌전하게 앉아 있다. 양쪽 네 귀퉁이로는 얇은 쇠기둥이 한길 남짓 올라가 천막을 지탱해주고 있다.

여기가 그의 일터이며 삶의 터전이다. 늦은 시간엔 여기서 잠도 청했다. 자정 넘어 들어가면 아이들이 잠에서 깰까봐 걱정도 되고, 새벽시장에 늦지 않으려고 왕십리 대로변에서 경적 소리를 벗 삼아 잠들기도 했다.

김종분이 앉은 자리는 남향이지만, 앞으로 건물이 있어 하루 종일 볕이 들지 않는다. 그래도 해가 있는 낮에는 견딜 만하지만 날이 저물면 한기가 느껴진다. 길바닥을 내달리는 차들이 일으키는 바람까지 더해지면 꽃샘추위도 한겨울 매운 추위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김종분의 옷은 늘 홑겹이다. '그날' 이후 몸에 천불이 나서 옷을 여밀 수가 없었다. 몸을 풀어헤쳐야만 열을 식힐 수 있었다.

벌써 28년 전, 성대 불문과 88학번이던 둘째 딸 귀정이가 숨진 날이 28년 전인 1991년 5월 25일이다.

그날 귀정이는 학교 가는 길에 치마를 입고 나갔다가 황급히 돌아와서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그러려니 했다. 평소에도 아버지가 소주를 마시고 나면 빈병을 부지런히 나르기에 걱정이야 들었지만 별일 없으려니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딸은 그날 '공안통치 민생파탄 노태우정권 퇴진을 위한 제3차 범국민대회'에 참가했었다.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아들 친구가 늦은 오후에 노점으로 찾아왔다. "귀정이 누나가 다쳐서 백병원에 입원해 있으니 가보셔야 한다"는 얘기였다. 장사하던 중에 좌판을 치울 수도 없어 아들 친구에게 택시비를 쥐어주고 먼저 가보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렇지만 김종분도 마음이 불안해, 장사를 그냥 벌려놓은 채 물어물어 백병원을 찾아나섰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박종철 아버지가 '귀정이 어머니'를 찾아 왕십리를 헤매고 다니셨다"고 한다. 도착하니 이미 백병원 앞은 시위대와 경찰이 거친 몸싸움을 벌이며 난리통이었다. "왜 막아, 폭력경찰 물러가라!!" 고함소리가 곳곳에서 일어나 귀가 떨어져나갈 정도였다.

경찰이 병원을 빈틈없이 에워싸서 들어가려 해도 계속 밀려나고 말았다. 그때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아버님 한 분이 "가족이니 길을 열어주라"고 해서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입원했다는 딸을 보러왔건만, 병실로 안내하지 않았다. 설마 했지만 영안실로 인도받을 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슴 고동이 쿵쾅대고 터져나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왜 병실로 안 가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외면했다. 순간 다리에 힘이 쭉 빠지고 넘어질 듯했다. 영안실은 점점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천천히 방안에 들어서니 흰 천으로 쌓인 몸뚱이가 뎅그러니 놓여있었다. 사방 벽은 시퍼런, 징그럽게 시퍼런 색이었다.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외면하려 해도 몸뚱이는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비틀비틀대며 거의 무릎 걸음으로 다가가 흰 천을 걷어냈다. 눈에 들어온 것은 곱디고운 둘째 딸 귀정이었다.

그날 이후 김종분은 몸에서 열이 나 늘 식혀야만 했다. 그래서 옷을 여미고는 살 수 없었다. 살을 에는 한겨울 추위가 아니면 그저 옷을 벌려 놓고 있어야 열을 풀어낼 수 있었다.

"어머니 추운데 오늘도 나오셨어요? 옥수수 두 봉지 좀 주세요."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구청 직원이다. 천막을 뜯어가며 못내 미안해하던 단속반 사람이다. 그 뒤부터 퇴근 무렵이면 가끔씩 들러 가래떡이며 땅콩을 한 봉지씩 사간다. 김종분은 옥수수에 가래떡까지 얹어 "어서 들어가 안식구하고 따순 밥 먹으라"고 인사를 했다. 어쩜 이 맛에 장사를 하는지도 모른다.
 

김종분 할머니가 옥수수를 찌는 모습 할머니 가게에서 옥수수와 가래떡이 제일 인기다. ⓒ 민병래

 
늦은 오후 해가 떨어지니 제법 쌀쌀하다. 한기가 느껴질 정도다. 그제야 김종분은 겨우 바람막이 하나를 꺼내 몸에 걸쳤다. 딸 귀정이가 좋아하던 꽃분홍색이다.

김종분은 백병원 영안실에서 5월 25일부터 6월 12일 장례식 날까지 꼬박 열아홉 날을 보냈다. 몸이 무너져 내렸지만 딸 귀정이의 친구들이 손잡아주고 어깨도 주물러주며 항상 곁에 있어주었다. 그때 형 집행정지로 출소했던 문익환 목사님, 지선 스님, 이소선 어머니 등이 거의 함께 지내며 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민가협 어머니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도움 덕에 귀정이 옆을 지켜낼 수 있었다.

열아홉 날을 지내면서 김종분이 제일 힘들었던 때는 부검한다고 경찰이 병원 난입을 시도했을 때였다.

귀정이가 대한극장 앞 도로에서 경찰의 공세에 밀리다 압사한 날이 1991년 5월 25일이다. 명지대생 강경대가 백골단에 맞아 숨진 날로부터 꼭 한 달 뒤였다. 당시 공안정국을 몰고 갔던 노태우 정부는 김귀정 사망으로 불리하게 된 정세를 서둘러 덮고자 부검을 명분삼아 시신을 뺏으려 했다.

그래서 '김귀정열사폭력살인대책위'의 사수대는 경찰과 매일 치열하게 싸웠다. 특히 격렬했던 날은 5월 30일이었다. 나중에 확인된 일이지만, 새벽 5시에 경찰은 백골단과 전경을 세 방면에서 한꺼번에 투입하는 작전을 전개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일명 '엘레베이터 작전'이었다. 80여 명의 백골단이 환자 보호자와 방문객으로 가장해서 병원 13층에 집결, 작전 개시와 함께 급강하, 영안실로 난입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관제데모작전'이었다. 시위대로 위장한 사복조들이 을지로 일대에서 전경과 맞붙은 뒤 쫒겨들어가는 것처럼 병원 바리케이드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백병원 뒤 중부세무서의 담을 굴삭기로 헐고 병력을 투입, 병원 정문을 장악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경찰은 달려들었지만 사수대의 결사항전에 밀려 작전을 포기, 철수하고 말았다. 그날 부상자들이 특히 많았다.

김종분은 딸의 친구들이 피터지며 다치고 영안실에서 밤새우며 지쳐가는 모습을 보기가 너무 힘들었다. "우리 딸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상하는구나"하는 생각에 속상하고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렇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저 바라보면서 눈만 껌벅껌벅할 뿐, 천불을 안으로 안으로 삭힐 수밖에 없었다.

"저녁 밥은 어떻게 할래요? 동태찜 시켜 먹을까?"

문득 생각에 잠겨있던 김종분을 꽃집 아줌마가 불러 깨운다. 행당시장 앞, 손바닥만 한 땅뙈기 안에서 어깨 나란히 노점 하는 이웃이다. 그 집 말고도 토스트, 칼국수, 군밤장사 이렇게 서넛이 (지금은 칼국수 장사가 죽었지만) 서로 수십 년을 의지하며 함께 했다. 저녁 끼니 때가 되면 라면을 끓이기도 하고, 시켜 먹기도 하며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식구다.

동태찜을 나눠먹고 가래떡과 옥수수를 몇 봉지 겨우 팔고 나니 어느덧 자정이 가까이 온다. 이때쯤 되면 몸이 한결 춥고 졸음까지 밀려온다. 발 앞에 연탄난로를 몸 가까이 더 끌어안아 본다. 김종분은 늘 자정을 넘겨 한시까지 장사를 한다. 밤 11시가 넘어 사람들 발길도 잦아지면 장사도 시원찮다. 그렇지만 김종분은 늘 새벽 한시 경까지 거리를 지킨다. 아니 졸음에 못 이길 시간까지 스스로를 가둬둔다.

그날 6월 12일은 참으로 길었다. 아니 11일부터 헤아려보면 더 긴긴 날이었다. 장례식을 위해 귀정이를 성대로 옮기던 날, 뜻하지 않게 성균관 유림들이 교문을 막고 나섰다. "성균관에는 정몽주·퇴계 선생 등 성현 39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초대 총장이었던 김창숙 선생 장례 때도 시신이 들어오지 않았다"며 운구를 저지했다.

그날따라 비는 추적추적 내렸고 늦은 오후여서 땅거미까지 지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학생들은 무릎을 꿇었다. 여학생들은 치마를 입은 채 맨살을 아스팔트에 드러내놓고 애원했다. "귀정이가 마지막으로 교정을 볼 수 있게 해 주세요"라며... 그 간청 덕에 운구는 정문을 피해 도서관 옆문으로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6월 12일 성균관대 금잔디광장을 출발한 장례행렬은 파고다공원 앞에서 1차 노제, 대한극장 앞에서 2차 노제를 치렀다. 그리고 딸이 다녔던 무학여고 앞을 거쳐 밤 늦게 모란공원에 묻힐 수 있었다.
  
귀정이를 보내고 난 후 김종분은 자정을 넘기고 나서야 노점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몸을 부대껴야 집에 가서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렇지만 문을 열고 자야 했다. 문을 닫고서는 잠이 들지 못했다. 옷을 풀어헤쳐야 하는 것처럼 문을 열어놓아야 겨우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자정이 넘으니 저 멀리 달빛은 맑아지는데 왕십리 가로등은 끔벅끔벅 졸기 시작했다. 큰 길가에 차 소리도 조금씩 잦아든다. 이때가 장사를 거둘 시간이다.

김종분은 연탄난로 불을 끄고, 몸을 일으켜 세운다. 전기가 끊긴 이후에는 가로등 불빛만 의지해 야간장사를 한 지 제법 오래되었다. 분홍빛 바람막이에 묻은 먼지를 툴툴 털고 남은 오이며 호박을 대충 수습해 천막 안으로 밀어놓고 얼기설기 동여매 쇳대를 채웠다.

예전에는 이 천막 안에서 많이 잤다. 그런 다음 날이면 귀정이와 큰딸은 늘 성화를 했다.

엄마 기다렸는데 왜 안 왔냐고, 
너희들 잠 깨울까봐 그냥 거기서 잤다고,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고, 엄마 몸 상한다고.

그렇게 티격태격 말다툼을 했다.
그렇게 살가웠던 귀정이. 이제 한 달 남짓이면 28주기 기일이 다가온다.

고맙게도 딸의 친구들은 '김귀정추모사업회'를 만들어 일 년에 세 번 어버이날·설날·자신의 생일날을 잊지 않고 찾아와주었다. 그것도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그게 참 힘이 되었다. 그리고 왕십리의 무학여고 동창들도 때때로 찾아왔다. 와선 안부도 묻고 쪽파 한 단 사며 몇 만원씩 전대에 밀어 넣어주기도 했다.

어떤 날은 와서 "어머니 감기 든다"며 목도리를 둘러주고 갔고 작년에는 팔순잔치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귀정이를 잃어 아팠지만 더 많은 딸과 아들을 얻었다는 행복감을 느끼기도 했다.

귀정이의 언니인 큰 딸과 동생인 막내 아들 녀석은 늘 성화다. 간청도 많이 한다. "이제 그만 노점 일 걷으시라고, 쉬셔야 한다"고.

그렇지만 김종분은 행당시장 건널목 앞 이곳을 떠날 수 없다.
귀정이와 3남매를 키워낸 이 곳,
귀정이의 친구들이 늘 찾아오는 이 곳,
왕십리의 거리 사랑방이 된 이 곳을 벗어날 수 없다.
산동네에 판잣집이었지만 첫 집을 장만했던 이 곳, 왕십리를 떠날 수가 없다.

김종분은 몸을 기우뚱거리며 발걸음을 내딛는다.
이제 집으로 가는 길이다.
김종분의 천막노점을 비추던 가로등도 졸린 눈을 부비며 따라 일어난다. 앞서서 종종 걸으며 찬바람을 막아주고 길을 비춰준다.
왕십리의 별빛 달빛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녀가 가는 길에 빛살을 보태준다.
밤하늘 어스름 어딘가에는 귀정이의 웃음, 귀정이의 속삭임이 번지는 듯하다.

"엄마 오늘도 고생했어, 사랑해..."

김종분은 눈을 꿈벅꿈벅하며 한마디 내뱉는다. 썩을 년, 꿈에 한 번도 안 보이면서...
 

김종분 할머니의 귀가길 새벽 1시까지 장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 민병래

 
 김종분 할머님의 이력 
39년 화성에서 출생 
63년 인천으로 시집 
66년 왕십리 이주 
88년 남편과 사별 
88년 왕십리 행당시장앞에서 노점 시작
91년 둘째딸 김귀정을 민주화운동과정에서 잃음
2018년 팔순연 
2019년 팔순이 넘은 지금도 행당시장앞 거리를 지키고 있음
 
김귀정을 돌아보는 사진들

김귀정의 초상 성대 불문학과 88학번 김귀정은 91년 공안통치분쇄 시위과정에서 산화하였다. ⓒ 김귀정 추모사업회

 
 

무학여고 재학시절의 김귀정 김귀정은 왕십리 무학여고를 나왔다. 무학여고시절의 모습, 맨 왼쪽이다. ⓒ 김귀정추모사업회

   

백병원 영안실에서 통곡하는 김종분 여사 91년 5월25일부터 6월11일까지 김귀정열사는 백병원 영안실에 있었다. ⓒ 김귀정추모사업회

   

김귀정 열사의 무덤앞에서 김귀정 열사는 91년 6월12일 마석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가 현재는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으로 모셔져 있다. ⓒ 김귀정추모사업회

    

김귀정의 운구행렬 김귀정은 6월11일 장례를 위해 성대로 옮겨져왔다. ⓒ 김귀정추모사업회

 

 

성균관 유림이 학교진입을 막자 간청하는 귀정이 친구들의 모습 성균관 유림은 성현이 모셔져있는 곳에 시신이 들어갈 수 없다며 막았다. 이에 간청하는 재학생들의 모습. ⓒ 김귀정추모사업회

 
 

성균관 유림이 김귀정의 성대운구를 막자 빗속에서 간청하는 귀정이 친구들의 모습 성균관 유림은 성현이 모셔져있는 곳에 시신이 들어갈 수 없다며 막았다. 이에 간청하는 재학생들의 모습. ⓒ 김귀정추모사업회

   

91년 김귀정열사 사망규탄 투쟁현장의 모습 김귀정 열사의 사망을 계기로 공안통치 분쇄 투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 김귀정추모사업회

   

91년 김귀정열사 사망규탄 투쟁현장의 모습 김귀정 열사의 사망을 계기로 공안통치 분쇄 투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 김귀정추모사업회

 
 

김귀정의 장례행렬 91년 6월12일 성대를 출발한 장례행렬은 파고다공원, 대한극장, 무학여고를 거쳐 모란공원에서 마쳤다. ⓒ 김귀정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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