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16 09:42최종 업데이트 19.04.16 10:40
술을 맛보면서, 때로 이야기를 함께 맛본다. 내게 간혹 명주가 뭐냐고 물으면, 감미료가 들어가지 않는 술이거나 이야기가 많이 담긴 술이라고 답한다.

중국 소흥에 갔을 때다. 소흥은 황주의 대명사로 불리는 소흥주로 유명한 동네다. 황색이 돌아서 황주인데, 검은 빛에 가까운 간장색이나 콜라색이 돈다. 장향형의 마오타이와 함께 장 냄새가 나는 대표적인 중국술로 꼽힌다. 
 

함형주점에서 간장색과 향이 도는 소흥주를 한 잔 하다. ⓒ 막걸리학교

 
장 냄새라니? 한국 술에서 이런 냄새가 나면 "술이 썩었다!"는 소리를 듣는다. 오래 숙성하면 올라오는 향인데, 한국에서는 백일 동안 발효하고 숙성까지 해서 내놓는 한산 소곡주에서 곧잘 잡힌다. 결코 익숙하지 않은 낯설고 거북한 향이다.

소흥에 갔을 때에도 장내는 어디서 나고, 중국인들은 왜 그 냄새를 즐길까 궁금했다. 그런데 아침 산책길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산책을 하려고 호텔 문을 나서 8차선 큰길 옆 인도를 걸어가는데, 장내가 아침 안개처럼 밀려왔다.


요릿집이 주변에 있는 것도 아닌데, 장내가 길거리 곳곳에 묻어 있었다. 중국인들에게 익숙한 향기구나, 익숙하니까 술마저도 장향을 받아들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소흥에서 소흥주를 즐기는 대표적인 곳 중의 하나가 함형주점이다. 함형주점의 음식 맛이 예전 같지 않더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함형주점은 함형주점이다. 함형주점의 술잔이나 수저에는 1894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1894년에 창업했다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지금 모습이 100년 전 그대로는 아니다.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는 노신고리의 함형주점 ⓒ 막걸리학교

 
오늘의 함형주점이 있게 된 것은 작가 노신(魯迅 1881~1936)의 소설 '쿵이지'(한문으로 공을기(孔乙己)인데, 중국말로 콩이지, 쿵이지로 읽는다. 여기에서는 창작과비형사의 전형준이 옮긴 번역본에 따라 쿵이지라고 표기한다) 때문이다.

쿵이지는 원고지 30매 정도에 지나지 않은 에세이에 가까운 소설이다. 1인칭 주인공인 "내"가 12살 무렵 일했던 함형주점의 단골인 쿵이지에 대한 이야기를 20여 년이 지난 뒤에 기억나는 대로 적고 있다.

함형주점은 노신이 살았던 동네, 노신고리(魯迅古里)에 있다. 주점 앞에는 쿵이지 동상이 탁자에 팔을 얹고 서 있다. 노신은 소설 속에서 쿵이지를 "키가 컸고 창백한 얼굴에 주름살 사이로 늘 상처가 나 있었으며 희끗희끗한 수염이 마구 헝클어져 있었다. 장삼을 입기는 했지만 더럽고 너덜너덜한 것이 적어도 십 년은 깁지도 않고 빨지도 않은 것 같았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함형주점 앞의 회향콩을 들고 있는 쿵이지 동상 ⓒ 막걸리학교

 
쿵이지 동상은 앞이마가 훤하게 드러나 있고, 얼굴에는 인자한 미소가 흐르고 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는 인자하게 그려져 있지는 않다. 쿵이지는 술집 손님뿐만 아니라 술집 주인에게까지도 놀림감이 되는, "글은 배웠었지만 결국 공부도 더 이상 계속하지 못하고 생계를 꾸려갈 줄도 모르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갈수록 가난해져서 거지가 될 지경으로까지 몰락"한 인물이었다.

그는 장삼을 입은 손님 중에서 유일하게 노동자들과 섞여 가게 바깥 쪽에서 따끈한 황주를 시켜먹는 손님이었다. 동상 쿵이지는 손에 콩을 하나를 쥐고 있다. 쿵이지가 함형주점에 들어서면 시켰던 "따뜻한 술 두 잔, 그리고 회향콩 한 접시"의 그 콩이다. 회향을 넣어 삶은 콩인데, 소금물에 삶은 죽순과 함께 술값 4문에 1문을 더하면 나오는 안주였다.

쿵이지는 술값을 마련하기 위해 도둑질도 서슴지 않고, 다른 손님들에게 놀림감이 되더라도 화를 내지 않은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일하기를 싫어하는 나쁜 버릇"을 지녔다.

그는 어느 날인가 술값을 마련하기 위하여 도둑질을 하다가 다리가 부러진 뒤로 모습을 잘 나타내지 않다가, 어두운 밤에 손을 짚어 몸을 이끌고 나타나 따뜻한 황주 한 잔을 마시더니, 그동안 밀린 외상 술값 19문을 남긴 채 사라져버린 인물이다. 소설은 그가 "분명히 죽었을 것이다"라고 끝내고 있다.

본래 함형주점은 1894년에 노신의 집안이 가세가 기울어지자 친척들이 합자해서 1894년에 창업한 술집으로, 노신의 당숙인 주중창이 책임을 맡아 운영했다. 하지만 주점은 잘 되지 못했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았다. 함형주점이 쿵이지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91년의 일이다. 관광 정책에 따라 노신고리에 조성되었고, 노신의 쿵이지와 소흥주가 만나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함형주점은 쿵이지 동상을 앞장세우고, 소설의 첫 문장 "노진의 주점은 구조가 다른 고장과 달랐다. 한결같이 기역자 큰 스탠드가 길 쪽을 향해" 있는 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소설 속에는 100년 전 소흥에서 황주를 즐겼던 방식도 잘 기록되어 있다. 황주를 데워 마시는데, 막일을 하는 노동자들은 따뜻한 잔술을 주문하여 소금에 절인 죽순이나 회향콩을 안주 삼아 선 채로 마셨고, 장삼을 입은 신분 높은 사람들은 "거들먹거리며 주점 안채로 들어가서 술 가져와라 안주 가져와라" 하며 느긋하게 앉아서 즐겼다.

지금의 함형주점 안채는 8명이 앉을 수 있는 사각탁자가 여럿 놓여 있다. 탁자 2개를 맞붙이면 12명은 앉을 수 있다. 회향콩과 소금에 절인 죽순을 팔고, 취두부와 화려한 안주들도 판다. 회향콩을 포장하여 팔고 함형주점 전용 황주도 팔고 있는데, 황주는 소흥주 제조장인 고월용산에서 주문 제작한 '태조(太雕)'라는 술이다.
 

소흥주 대표 브랜드의 하나인 여아홍. ⓒ 막걸리학교

 
소흥주의 대표적인 브랜드로 여아홍이 있다. 소흥에 살던 한 부인이 임신을 하고 아들을 바라는 마음에 정성들여 황주 한 단지를 묻어두고 아들을 낳으면 친척들을 불러 잔치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딸을 낳자 실망하여 묻어둔 황주를 잊어버렸다.

딸이 커서 시집을 가려할 때 문득 그 술 단지가 생각나 열어보았더니 맛있게 숙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여하홍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여아홍은 황주가 오래 숙성된 술이라는 뜻을 잘 담아내고 있는, 황주의 명성을 높여주고 있는 명칭이자 스토리다.

긴 세월 속에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은 술이라야 명주가 된다. 그 인기를 얻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도 더하게 된다. 황주는 바이주와 더불어 중국을 대표하는 술이다. 명주는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며, 술을 팔더라도 그 이야기를 함께 팔아야 한다는 것을 함형주점의 황주가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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