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낙태죄 위헌여부 선고를 위해 11일 오후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유남석 소장과 재판관들이 입장하고 있다.
 낙태죄 위헌여부 선고를 위해 11일 오후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유남석 소장과 재판관들이 입장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관련사진보기

 
아들, 11일인 오늘은 정말 역사적인 날이야. 이 땅의 많은 여성이 수십 년을 바라고 바라며 싸운 '낙태죄 폐지'가 이뤄진 날이거든. 헌법재판소가 낙태를 처벌하도록 한 형법 조항을 위헌 3, 헌법불합치 4, 합헌 2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어. 2012년 합헌 결정 후 7년 만에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짐에 따라 낙태죄 폐지를 위한 입법 절차가 진행될 예정이야.

너무 늦었지만 그래도 충분히 기뻐할 가치가 있는 날이야. 여성이 주체적으로 안전하고 건강하게 임신·출산을 계획할 권리가 '이제야' 인정되었다는 사실에 분노가 일다가도 '이제라도' 관점을 바꿨으니 참 다행이다. 

엄마는 '낙태'라는 용어부터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이제 '임신중절' 혹은 '임신선택'이라고 말할게. 낙태죄가 '폐지' 되었다는 것은 이 사회가 임신한 여성을 바라볼 때, '태아'를 주체로 보는 것을 멈추고 '여성'을 삶의 주체로 바라본다는 거니까. 지나치게 부정적인 의미를 연상시키며 죄책감을 유발하는 용어부터 바꿔야지.

낙태죄 폐지는 남성·국가의 책임을 묻는 시작

"계집x들이 피임을 잘했어야지."
"몸 관리 못 해 임신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섹스는 하고 싶은데 임신과 출산을 하고 싶지 않으면 섹스하지 마라. 섹스는 밝히면서 애가 싫어서 낙태한다? 이기적인 거다." 
"낙태죄 폐지되면 여자들은 죄책감 없이 신나겠네."


낙태죄 폐지에 관한 기사에 댓글을 바라보다 한동안 정신이 멍해져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어.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 남자고, 그 남자들은 마치 자신들의 삶과 낙태가 아무런 관련 없는 것처럼 자유롭게 말하거든. 

오랜 시간 동안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에서 벌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 '임신한 여성'과 '의사'를 지목해 놓아서 마치 '남성'들은 죄가 없는 것과 같은 착각을 심어줬어. 저런 댓글은 그렇게 지속해서 누적된 무의식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저급한 인식 수준이라고 생각해.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위헌 판결을 앞 둔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합헌 찬반 집회가 열리고 있다.
 헌접재판소에서 낙태죄 위헌 판결을 앞 둔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합헌 찬반 집회가 열리고 있다.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위헌 판결을 앞 둔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합헌 찬반 집회가 열리고 있다.
 헌접재판소에서 낙태죄 위헌 판결을 앞 둔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합헌 찬반 집회가 열리고 있다.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임신의 과정에는 분명 남자가 있는데 '낙태죄'의 역사에서 남성의 존재는 지나치게 지워졌어. 그동안 우리 사회는 임신의 책임을 남녀에게 동등하게 묻지 않고 오직 여자에게 물었잖아. 

임신이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불안감, 임신이 되었을 때 느끼는 당혹감과 두려움, 임신중절로 인한 죄책감, 신체적으로 겪어야 하는 출혈·염증·자궁 손상, 후유증, 합병증, 불임 위험, 심지어 목숨의 위협까지 여성이 감당해야 할 일이었지.

낙태죄가 폐지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제 우리 사회는 어떻게 변화할까? 여러 맥락의 진단과 상상이 있겠지만, 엄마는 오늘이 우리 사회가 한쪽 성별에만 죄를 묻고 부담을 주던 구시대적인 악습을 끊고 사회 구성원 모두가 그 부담을 함께 나누기 시작한 날이라고 믿어. 여성만의 문제로 축소하고 낙인찍던 문제를 모두의 문제로 확장하는 변화의 출발점에 서 있는 기분이거든. 

"여자에게는 죄가 없다"가 아니라 "여자에게도 남자들과 동등한 성적인 욕망이 있고 그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자, 서로를 바라보는 불평등한 성인식을 바로잡자"고 결정한 거니.

'피임의 주체' 남자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한국의 콘돔 사용률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가장 낮은 11.5%(2015년 기준)라는 통계가 있어. 또 최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2018년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를 보면 인공임신중절 당시 콘돔, 자궁 내 장치 등의 피임방법을 사용한 비율은 12.7%에 불과했어. 질외사정법·월경주기법과 같은 불완전한 피임방법은 47.1%, 피임하지 않은 비율(사후피임약 복용 포함)은 40.2%로 나타났어. 충격적인 결과야.

법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어도 출산을 원치 않는 성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피임이야. 임신 예방은 꼭 필요한 것이고, 피임에서는 남성의 콘돔이 가격 면에서나 부작용 면에서나 가장 합리적인 피임법인데, 한국 남성들은 성관계의 만족감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콘돔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니 참 황당한 일이야.

임신중절 수술이 합법화된다고 해서 그 선택을 즐겁고 유쾌한 마음으로 할 여성은 없어. 생명의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거든.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금전적으로 여전히 부담스러운 일이야. 임신중절 수술은 출산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님에도 피임에 실패했을 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최후의 수단이야. 낙태죄가 폐지된 이후에도 여성의 입장에서는 피임이 가장 중요해.

섹스는 성'관계'야. 엄마는 네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떳떳한 사람이길 바란다. 몇 명의 여성과 섹스를 즐겼는지, 정력이 얼마나 좋은지로 너의 '남자다움'을 자랑하기보다 너의 행위가 만들어 낼 한 생명을, 또 그 생명을 감당할지도 모르는 상대 여성의 삶을 진심으로 염려할 줄 아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 

너도 여성들과 똑같이 임신에 대한 두려움과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확실한 피임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네 욕구를 앞세워 '성'에 집중하는 관계를 갖지 말란 말이야. 남성들의 적극적인 피임 참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단다.

변화를 막을 수 없다

달라질 세상에서 이런 말은 이제 통하지 않을 거야. "콘돔 사용은 섹스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는 탁현민 전 청와대 행정관의 말, "콘돔을 쓰면 로맨스의 부분에서 찬물을 끼얹는 거 같다"는 봉만대 영화감독 (EBS1 '까칠남녀' 2회에서)의 말, "정관수술을 하면 정력이 약해진다" "피임은 여자 몫이다" 같은 말 등. 

여성들은 앞장서 변화를 만들고 있어. 여성을 삶의 한 주체로 바라보지 않고, 국가주의적 관점으로 도구화하는 인식은 구시대의 유물이 될 거야. 여성들은 더 이상 남성 중심적이고 폭력적인 성문화에 순응하지 않을 거야. 

낙태죄 폐지 이후 피임, 임신, 출산에 대한 현실적인 교육에서부터 건강한 입양문화 확산, 비밀출산법, 양육비 책임법, 임신중절의 의료보험 적용 등 제도적 개선까지 앞으로 풀어야 할 문제가 많지만, 여성과 남성이 성관계에서 사람 대 사람으로 동등한 '관계'에 집중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 여성을 도구가 아닌 한 사람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비로소 새로운 역사가 시작하겠지.

분명한 것은 낙태죄 폐지가 우리 사회를 지금보다 훨씬 더 품위 있는 사회로 전진시킬 거라는 사실이야. 단순히 여성에게 죄를 묻지 않는 것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어마어마한 변화가 따를 거야. 

여성들은 더 현명해질 것이고, 시대의 감각에 뒤떨어지는 남자들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 변화는 네 힘으로 막을 방법이 없어. 도태되지 않으려면 남성 중심의 왜곡된 성인식을 돌아보고 여성존중을 먼저 배우는 수밖에. 엄마는 네가 시대와 불화하는 인간이 아닌, 시대의 변화를 함께 만드는 건강한 시민으로 살아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자, 낙태죄 폐지를 기뻐하는 일부터 시작하는 게 어때? 엄마는 오늘, 이 순간을 많이 기다렸고, 너무 감격스러워 아무리 기뻐해도 부족한 날이거든! 함께 기뻐할 남성이 별로 없다는 건 참 슬픈 일이야. 네가 함께 축하해주렴!

댓글21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