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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매긴 성적표> 이상석, 돌아오다

'학교 붕괴', '교실 붕괴'란 말이 공공연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 지도 어언 20년이 가까워 온다. 붕괴되어야 할 것은 마땅히 붕괴되어야 하는 진실의 역사에서 학교도 예외일 순 없다. 하지만 그 '붕괴-변화'의 와중에 붕괴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마저 그리 되어버린 현실을 생각하노라면 마음은 답답해지고 또 슬퍼진다.

붕괴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엔 어떤 것이 있는가. 교사와 학생 사이를 이어주는 사랑과 믿음과 우정이다. 문제적 교사를 경찰에 곧장 신고하는 학생의 학교, 문제적 학생을 교육적 고려 없이 '법대로, 매뉴얼대로 처리'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는 교사의 학교엔 사랑과 믿음과 우정의 교육이 들어설 자리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교사들이 갈수록 아이들 마음속으로 성큼 걸어 들어갈 용기를 내지 못하고 일정한 선에서 그 걸음을 멈추고 마는 까닭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짜자잔, 이상석이 돌아왔다-고 나는 말해본다.

무슨 말인지 의아해할 이들을 위해 말을 달리 해보자.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를 쓴 천생의 교사 이상석이 또 한 권의 책을 들고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고.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초판, 1988)는 아이들을 부모의 빈부나 시험 성적의 우열, 모범생-문제 학생으로 차별하지 않고 그야말로 '사랑으로' 품으려 한 그의 첫 교단일기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는 것을 덧붙여 둔다.

그럼 '돌아왔다'는 건 무슨 뜻인가. <지금, 여기, 나를 쓰다>를 읽노라면 정년퇴임을 하고 학교를 떠난 지가 4년이나 된 그이건만 오늘 이때까지도 교실에서 아이들과 지지고 볶는 현직의 선생님처럼 느껴진다는 말이다. 내가 보기에 이상석이야말로 겁도 없이(!) 아이들의 마음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 희귀한 교사들 중에서도 단연 최강의, 아니 최고로 마음이 여린, 눈물 많은 선생님인 것이다.

아이들 마음 속을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 겁 없는(!) 교사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의 교사 이상석의 <지금, 여기, 나를 쓰다>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의 교사 이상석의 <지금, 여기, 나를 쓰다>
ⓒ 양철북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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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아이들의 마음을 열게 하고 그 마음속으로 용감하게, 때론 마음을 다치기도 해가며 걸어 들어갈 수 있었던 비법 내지 통로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그가 35년을 국어 선생 하면서 한 해도 소홀히 하지 않았던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이다.

2003년 타계한 이오덕 선생이 맨 처음 주창하고 실천한 그것은 글쓰기를 통해 아이들의 참된 성장, 즉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가꾸어 나가도록 돕는 교육인 것이다. 요컨대 <지금, 여기, 나를 쓰다>는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의 길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주는 한 편의 연작 드라마와도 같다.

그 길의 첫 관문은 무엇일까? 아이들이 시(詩)에, 또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도록 꼬드기는 일이다. 우선 준비해 간 재미있는 짧은 시, 이를테면 '당신 생각을 켜 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가을〉, 함민복)이라든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꽃'(〈그 꽃〉, 고은) 과 같은 시를 읽어주고는 아이들에게 맘에 드는 걸 골라보라고 한다. 그러고서 이상석은 아이들 의견에 덧붙여 이렇게 말한다.
 
"'당신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안 하고, '생각을 켜 놓은 채 잠들었다', 이렇게 말하니 뭔가 있어 보여. 너거는 안 그렇나? " (16쪽)

이런 다음에는? '우리만 아는 우리 이야기'를 써 볼 것을 슬슬 권해봐야 한다.
 
우리 반에서는 (공문서 형식의 학급 일지 대신에) 공책에 날마다 일어난 재미난 사건들을 간단히 써보자고 했다. 이름하여 학급 야사(學級野史)! 글쓰기를 즐거워하는 아이 여섯 명을 뽑아 사관으로 삼았다. (……) 야사 쓰기를 시작할 때 사관 아이들을 불러 부탁했다.
"어느 선생님 수업에 아이들이 많이 웃어? 웃기는 선생님이 있잖아."
"웃기긴 선생님이 젤 웃기잖아요."
"나 말고 또."
"수학 송 샘은 말없이 웃기고 사회 샘은 때리면서 웃기고……."
(……) 이렇게 시작한 학급 야사 쓰기는 우리 반 아이들의 숨통이 되었다. (20~21쪽)
 
아이들의 숨통을 틔어주는 '삶을 가꾸는 글쓰기 수업'의 감동과 재미

때론 숨 막히는 학교에서 '숨통'이 터져야 글도 나오고 뭐도 나올 터다. '제목: 내가 원하는 환상적인 학교/ 내용: 학교를 없앤다'와 같은 '짧은 글로 몸 풀기'를 한 다음에는 5분~7분 정도 짧은 시간 안에 '누가 더 자세하고 길게 쓰는가를 겨루'는 '글쓰기 놀이'를 시도한다. 아이들이 일상에서 '직접 본 것'을 중심으로 해서 말이다. 그래야 '글쓰기가 어떤 건지 조금(은) 보이'게 될 테니까.

다음은 이오덕의 시골 초등 아이들 글 모음집 <일하는 아이들>을 읽고 쓴 중2년생의 글이다.
 
맨날/ 나는 천진난만한 티 없는/ 소년이라고 자부해 왔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나의 환상을 깨끗이/ 깨어 버렸다.
내가 얼마나 거짓되고/ 울긋불긋 치장한 글을/ 썼는가를/ 너무나 확실히/ 가르쳐 주었다
글이란 자신이 겪어보지 않고는/ 쓸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진리가 이 책 속에/ 숨어 있었다.
학교의 글짓기 선수들이여/ 이 책을 보고/ 반성해 보자. (1983) (55~56쪽)
 
글쓰기에 대한 각성이자 자신의 삶에 대한 각성이 담긴 놀라운 글이다. 그런데 이런 아이들도 이상석이 마련해 놓은 또 하나의 관문과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자신의 '식구 이야기'를 꾸밈없이 써보는 일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나는 이상석에게 묻고 싶었다.

아니, 아이들 식구 이야기는 들어서 어찌 하겠다는 건가요? 아이들의 사생활에 대해 너무 깊이 알려들면 낭패를 당할 수도 있어요. 그것도 가난한 부모들이 많은 지역 학교의 힘겨운 아이들이라면 더욱……! 그러나 그는 이 관문을 건너 뛸 수가 없다. 교사와 학생이 서로 마음의 문을 더욱 활짝 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요즘엔 하도 바빠서/ 담해 한 대 필 시간도 없이 일만 한단다."
나는 난생 처음 생각했다. / 아버지께서/ 담배를 피우셨으면 좋겠다고.
(〈담배〉, 고2 예지희) (2012) (89쪽)
 
아이들의 이런 고백 정도야 나라도 무던히 들어줄 수 있다. 이상석의 말처럼 '아버지 위하는 마음이 절실하고도 간절하다'는 것이 바로 전해온다. 그러나 '우리 아빠는 선박직원이다, 아니 아닐지도 모른다, 사실은 나도 잘 모른다, 아빠는 나에게 집, 회사, 가족 등 뭐 하나 말해 준 적이 없다'로 시작한 한 아이(고3 최현지)의 가족 이야기는 굽이굽이 아리랑 고개다.

내가 '엄청 무서워하는' 아빠, '나를 낳고 100일도 채 되기 전에 이혼'한 엄마,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18년 동안 며칠 전 처음으로 들었'던 나, 돈이 없어 겨우 500원짜리 참외 하나를 사서는 손녀에게 기어이 먹이려는 할머니에게 "누가 이딴 거 먹고 싶다드나? 할머니나 먹어라" 하고는 '참외를 바닥에 던져버리고 돌아' 온 적도 있는 '나', 그래서 아빠가 너무 미웠던 '나'……(181~184쪽). 나로서는 감당이 좀 안 되는 고백이다. 그럼 이상석은 어떤가?  
 
글은 어느덧 마음에 맺힌 한을 풀어주는 구실도 하게 된다. 글의 힘이다. (현지는) 이 글을 쓰는데도 며칠이 걸렸다고 한다. 쓰는 동안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아버지를 사랑할 마음이 굳어져서 참 좋더란다. 쓰고 지우고 다시 쓰며 아버지를 생각했다고. 다 쓰고 나면 그만 속이 후련해지더라고. (186쪽)
 
그 뿐인가. 이 글을 인연으로 이상석과 '현지'는 둘도 없는 사제지간이 되어버렸다니, 언제부턴가 아이들의 속살 이야기를 듣는 기회 자체가 사라져버린 나로선 그저 찬탄만 나올 뿐이다.
 
현지는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지금 병원에 근무하고 있다. 지난봄에는 내가 하는 덕담을 들으며 결혼도 했다. 신랑은 영화배우처럼 멋진 소방대원이다. 결혼식 날 현지 아버지와 인사를 했다. 작은 키, 참한 얼굴이 착해빠진 상이다. 딸내미(가 보낸 아빠 비난) 문자 폭탄에 눈물 쏟을 양반이겠구먼 싶어서 웃음이 났다. (186쪽)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볼 줄 아는 이가 시인이다"

'식구 이야기' 다음으로는 이웃의 삶도 '마음의 눈으로' 찬찬히 보고 그것을 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상석은 진작 말해 두었었다. "글은 말에서 나왔고 말은 자기 삶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삶이 말이 되고 말이 글이 된다'는 것이다. 좋은 글을 쓰자면 삶이 풍부하고 알차야 한다." (19쪽) 또 있다.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볼 줄 아는 이가 시인이다."(108쪽)
  
그럼 '남이 미처 보지 못한 것'을 '마음의 눈'으로 발견한 한 학생의 글(〈생선장수 아주머니〉, 고2 김명수)이 어떠한지 한 번 보기로 하자.
 
집으로 가는 길/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져 간다./ 늘 다니던 시장터 옆 작은 골목/ 변함없이 골목 들머리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 생선 장수 아주머니./ 늦은 저녁인지 파리가 날아다니는/ 생선 대가리 옆에는/ 양푼이 한 가득 비빈 밥이 있다/ 흰머리가 희끗희끗 보이는 파마머리에/ 키가 조그마한 아주머니가/ 주름투성이 투박한 손에 낡은 칼을 들고/ 생선대가리를 쳐댄다. (……) (2005) (108~109쪽)
 
이 같이 리얼리즘에 빛나는 시를 이상석은 어떻게 보고 또 아이들에게는 어떻게 소개했을까?
 
참 자세히도 봤다. 생선전 앞에 대놓고 붙어 서서 지켜볼 수는 없었을 것이고, 어쩌면 그 전 앞을 몇 번이나 오락가락 했을지 모르겠다. 그냥 겉모습만 살핀 것이 아니다. 그 눈길에 애잔한 아픔이 담겨 있다. 마음의 눈으로 대상의 속을 느끼고 있구나. (……) (109~110쪽)
 
또한 그는 명수의 글에서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과 '밀레를 흠모했다는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을 떠올렸다는 것인데, 그가 발견한 '세 작품이 서로 통한' 공통점은 세 가지다.
 
① 모두 가난한 사람의 삶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
② 그들은 성실히 일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
③ 고단하고 서럽게 이승을 살아내고 있을지 모르나 절망하거나 나약하지 않다는 것.(113쪽)
 
이는 이상석의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그것은 더불어 사는 세상, 성실히 일하는 사람의 진실과 아름다움, 힘들더라도 절망하지 않는 삶이다. 

"철창 없는 감옥을 누가 만들었는가? 우리가 변하지 않아서이다"

나는 앞에서 우리 시대의 '붕괴' 되어가는 교육 현장에 대해 말했다. 학교는 교육 본래의 자리를 잃어가고, 교사들은 절망하며, 학생들 또한 행복하지 않은 현실을 생각하며 말이다. 그러나 '땅에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선다'고 했다. 내가 <지금, 여기, 나를 쓰다>에 등장하는 교사 이상석, 그리고 그와 글쓰기 공부를 함께 해온 학생들을 만나는 동안 떠올린 금언이다. 다음 시를 보라.
 
우리 반 뒤 게시판이 있다
그 게시판에는 공부 잘 하라는 교훈만 가득하다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일까?

초등학교 때의 꿈은 잊은 지 오래다
오직 수치관계로 따지는 학생 훈련이
슬프다.

철창 없는 감옥을 누가 만들었는가?
우리가 변하지 않아서이다.
우리가 미천해서이다.
왜 우리는 변하지 않고 머물고 안주했는가?
철창이 없어서이겠지

비 오는 날 우울하고
밝은 날 활짝 핀 꽃은 우리가 아니다
아니 우리는 우리를 잊었다.
(2007)(〈학교생활이 슬플 때〉, 고1 한준엽), (208쪽)
 
'철창 없는 감옥'으로서의 학교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러하기에, 이 같은 철학적 사유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지만 이에 대한 이상석의 말을 듣는 것으로 우리의 이야기는 마감토록 하자.
 
학교생활의 절망을 말한 이 시를 두고 나는 오히려 희망을 갖는다. '우리는 우리를 잊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래야 우리 본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 이런 시를 쓰는 친구가 있는 한 우리는 희망을 버릴 수 없다. (209쪽)
 
[알림]

글쓰기를 통해 아이들과 속 깊이 만나고 그들의 참된 성장을 도와 온 교사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이가 있다면 이상석과 교사 시인 조향미가 함께 여는 오프라인 '글쓰기 특강'에 관심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교사 시인 조향미와 이상석이 함께 여는 <글쓰기 특강> 포스터
 교사 시인 조향미와 이상석이 함께 여는 <글쓰기 특강> 포스터
ⓒ 양철북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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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나를 쓰다 - 이상석의 글쓰기 수업

이상석 지음, 양철북(2019)


태그:#이상석, #조향미, #윤지형, #시인의 교실,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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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오랫동안 고교 교사로 일했다. <교사를 위한 변명-전교조 스무해의 비망록>, <윤지형의 교사탐구 시리즈>, <선생님과 함께 읽는 이상>, <인간의 교사로 살다> 등 몇 권의 책을 펴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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