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15 09:03최종 업데이트 19.04.15 16:24

외삼촌 징병 환송연 사진 외삼촌 문용상이 일본에 징병갈 때 찍은 단체사진. 뒷줄 오른쪽 세번째가 양공순 ⓒ 박만순


캄캄한 선실 안에는 여러 사람이 내뿜는 땀 냄새와 구토한 음식물로 인한 시큼한 냄새가 겹치면서 악취가 진동했다. 하지만 배 안에 있는 이들은 얼굴만 찡그릴 뿐 선실 안의 불결한 환경을 항의할 수는 없었다. 왜냐면 일본으로 가는 밀항선을 탔기 때문이다.

출렁이는 파도 때문에 통통배는 심하게 울렸다. "욱" 하며 젊은 여성이 토하기 시작했다. "쫌 참지, 토하면 어떻게 해요!" 하지만 그 여성은 연신 토하는 소리를 냈다. 물론 먹은 게 별로 없어 음식물을 많이 토하지는 않았지만, 냄새만큼은 선실 안에 진동했다.


강원도에서 군 생활을 마친 양남호(당시 26세)도 고향 제주에서의 생계가 막막하자 밀항선을 탔다. 그는 원래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성격이라 토하는 여성에게 싫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코를 쥐고만 있었다. 1968년 9월 부산에서 출발해 밀항하던 그날도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날이었다. 그런데 작은 선실 안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있었으니 더위와 악취는 참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통통배는 3일을 항해했다. 새벽이 되니 하늘이 희뿌옇졌지만, 현재 위치를 종잡을 수 없었다.

"통통통" "통 탁...." 지하 선실로 내려 온 선장이 황급히 외쳤다. "큰일 났소. 기름이 떨어졌소" 긴급 상황이 발생했다. 중간에 접선하기로 한 이와 약속이 어그러지면서, 몇 시간을 더 항해하다 보니 기름이 떨어진 것이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아이고" 하는 탄식 소리가 절로 났다. 어느 누구도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잠시 후 선장이 외쳤다. "젊은 사람들은 갑판 위로 올라오시오." 양남호를 비롯한 십여 명의 청년들이 갑판 위로 올라왔다. "비상수단을 쓰는 수밖에 없소. 여러분들이 헤엄쳐서 저 섬에 있는 바위에 밧줄을 묶어주었으면 하오." 배와 바위 사이에 밧줄을 연결하면, 밧줄을 붙잡고 섬으로 이동한다는 계획이었다. 양남호는 다른 이들과 함께 옷을 훌훌 벗고 밧줄을 한 손에 쥐고 헤엄치기 시작했다.

죽기 살기로

십여 명의 청년들이 죽기 살기로 헤엄쳤다. 때 아닌 '유격훈련'을 하는 셈이다. 약 50미터를 헤엄쳐서 간신히 섬에 도착했다. 바위에 밧줄을 단단히 묶고 선장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묶었습니다!" 이윽고 선실에 남아 있는 이들이 밧줄을 잡고 섬으로 모두 건너왔다.

몇 집 안 되는 자그마한 섬이었지만, 수상한 외지인들이 나타나자 신고체계는 신속하게 가동되었다. 잠시 후 육지에서 경찰들이 경비정을 타고 나타났다. "모두 여기 타시오." 밀항자들이 전부 경비정에 타자, 경비정은 '쌩'하고 달렸다. 약 15분을 달려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下關)에 있는 '출입국관리소'에 도착했다. 심사를 하는 데 1주일이 걸렸다.

'밀항죄'가 적용되어 시모노세키 형무소에 구금되었다. 돈을 벌 수 있다는 부푼 꿈을 안고 밀항선을 탔던 양남호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하지만 그가 여기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도 없었다. 묵묵히 인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2개월의 형무소 생활을 하니 이번에는 나가사키현으로 이송되었다. 아침에 출발해 전철을 탔는데, 이들이 오무라수용소에 도착한 것은 저녁때였다.

오무라수용소는 징벌 성격의 형무소가 아니었다. 불법으로 밀항한 이들을 일시적으로 수용했다가, 어느 정도 인원이 차면 자국(自國)으로 귀환시키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수용소 내의 환경이 형무소와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1개 방에 5명씩 수용되었고, 10개 방을 묶어 1개 동으로 관리했다. 이 수용소에는 총 10개동이 있었으니 총 인원이 500명이나 되었다.

양남호는 수용소에 도착한 지 얼마 안되어 1개 동의 수용소자치회 총무에 선임되었다. 실내체육관에서 탁구를 치는데 자치회장이 "이놈아 운동 잘 하네"하면서 총무를 하라고 했던 것이다. 수용소 내에서의 총무 역할은 다양했다. 50명의 생활 형편을 일일이 챙기고, 개선해야 될 내용을 수용소에 건의하기도 했다.

수용소와 막걸리

양남호는 PX에서 소화제를 다량으로 구매했다. 배급품으로 나온 식빵에 소화제와 물을 섞어 잘 갠다. 그런 후에 내용물을 신문지에 싸서 양철통에 담아 눌러 놓으면 발효가 되어 누룩이 된다. 그런 연후에 누룩을 화장실에 걸어서 건조시킨다. 건조된 누룩을 잘게 부수면 가루가 된다. 이 가루와 밥을 따듯한 물에 넣어 2~3일간 보관하면 막걸리가 된다.

1주일 걸려 만든 막걸리를 큰 통에 담아 10개 방에 나눠주어 막걸리 파티를 열었다. 오무라수용소가 생긴 이래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막걸리 제조와 파티는 수용소자치회에서 진행한 것이고, 여기서 실제 일은 총무를 맡고 있던 양남호가 거의 도맡아 했다.

수용소 생활이란 것이 암울한 것이긴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아니 가급적이면 즐겁게 지내려 양남호는 애를 썼다. 수용소에서 나오는 물자와 식사에서 10%를 적립해, 수용소 내의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일에 썼다. 즉, 일본에 친지와 연고가 없는 사람들은 수용소 내에 생필품이나 음식을 사입(私入)시키기가 어렵다. 이들은 수용소 내에서도 빈한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이들에게 음식이나 담배, 내복 등을 적립기금에서 무료로 지급한 것이다. 말 그대로 생활공동체를 꿈꾸고 실천한 것이다.

또한 그는 자치회 총무를 하면서 매점 일을 보기도 했는데, 매점이 5시면 폐점하는 바람에 당시 유행했던 권투경기를 볼 수 없었다. 당시 유명한 한국 권투 선수로는 유제두(1948~)가 있었다. 그의 경기를 볼 수 없자 화가 나서 문을 부수기도 했다. 그 일로 양남호는 독방에 수용되었다.

생활력이 누구보다 강했던 그는 매점 일로 번 돈으로 '브라더미싱'을 구매했다. 브라더미싱을 이용해 번 돈은 귀국 교통비용에 보탰다. 오무라수용소 생활 8개월 만의 일이다.

시모노세키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지만 꿈에 그리던 고향 제주도로 가는 길이 평탄하게 열리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대한민국에서 일본으로 밀항했다는 죄목으로 부산시 대신동에 있던 부산형무소에 구금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재판결과가 다행히 집행유예로 나왔다.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이 나온 것이다.

양남호가 일본 밀항 시도를 하다 형무소→수용소→형무소를 전전긍긍한 이유는 무엇일까? 돈 벌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경제적으로 곤궁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극도로 곤궁했던 한라산 생활
 

식량 은닉동굴 어머니 문임생이 4.3때 양식을 은닉시켜 놓았던 굴 ⓒ 박만순

 
제주읍 오라리에 불이 났다. 군인들이 계획적으로 불을 지른 것이다. 모든 집이 타버리자 주민들은 한라산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양남호 가족도 살기 위해 한라산행을 선택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아버지, 어머니와 양남호가 그 대열에 끼였다.

입산한 지 3일 만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양남호는 그 무리에서 빠졌다. 아버지는 "나는 젊어서 내려가도(자수해도) 처벌 받게 된다"며 처자식을 데리고 한라산 정상을 향해 올라갔던 것이다. 이들은 용진각 아래 있는 등버새기굴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이미 오라리 연미마을 사람 20여 명이 있었다.

한겨울인 1948년 12월의 일이다. 한겨울에 한라산에 먹을 것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동굴에 있던 사람들이 교대로 마을에 몰래 내려가 집에 숨겨 놓은 양식을 가져왔다. 양남호 어머니 문임생도 집 근처 자그마한 굴에 숨겨 놓았던 양식을 가져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일을 했다.

하지만 이것도 임시방편이 될 수밖에 없었다. 3개월의 산 생활은 최악이었다. 토벌대의 "자수하면 살려 준다"는 말을 철석처럼 믿고, 등버새기굴에 있던 연미마을 사람들은 흰 수건을 나무에 매달고 한라산을 내려왔다. 하지만 이들의 자유는 쉽게 보장되지 않았다. 1934년 일제에 의해 설립된 동양척식주식회사 제주주정공장에 구금된 것이다.

현재 제주시 건입동에 있던 주정공장은 제주도에서 생산되는 고구마를 원료로 술을 빚는 곳이다. 해방 후에는 조선인에게 넘어가 운영되던 이 공장이 4.3때는 자수한 제주도민을 구금해 심사하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이곳은 1949년 봄에 자수한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부상자와 임산부도 같이 있었다. 혹독한 고문 후유증과 열악한 수용환경 때문에 이곳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도 있었으며, 애를 낳는 경우도 있었다.

양남호는 이곳에서 밀수입한 쌀로 가마솥에 찐 밀밥을 먹기도 했다. 고역이었던 것은 주정공장에서 이발충(기계충)에 걸린 것이다. 곶감보시를 몇 개월 쓰고 있다 보니 걸린 것이다. 곶감처럼 생긴 모자인 곶감보시는 당시 제주에서 쓰던 방언이다. 문임생과 양남호 모자는 주정공장에 구금된 지 20일 만에 석방되었지만 아버지 양공순(1918년생)은 그렇지 못했다. 양공순이 주정공장에서 땔감 작업하러 나왔다가 아내 문임생을 한 번 만나 가족의 안위를 걱정한 것이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남편이 죽은 줄도 모른 채

양공순은 특별한 활동을 한 것도 없이,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 구속되었다. 1949년 9월 대전형무소에서 엽서가 왔다. "나는 대전에 와, 잘 있고 조만간 석방되니 걱정 마라"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초 대한민국 군·경이 후퇴하면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재소자를 전부 학살한 것이다. 이 죽음의 대열에 양공순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양공순의 사촌 형인 양상순도 저승길에 합류했다.

4.3 사건 때 제주에서는 양공순의 또 다른 사촌 형 양덕순이 행방불명되었다. 행방불명이란 것이 언제, 어디에서 학살되었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전쟁의 상흔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양덕순의 처 서○○도 한라산에서 토벌대에 의해 총살당했으며, 그의 딸 양○○(7~8세)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임에도 문임생은 자신의 남편이 죽은 사실을 정확히는 몰랐다. 그녀는 1950~60년대 내내 점집을 순례했다. "제 남편이 살아 있을까요?"라고 물으면 무당의 답변은 그때그때 달랐다. 그러다 보니 점집을 더 다닐 수밖에...

그러다 어느 점집에서 "밥뚜껑에 이슬이 맺히면 살아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문임생은 아침마다 따듯한 밥을 해서 밥공기에 담아 뚜껑을 덮었다. 그러니 당연히 뚜껑에 김이 서릴 수밖에. 그렇게 남편이 살아 있다는 것으로 일부러 믿고 산 것이 1979년까지 였다. 그런데 그해 4.3 때 육지로 끌려간 이들 중 생존자들이 "대전형무소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고 말을 전했다. 이 때부터 양남호 어머니 문임생은 남편의 가묘를 조성하고 제사를 지냈다.

폭삭 주저앉은 집안

아버지가 대전에서 학살당한 후 그렇지 않아도 어려웠던 양남호 집안은 폭삭 주저앉았다. 어머니 문임생은 일년 내내 보리농사에 매달렸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유일한 자식인 양남호가 학교에 다니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주말마다 한라산에 올라갔다. 나무를 해 오일장에 내다 팔기 위해서였다. 방학 때는 매일 한라산에 올라갔다. 이렇게 시작된 나무하기는 고등학교까지 계속되었다. 겨울에는 눈 쌓인 한라산에 올라가기 위해, 칡넝쿨로 신발을 감쌌다. 그런데 한라산에서 어린 양남호와 친구들이 무서워했던 것이 있었으니, 이른바 산감(山監)이다.

영림서(營林署) 직원이었던 산감은 공무원이었는데, 경찰보다 더 무서운 존재였다. 벌목 죄로 이들에게 걸리면 무자비하게 구타를 당했고, 벌금까지 물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나무를 하다가도 툭하면 도망가기 일쑤였다.

오라국민학교를 졸업한 그는 오현중학교에 입학했다. 2학년 때 이모가 송아지를 사주었다. 송아지는 양남호 집안의 귀한 살림 밑천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그의 노력과 이모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학교 다니는 것이 만만치만은 않았다. 수업료를 낼 때마다 좌불안석이었다.

당시 수업료가 한 달에 260원이었는데, 어느 때인가 집안의 돈을 탈탈 긁어모은 것이 60원밖에 되지 않았다. 이 돈을 학교에 갖다 냈지만 부족한 200원은 해결할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담임선생 김○○이 부족분 수업료를 대신 내주었다. 양남호(77, 제주시 오라3동)는 "그때 담임선생님의 은덕을 잊을 수가 없어요"라고 회고한다.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군에 입대했다.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서화리에서 자대생활을 했는데, 땅딸한 그는 모든 운동에 천부적 재능을 갖고 있어 축구, 배구 등 운동 시합마다 차출되었다. 제대 후에 고향 제주에서 먹고 살기 위해 애를 썼지만 허사였다. 그런 와중에 누가 "일본에 가면 돈을 많이 벌수 있다더라"라는 말에 현혹되어 밀항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4.3 때 물건을 아직 간직하는 이유
 

아버지 가묘 부친 양공순의 가묘 앞에 선 양남호 ⓒ 박만순

 
부산형무소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고향으로 온 양남호는 농촌진흥청 제주시험장에 입사했다. 일용직으로 일하다가 집행유예 기간이 만료되자 상용직으로 채용되었다. 관리과에서 경리, 서무 일을 보았다. 하지만 이 직장도 생계를 안정적으로 보장해주지는 못했다. 그는 1978년부터 감귤농사를 시작했고, 1988년에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하우스 감귤농사에 도전했다.

부지런히 일한 덕분에 자식 셋을 모두 대학까지 가르치고, 2019년 현재 제주도에서 유명한 감귤농이 되었다. 하우스 2천 평, 노지 7천 평 규모의 농사를 짓는 그는 제주도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유명한 감귤농군이다.

장남은 한림대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고, 차남은 경희대 법대를 나와 충남 당진에서 노무사를 하고 있다. 막내는 제주대를 나와 사회생활을 하다가 현재는 아버지를 도와 감귤농사를 짓고 있다.
 

4.3때 사용한 그릇 4.3때 한라산에서 양남호 가족이 사용한 그릇 ⓒ 박만순

  

수용소에서의 귀국 후 사진 오무라수용소에서 귀국한 후 부산에서 단체촬영. 앞줄 맨 오른쪽이 양남호 ⓒ 박만순

 
남극에 갖다 놓아도 얼어 죽지 않을 양남호는 생활력만 강한 것이 아니다. 과거의 기억을 보존하고, 4.3을 공유하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이다. 그의 집에는 4.3 때 한라산에서 사용하던 밥그릇, 국그릇 등이 아직도 보관되어 있다. 또한 아버지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사용하던 책상을 여전히 쓰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무라수용소와 귀국할 때의 사진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는 4.3 때 살던 집 근처에 아버지 가묘를 1979년에 조성해 2019년 현재까지 잘 유지하고 있다. 그가 이런 아버지와 4.3의 유품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지 않는가? 양남호가 현재 보관하고 있는 아버지의 유품과 오무라수용소에서의 사진이 '4.3 평화 기념관'이나 이후 대전에 조성될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기념관'에 전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역사의 기억, 젊은 세대와의 소통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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