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0월 유신을 알리는 1972년 10월 18일 매일경제신문 1면
▲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 10월 유신을 알리는 1972년 10월 18일 매일경제신문 1면
ⓒ 매일경제신문

관련사진보기

압제에는 저항이 따른다.

압제에도 저항하지 못하면 노예가 된다. 압제에 순응하는 노예는 스스로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유신쿠데타가 발생한 지 1년 만인 73년 10월 2일 서울문리대생 250여 명은 교내 4ㆍ19기념탑 앞에 모여 비상총회를 열고 자유민주체제 확립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낭독한 후 시위를 벌였다. '김대중 납치사건'을 계기로 유신선포 이후 최초로 학생들이 '유신체제 비판불용'이라는 금기를 깨고 시위에 나선 것이다. 마침내 반유신 투쟁의 횃불이 타올랐다.

이날 학생들은 △ 정보ㆍ파쇼통치 즉각 중지와 자유민주체제 확립 △ 대일경제예속관계 즉각 중지 및 민족자립경제 확립, 국민생존권 보장 △ 중앙정보부 즉각 해체와 김대중 납치사건 진상규명 △ 기성 정치인과 언론인의 각성 촉구 등 4개항을 결의하고, 2시간여 동안 구호를 외치며 교내에서 시위를 벌였다.

유신체제 출범 이후 패배주의와 냉소주의에 빠져 있던 학생운동권 및 재야운동권을 일깨운 이날의 시위는 전국 대학의 유신철폐 시위, 재야인사들의 시국선언문 발표, 신문사와 방송국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으로 이어지는 반독재투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10월 유신 공포 3년 기념식. 1972년 10월, 유신헌법이 공포되며 엄숙함의 시대가 열렸다.
 10월 유신 공포 3년 기념식. 1972년 10월, 유신헌법이 공포되며 엄숙함의 시대가 열렸다.
ⓒ Wikimedia Commons

관련사진보기

서울문리대에서 점화된 학생시위는 11월 말에서 12월 초에 걸쳐 전국대학으로 확산되면서 일부 대학에서는 가두 진출로 격화되었고, 투석전과 최루탄의 공방이 계속되는 가운데 고등학교까지 시위가 확대되었다. 박정희 정부가 시위 주동학생들을 대거 구속ㆍ제적하면서 이들의 석방과 학원의 자유가 새로운 이슈로 등장하고, 정치적으로는 정보파쇼 통치와 유신철폐가 여전히 핵심 이슈가 되었다.

학생들의 시위에 각성한 일부 기자들은 언론자유수호 선언투쟁에 나서고, 노동자들은 노조 결성의 자유와 임금현실화를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서울대 법대 근대법학 100주년 기념관에 설치된 최종길 교수 추모 부조.
▲ 서울대 법대 근대법학 100주년 기념관에 설치된 최종길 교수 추모 부조. 서울대 법대 근대법학 100주년 기념관에 설치된 최종길 교수 추모 부조.
ⓒ 명예회복추진위

관련사진보기

서울대 법대에 재직 중이던 최종길 교수가 10월 16일 중앙정보부에 출두했다가 간첩혐의로 구속되어 7층 심문실에서 창밖으로 투신자살했다고 발표되면서 '김대중 납치사건'과 함께 '유신독재의 마각'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의혹사건으로, 대학과 재야인사들의 진상규명 운동이 전개되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이듬해 추모미사에서 공개적으로 이 사건을 권력의 개입에 의한 살해라고 주장하였다.

같은 해 12월 24일에는 함석헌ㆍ장준하ㆍ천관우ㆍ계훈제ㆍ백기완 등 각계의 민주인사들이 서울YMCA에서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족하고 유신헌법 철폐를 위한 개헌청원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개헌청원운동은 불과 10일 만에 30여만 명의 서명을 받는 등 놀라운 속도로 번져나갔다. 그동안 움츠렸던 각계 각층에서 민주화의 대열에 참여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이에 당황한 박정희 대통령은 12월 29일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발표한 담화에서 "최근 일부 지각없는 인사들 중에 유신체제를 뒤집어엎고 사회혼란을 조성하려는 불순한 움직임이 있다"면서 개헌서명을 즉각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국민의 여론을 수렴하기보다 여전히 폭압적인 태도였다.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
▲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

관련사진보기

박대통령의 반협박적인 담화에도 불구하고 개헌서명 운동은 날로 확산되어 갔다. 개헌청원운동 본부의 장준하 대변인은 박대통령의 담화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고 "개헌청원운동은 정부 당국자가 주장하는 바 우리 백성들이 정부당국과 대화를 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채택한 것"이라 전제하면서 "당국은 이 합리적이며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운동을 막는 우를 범하지 말라"면서 청원운동을 계속하겠다고 맞섰다.

전국 주요 대학이 반유신 시위에 나선 가운데 11월 15일 단식농성을 하던 한국신학대학생 90여 명은 삭발농성에 들어갔으며, 한국기자협회는 11월 29일 언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객관적 사실을 충실히 보도하기로 결의했다. 기협회장단과 한국신문편집인협회도 각각 결의문을 채택하고 "민주언론의 창달을 위해 71년 5월에 채택한 언론자유수호 행동강령을 준수할 것과 최근 일선기자들이 각 사 단위로 혹은 기자협회를 통해 밝힌 언론자유수호를 위한 결의는 당연하고 순수한 것이므로 이를 뒷받침" 할 것을 다짐했다.

12월 13ㆍ14 양일 간에는 전국대학 총학장회의에서도 결의문을 통해 "우리 총학장 일동은 교수 전원의 협조를 얻어 자율을 바탕으로 학원의 정상화, 면학분위기의 조성이 조속한 시일 내에 이룩되도록 총력을 기울인다"고 밝혔다. 우회적이지만 학생들의 반유신 투쟁을 지지한 것이다. 

특히 함석헌ㆍ김재준ㆍ천관우ㆍ이병린 등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표와 윤보선ㆍ김수환ㆍ유진오ㆍ백낙준ㆍ이희승ㆍ이인ㆍ한경직ㆍ김관석ㆍ이정규 등 사회 원로들은 12월 13일 서울 YMCA회의실에 모여 시국간담회를 갖고 "현재의 시국은 민주주의체제를 근본부터 또 제도적으로 회복하여 국민의 자유를 소생시키지 않으면 민족적 위기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보아 이에 대한 대통령의 조처를 기대한다"면서, 정상적인 민주주의체제로의 회복을 촉구했다.

이들은 적어도 ①국민의 기본권을 철저히 보장할 것 ②3권분립체제를 재확립할 것 ③선거에 의한 평화적정권교체의 길을 열 것 등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왼쪽부터 함석헌 선생, 문익환 목사, 예춘호 선생, 김승훈 신부, 권호경 목사.
 왼쪽부터 함석헌 선생, 문익환 목사, 예춘호 선생, 김승훈 신부, 권호경 목사.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해가 바뀐 74년 1월 7일에는 공화당의 초대 총재와 당의장을 지낸 정구영과 전 사무총장 예춘호가 공화당을 탈당했다. 정구영은 이날 성명을 통해 "나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를 구현코자 민주공화당의 창당에 참여하여 초대 총재가 되었으나, 오늘의 사태는 당원으로서 소신을 밝힐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마저 잃은 채 조국의 안위는 백척간두에 서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므로 오랜 자책 끝에 드디어 당과 결별하기로 작정했다"고 밝히고 개헌서명운동에 참여했다. 집권당의 근간이 무너진 사태였다. 

같은 날 이희승ㆍ이헌구ㆍ김광섭ㆍ박두진 등 문학인 61명은, ①헌법개정을 청원하는 것은 국민의 당연한 권리이며 우리는 이 권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②국민의 기본적 인권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며 빈부격차가 해소되고 물량위주 대외 의존적 근대화정책이 근본적으로 시정되어야 한다는 등 4개항의 결의문에 서명, 발표했다. 

이들은 "민족의 존망 자체가 위태로운 이 어려운 시기를 맞아 문학인들이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고 밝히고, "국민의 편에 서서 용기와 신념을 갖고 민주주의와 사회정의의 성취를 위해 싸우는 모든 양심적인 지식인들과 더불어 어떠한 가시밭길도 헤쳐나갈 것을 선언한다"고 다짐했다. 서명한 문인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희승ㆍ이헌구ㆍ김광섭ㆍ김정한ㆍ오영수ㆍ박두진ㆍ강용준ㆍ강태열ㆍ고 은ㆍ구중서ㆍ김광헙ㆍ김국태ㆍ김문수ㆍ김병걸ㆍ김병익ㆍ김승옥ㆍ김용성ㆍ김원일ㆍ김충식ㆍ김종해ㆍ김창범ㆍ남정현ㆍ박경석ㆍ박봉우ㆍ박용숙ㆍ박태순ㆍ방영웅ㆍ백승철ㆍ신경림ㆍ신기선ㆍ신동문ㆍ신동한ㆍ신상웅ㆍ양문길ㆍ염무웅ㆍ오인문ㆍ오상원ㆍ유현종ㆍ윤정규ㆍ이문구ㆍ이성부ㆍ이시영ㆍ이제하ㆍ인태성ㆍ임헌영ㆍ장용학ㆍ정현종ㆍ조선작ㆍ조태일ㆍ조해일ㆍ최 민ㆍ황명걸ㆍ안수길ㆍ김지하ㆍ박연희ㆍ백낙청ㆍ송 영ㆍ이호철ㆍ천승세ㆍ한남철ㆍ황석영 등(이상 61명).

박정희는 유신쿠데타 1년여 만에 총체적인 국민의 저항에 직면하였다. 하지만 그는 더욱 강경한 태도로 국민을 억압하고 폭압체제 유지에 권력을 동원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10월 유신, #유신타도, #반유신투쟁, #최종길, #김대중납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