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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이용자와 도서관 사서가 함께 쓴 도서관 역사 여행기입니다. 대한제국부터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역사 속 도서관,  도서관 속 역사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편집자말]
①편에서 이어집니다.

중앙대학교는 1959년 10월 23일 당시 국내 최대 규모로 개관한 도서관 이름을 '우남기념도서관'으로 명명한다. 중앙대학교 도서관이 우남기념도서관으로 이름 지어진 사정은 이렇다. 

중앙대학교는 1916년 설립된 중앙유치원에서 출발했다(중앙대는 운영 기틀이 마련된 1918년을 학교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다). 중앙유치원은 1928년 중앙보육학교로 승격된 뒤 1935년 4월 임영신이 학교를 인수한다.

정동에 있던 중앙보육학교는 1936년 명수대(明水臺)라고 불린 지금의 흑석동에 학교 부지 1만 1천 평을 구입, 건물을 지어 1938년 이전한다. 중앙보육학교는 1941년 경성중앙유치원, 1945년 중앙여자전문학교, 1947년 4년제 중앙여자대학을 거쳐, 1948년 남녀 공학으로 전환하며 학교 이름을 '중앙대학'으로 바꾼다. 중앙대학은 한국전쟁 기간인 1953년 2월 28일 종합대학으로 승격했다. 

'우남기념도서관'의 탄생 
 
승당 임영신 동상 1959년 10월 23일 승당 임영신 회갑을 맞아 제작한 동상. 살아있는 사람의 동상 제작은 흔치 않은데 이승만도, 임영신도 살아 있을 때 동상을 만들었다. 이 동상은 건립 당시 도서관 앞에 있다가 지금은 영신관 앞으로 옮겼다.
▲ 승당 임영신 동상 1959년 10월 23일 승당 임영신 회갑을 맞아 제작한 동상. 살아있는 사람의 동상 제작은 흔치 않은데 이승만도, 임영신도 살아 있을 때 동상을 만들었다. 이 동상은 건립 당시 도서관 앞에 있다가 지금은 영신관 앞으로 옮겼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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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학교는 1959년 10월 23일 학교 설립자이자 당시 중앙대 총장인 임영신 박사 회갑을 기념해 지하 1층, 지상 8층, 연건평 4700평 규모 도서관을 개관한다. 1958년 10월 25일 착공, 1년 만에 개관한 이 도서관은 건축가 차경순이 설계했고 공사비는 3억 환이 들었다. 임영신 총장 회갑 기념으로 지은 도서관이지만, 임영신 총장이 이승만 대통령의 애국심을 길이 현창 하고자 '우남기념도서관'이라는 현판을 달아 개관했다.

이승만 비서 출신으로 이승만 내각 첫 여성 장관을 역임한 임영신은 미국 유학 시절 이승만 박사를 만나 그에게 청혼을 받을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임영신 박사의 호 승당(承堂) 또한 이승만 박사의 이름에서 '승'(承)자를 따서 지은 것이라고.

이승만 초대 내각 중 임영신의 상공부 장관 임명은 자질 부족을 이유로 비판이 많았다. 미 국무성은 그녀가 장관으로 재직하는 한 산업 복구 자금을 제공하지 않을 거라는 입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임영신은 장관 재직 시절 공금 유용 및 횡령, 밀수업체와 적산 중개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1949년 6월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정치적 동반자로 오랫동안 함께 한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 되면, 중앙대학교 도서관이 왜 '우남기념도서관'으로 명명됐는지 알 수 있다. 더욱이 도서관을 짓던 1959년은 임영신이 부통령 출마를 준비하던 해다. 다음 해 2월 임영신은 부통령 출마 선언문에서 이승만을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세기의 영걸이신 이승만 박사를 광복된 조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모시어 오늘 4대에 이르게 된 것은 오로지 하늘이 우리 민족에게 내리신 특별하신 은혜요, 은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임영신은 도서관 이름까지 이승만에게 '헌정'하는 성의를 보이며 부통령 당선을 염원한 모양이다. 이런 정성에도 불구하고 1960년 3.15 부통령 선거에서 임영신은 겨우 9만여 표를 얻는 데 그쳤다. 

'의에 죽고 참에 산' 이는 누구인가
 
'의혈중앙'의 상징, 의혈탑 중앙대학교는 4.19 혁명에서 희생당한 6인 열사를 기리기 위해 1960년 9월 의혈탑을 세웠다. 4.19 혁명 때 목숨을 잃은 중앙대생은 고병래(상학 3), 김태년(약학 3), 서현무(법학 2), 송규석(정외 2), 전무영(신문 1), 지영헌(신문 1) 6명이다. 지금은 중앙도서관 앞에 있지만 처음 건립할 때는 영신관 앞에 세웠다.
▲ "의혈중앙"의 상징, 의혈탑 중앙대학교는 4.19 혁명에서 희생당한 6인 열사를 기리기 위해 1960년 9월 의혈탑을 세웠다. 4.19 혁명 때 목숨을 잃은 중앙대생은 고병래(상학 3), 김태년(약학 3), 서현무(법학 2), 송규석(정외 2), 전무영(신문 1), 지영헌(신문 1) 6명이다. 지금은 중앙도서관 앞에 있지만 처음 건립할 때는 영신관 앞에 세웠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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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기념도서관이 문을 연 지 불과 반년만에 4.19 혁명이 터지고 중앙대생 6명이나 희생되자, 학생들은 우남기념도서관 현판을 철거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대학 측과 심한 실랑이가 일자 타협책으로 '우남기념도서관' 현판을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중앙도서관'이라는 새로운 현판을 덧대게 됐다. 이것이 지금도 중앙대학교 중앙도서관 현판 아래 우남기념도서관 현판이 남아 있는 사연이다. 당시 우남기념도서관 현판 철거를 주도한 총학생회장 박명수는 훗날 중앙대학교 11대 총장이 된다.  

한편 "의(義)에 죽고 참에 살자"는 교훈을 내건 임영신은 4.19 혁명으로 수립된 장면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5.16 쿠데타로 박정희가 정권을 잡자 그녀는 '왜 나는 군사혁명을 지지하는가'라는 글을 발표하며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그녀는 민주공화당 창당 준비위원에 이름을 올렸고, 1966년에는 정일권 총리와 김종필 의장에게 중앙대학교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1972년 유신 선포 후 대통령을 뽑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겸 운영위원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 최초의 여성 장관, 중앙대학교 설립자이자 초대 총장. 여성 정치인과 교육자로서 그녀가 남긴 족적은 뚜렷하다. 그녀가 이승만 대통령과 '의'를 지키며 살았음도 알겠다. 다만 그녀가 추구한 길이 민주공화국 시대 정치인 또는 지식인의 '참'된 삶인지는 모르겠다. 

4.19 혁명 당시 교문 밖 진출을 만류하는 임영신을 뿌리치고 중앙대생은 한강을 건너 국회의사당과 경무대로 향한다. 4.19 혁명 과정에서 중앙대는 서울대 다음으로 많은 6명의 희생자를 냈다.

중앙대 도서관 앞 의혈탑과 6열사비는 '의에 죽고 참에 산'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주는 증거물이다. '의혈중앙'이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우남에게 헌정된 도서관에서 공부한 학생들이 4.19 혁명 과정에서 그를 몰아내는 선봉에 섰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 

이승만 시대의 도서관
 
중앙대학교 '중앙도서관' 현판 도서관 리모델링 후 '중앙도서관' 현판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지금도 학술정보원 출입구 위에 자리하고 있다. '중앙도서관'이라고 새겨진 나무 현판 아래에는 도서관의 원래 이름인 '우남기념도서관' 현판이 지금도 남아 있다.
▲ 중앙대학교 "중앙도서관" 현판 도서관 리모델링 후 "중앙도서관" 현판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지금도 학술정보원 출입구 위에 자리하고 있다. "중앙도서관"이라고 새겨진 나무 현판 아래에는 도서관의 원래 이름인 "우남기념도서관" 현판이 지금도 남아 있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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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시대 문자 해득률은 급격히 높아지고, 학교와 학생은 크게 늘었다. 1945년 22%에 불과했던 문자 해득률은 1959년 78%로 3.5배 가까이 상승했다. 1945년부터 1960년까지 초등학생 수는 2.6배, 중학생 수는 11배, 고등학생 수는 3배 이상 늘어났다. 특히 대학은 19개 대학 7819명에서 63개 대학 9만7819명으로 12배 이상 늘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가 안 되던 시절 이승만 정부는 1948년부터 1960년 사이 총예산 중 연평균 10% 정도를 교육 분야에 썼다. 학교와 학생 수가 크게 늘었지만 교사와 교육 자재, 교실은 부족해서 교육 여건은 좋지 않았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부터는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시작했다. 의무교육으로 성장한 세대가 1960년대와 1970년 '한강의 기적'을 이끈 세대가 된다. 1950년대를 거치며 대량으로 탄생한 한글 세대는 거대한 인적 자본을 형성해서 1960년대 이후 노동집약 산업과 중화학공업 노동력의 핵심이 됐다. 

정부 지원과 국민의 뜨거운 교육열이 결합한 결과지만, 이런 업적 때문에 이승만을 '교육 대통령'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박명림 교수는 "이승만의 실정(失政)과 업적이 4.19를 불렀다"라고 평가했다. 이승만 시대 교육 투자를 통해 성장한 민주주의 의식이 역설적으로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학교의 양적 증가에도 불구하고 공공도서관은 눈에 띄게 성장하지 않았다. 1948년부터 1958년까지 전국적으로 24개의 도서관이 늘어나 한 해 평균 2.18개의 도서관이 늘어났을 뿐이다.

대학 도서관의 사정은 어땠을까. 해방 이후 전문학교의 대학 승격이 추진되고 사립대학 신설이 크게 늘었다. 대다수 사립대학은 등록금에 의존해 재정난을 벗어나려 했기 때문에 학생 정원을 늘리고 등록금을 인상했다. 상당수가 농업에 종사하던 이 시절 소와 밭을 팔아 자녀 대학 등록금을 마련한다는 뜻으로 '우골탑'이라는 표현이 회자됐다. 

사립대학이 난립하고 대학의 부정부패가 심해지자 정부는 1955년 대학설치기준령을 공포했다. 건물, 땅, 체육장, 교직원, 도서 5가지 항목이 기준을 충족하지 않으면 대학을 통폐합하거나 학생 정원을 감축한다는 내용이었다. 사립대학의 집단 반발로 대학설치기준령은 무력화되지만 이 때문인지 1950년대 후반 중앙대를 비롯한 여러 사립대학이 잇달아 도서관을 짓기 시작한다. 

1958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장 오천석은 <대학교육의 위기>라는 글에서 도서와 실험실 설비 면에서 중·고등학교만도 못한 대학이 흔하고 대학의 심장부인 도서관을 제대로 갖춘 대학이 드물다고 지적했다. 한국전쟁 시기가 끼어 있지만 이승만 집권 시기는 '도서관의 암흑기'라 평할 만하다. 

미국 유학을 통해 도서관의 기능과 효과를 잘 알았을 '이승만 박사'가 이렇다 할 도서관 정책을 펴지 않은 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여건이 어려워서 도서관을 지을 겨를이 없었을까.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도 도서관을 운영한 그가 무소불위의 권좌에 오른 후에는 왜 도서관을 제대로 짓거나 운영하지 않았을까. 비슷한 시기 북한에서 김일성이 도서관을 적극적으로 늘려 갔음을 고려할 때 두 지도자의 도서관 정책은 대조적이다. 

이승만과 박정희
 
우남 이승만 1948년 이 나라 역사 처음으로 공화국을 수립해서 대통령 자리에 올랐을 때 이승만의 나이 이미 73세였다. 양녕대군 16대손으로 알려진 이승만은 평소 '왕손'(王孫), '나의 백성들', '과인(寡人)이' 같은 표현을 즐겨 썼다. 스스로를 공화국 시대 '대통령'보다 조선왕조의 법통을 이은 '왕'으로 인식했던 건 아닐까.
▲ 우남 이승만 1948년 이 나라 역사 처음으로 공화국을 수립해서 대통령 자리에 올랐을 때 이승만의 나이 이미 73세였다. 양녕대군 16대손으로 알려진 이승만은 평소 "왕손"(王孫), "나의 백성들", "과인(寡人)이" 같은 표현을 즐겨 썼다. 스스로를 공화국 시대 "대통령"보다 조선왕조의 법통을 이은 "왕"으로 인식했던 건 아닐까.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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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은 이승만과 박정희의 닮은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첫째, 2인자를 용납하지 않는 절대 권력을 추구했다. 둘째, 자유당과 민주공화당이라는 관제 정당을 창당해서 정권 유지에 활용했다. 셋째, 사사오입 개헌과 3선 개헌을 통해 영구집권을 시도했다. 넷째, 극단적인 반공 정책을 폈고 이를 권력 유지에 활용했다. 

둘의 차이점도 있는데, 첫째, 이승만은 반일 정책을 추구했지만 박정희는 친일 정책을 추구했다. 둘째, 박정희는 중앙정보부를 설치, 공작정치를 통해 통치했다. 셋째, 이승만은 부정을 저지르더라도 선거 제도를 유지했는데, 박정희는 유신 선포 후 직선제를 무력화시켰다. 넷째, 박정희는 이승만에 비해 언론과 군을 강력히 통제해서 철권통치를 했다.

유시민은 식민지에서 독립한 신생 국가는 역사적 대의명분, 경제적 효율성, 민주적 정당성 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정통성을 가질 수 있는데, 이승만 정부는 세 가지 중 단 하나도 충족하지 못한 정부라고 평했다. 

대한민국의 많은 부분은 해방 이후 분단과 한국전쟁 과정에서 그 기초가 놓였다. 이승만 대통령 재임 시절 단독정부 수립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자유시장 경제와 반공 체제 같은 대한민국의 국가 기본질서가 수립됐다. 그래서 이 중요한 시기 집권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아쉬움은 크게 남을 수밖에 없다. 

이승만, 그는 국부인가 국적인가
 
중앙대학교 학술정보원 중앙대학교 중앙도서관은 2009년 건축가이자 중앙대학교 교수인 김인철에 의해 현대적으로 리모델링됐다. 김인철 교수는 도서관 상부 외벽을 커튼월 방식으로 처리했다. 2014년부터는 '학술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 중앙대학교 학술정보원 중앙대학교 중앙도서관은 2009년 건축가이자 중앙대학교 교수인 김인철에 의해 현대적으로 리모델링됐다. 김인철 교수는 도서관 상부 외벽을 커튼월 방식으로 처리했다. 2014년부터는 "학술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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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 집권 말기 심산 김창숙은 이승만을 '독부'(獨夫)라 평했다. '독부'란 민심을 잃고 남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된 외로운 남자라는 뜻이다. 한때 '국부' 아니 '세기의 태양'으로까지 추앙받던 우남은 4.19 혁명 과정에서 '국가의 적'이 됐다. 1960년 고국을 떠난 그는 1965년 죽을 때까지 이 땅에 돌아오지 못한다. '국부'가 '국적'(國賊)으로 쫓겨나 '독부'로 죽은 것이다. 

우남기념도서관 현판 위에 새로운 현판을 세운 중앙대학교 중앙도서관은 2009년 김인철 교수에 의해 현대적으로 리모델링된다. 2014년 1월에는 '학술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꾼다. 59년 전 중앙대생들이 우남을 기린 도서관을 거부한 것처럼 그를 '기념'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그를 '기억' 해야 할 이유는 있다.

국가 수립 단계에서 '국부' 역할을 했어야 할 그가 결국 '국적'으로 이 나라를 떠났다는 것, 그것은 이승만 개인의 비극을 넘어 대한민국의 비극이기도 했다. 이형기 시인의 '낙화' 시 구절처럼, 우남이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간 뒷모습이 아름다운' 대통령이었다면 중앙대학교 도서관은 그를 기념하는 도서관이 됐을지도 모른다. 

이승만 집권 시기 사회 곳곳에 남아 있던 우상화의 흔적은 이제 찾기 어렵다. 도서관에 남아 있던 우남의 흔적도 모두 묻히고 사라졌다. 그 많던 우남의 흔적이 사라진 건 다행일까 불행일까. 

[중앙대학교 학술정보원]

- 주소 : 서울시 동작구 흑석로 84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이용시간 : 참고자료실 / 대출자료실 / 미디어실(평일 09:00 - 21:00, 토요일 09:00 - 15:00), 열람실 / 노트북열람실(05:00 - 23:00 또는 연중무휴), 시험과 방학기간은 이용시간 변경
- 휴관일 : 참고자료실 / 대출자료실 / 미디어실 : 법정공휴일, 개교기념일, 임시휴관일(일반 열람실은 연중 무휴)
- 이용자격 : 중앙대학교 학생 및 교수 
- 홈페이지 : https://library.cau.ac.kr/
- 전화 : 02-820-6195
- 운영기관 :  중앙대학교

덧붙이는 글 | 이승만 우상화와 중앙대학교 학술정보원 이야기를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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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사람사이에 조용히 부는 따스한 봄바람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 동물, 책을 좋아하는 고양이 집사입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가 지금은 소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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