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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이용자와 도서관 사서가 함께 쓴 도서관 역사 여행기입니다. 대한제국부터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역사 속 도서관,  도서관 속 역사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편집자말]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 출생. 양녕대군 16대손. 11차례 과거 응시와 낙방. 1894년 배재학당 입학. 협성회와 만민공동회, 독립협회에서 활동.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과 제국신문 창간에 참여해서 활동. 고종황제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돼 6년 수감. 미국에서 외교 활동과 유학 생활.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 학위,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 취득. 

하와이 이주 후 한인사회와 갈등. 상해에서 독립운동. '위임통치' 청원으로 임시정부 인사와 갈등 일으키다가 불신임받고 탄핵. 해방 이후 맥아더의 주선으로 미군 장교 복장으로 귀국. 좌우합작 반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주장.
 
초대 대통령 이승만 파리강화회의 후 이승만이 추진한 '위임통치' 청원은 이승만 탄핵으로 이어졌다. 특히 단재 신채호는 '이승만이 이완용이나 송병준보다 더 큰 역적'이라며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 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 먹으려 한다'고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을 격렬히 비판했다.
▲ 초대 대통령 이승만 파리강화회의 후 이승만이 추진한 "위임통치" 청원은 이승만 탄핵으로 이어졌다. 특히 단재 신채호는 "이승만이 이완용이나 송병준보다 더 큰 역적"이라며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 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 먹으려 한다"고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을 격렬히 비판했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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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동대문 갑에 단독 출마해 무투표 당선. 소집된 국회의원 중 최고령으로 국회의장 선출. 제헌헌법의 내각책임제 초안을 대통령 중심제로 수정. 국회의원만의 간접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당선. 4.3 관련 제주도민 강력 처벌 지시 및 계엄령 선포. 국가보안법 제정. 반민특위 해체와 친일파 등용. 학교를 병영화하기 위한 학도호국단 창설. 

북진통일 주장. 한국전쟁 발발 후 한강철교 폭파. 대전과 목포를 거쳐 부산으로 피신. 1951년 자유당 조직. 1952년 부산에서 계엄령과 발췌개헌안 통과로 직선제 통해 대통령 재선. 국민방위군 사건과 보도연맹 사건. 휴전 반대와 북진을 고집하자 미국은 이승만 제거 계획(Plan Ever-ready)을 구상. 

1954년 사사오입 꼼수로 개헌. 1954년 미국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제3차 세계대전 촉구하는 연설. 1956년 대통령 3선 당선. 정적 김구와 조봉암 제거. 1960년 4대 대통령 선거에서 무투표 당선됐으나 3.15 부정선거로 4.19 혁명 발발. 1960년 4월 26일 하야 발표, 5월 29일 하와이행.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 마우나라니 요양원에서 90세로 사망.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약력이다. 최근 도올 김용옥이 한 방송을 통해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고 말해 논란이 일기도 했던 이승만, 그는 '민족의 태양'인가, '거룩한 사기꾼'인가. '국부'(國父)로 추앙하는 사람부터 '검은 머리 미국인'으로 비판하는 사람까지, 우리는 그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이승만 우상화의 흔적
 
이승만 대통령 생일을 맞아 펼쳐진 매스게임 1958년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83회 생일을 맞아 매스게임이 펼쳐졌다. 매스게임을 하는 학생들 뒤에 이승만 대통령 사진이 내걸려 있다. 한 해 전인 1957년 82회 생일 때는 외무장관 조정환이 이승만을 '한국 혁명의 소년 선구자', '독립운동의 혜성', '민족의 국부', '민족의 태양' 같은 용어를 써가며 탄신을 경축했다.
▲ 이승만 대통령 생일을 맞아 펼쳐진 매스게임 1958년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83회 생일을 맞아 매스게임이 펼쳐졌다. 매스게임을 하는 학생들 뒤에 이승만 대통령 사진이 내걸려 있다. 한 해 전인 1957년 82회 생일 때는 외무장관 조정환이 이승만을 "한국 혁명의 소년 선구자", "독립운동의 혜성", "민족의 국부", "민족의 태양" 같은 용어를 써가며 탄신을 경축했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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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이승만은 살아있는 '우상'이었다. 이승만 우상화는 1949년부터 시작된다. 이승만 생일에는 국경일처럼 집집마다 태극기가 내걸렸다. 북한처럼 이승만 초상화가 학교 교실에 내걸릴 뿐 아니라 1953년부터는 지폐에도 그의 초상을 인쇄했다.

이승만 사진이 얼마나 많이 내걸렸던지, 4.19 혁명 직후 시인 김수영은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라는 시에서 이승만 사진이 내걸려 있는 장소로 동회(동사무소), 시청, 회사, 단체와 협회, 술집, 음식점, 양화점, 책방, 학교, 유치원을 일일이 나열할 정도였다. 김수영의 시처럼 '밑씻개'로 써도 충분할 정도로 우남(이승만의 호)의 사진은 어디에나 널려 있었다. 

1955년 3월 26일 이승만 80세 탄생을 기념하는 경축식이 서울운동장(지금의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자리)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경축식에서 노래 부른 합창단 규모만 1천 명에 달했다. 이날은 임시 공휴일로 지정됐다. 이승만 탄생 80주년인 1955년은 '쌍팔년도'라고 불린다. 무질서와 무법천지였던 이 해가 단기 4388년이었기 때문이다(1948년 정부 수립 후 우리는 단기 연호를 쓰다가 5.16 군사 쿠데타 이후인 1962년부터 서기를 쓰기 시작한다). 

문화계의 찬양도 이어졌다. '성북동 비둘기'를 쓴 시인 김광섭은 '우남 선생의 탄신을 맞이하여'라는 헌시에서 그를 "세기의 태양"으로 극찬했다. 이승만 대통령을 찬양하는 <우리 대통령>이라는 찬가도 만들어져 불렸다. 청록파 시인 박목월이 작사하고 <동심초>, <산유화>를 만든 김성태가 작곡한 노래다. '이승만 찬양가'를 만든 박목월과 김성태는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 맞춰 <대통령 찬가>를 새로 짓기도 했다.

우남정, 우남로, 우남공원
 
우남정 시찰하는 이승만 대통령 1959년 11월 18일 남산 정상에 이승만 아호를 딴 우남정이 세워졌다. 이승만 대통령이 영부인 프란체스카와 함께 시찰하는 사진에 '우남정'이라는 정자 이름에 보인다. 그의 이름을 딴 우남정은 4.19 혁명 과정에서 철폐되고 1968년 11월 11일 '팔각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다시 건립된다.
▲ 우남정 시찰하는 이승만 대통령 1959년 11월 18일 남산 정상에 이승만 아호를 딴 우남정이 세워졌다. 이승만 대통령이 영부인 프란체스카와 함께 시찰하는 사진에 "우남정"이라는 정자 이름에 보인다. 그의 이름을 딴 우남정은 4.19 혁명 과정에서 철폐되고 1968년 11월 11일 "팔각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다시 건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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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6월에는 경기도 남한산성 수어장대 근처 공터에 이승만 80세 생신을 기념하는 송수탑(頌壽塔)이 세워졌다. 1956년 3월 31일에는 서울 종로 탑골공원, 같은 해 8월 15일에는 남산 조선신궁 터에 이승만 동상이 세워진다.

81척(동상만 7m, 기단까지 25m) 높이의 남산 동상은 당시 돈으로 2억 600만 환(쌀 2만 600여 섬 가격)이 들었다. 80세 생신 축원 의미로 80척을, 여기에 진일보한다는 뜻으로 1척을 더해 81척 동상을 세웠다나. 이 거대한 동상은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8월 19일 중장비의 힘을 빌려 철거된다.  

1959년 9월 15일 서울 뚝섬에 우남 송덕관이 들어섰고, 이승만 부조와 반신상을 설치했다. 1959년 11월 18일 남산 정상에 이승만 아호를 딴 '우남정'을 세우기도 했다. 이승만 우상화의 일환으로 경기도 광주와 남한산성을 잇는 도로를 '우남로'로, 서울 남산공원과 부산 용두산공원을 '우남공원'으로 명명했다. 

1961년 개관한 서울시민회관은 3천 석이 넘는 대강당과 350석 소강당을 갖춰, 당시 국내 최대 규모 공연장이었다. 서울시민회관은 1956년 6월 20일 공사를 시작했는데, 원래 이름은 '우남회관'이었다. 4.19 혁명을 거치면서 우남회관은 '서울시민회관'으로 이름이 바뀐다. 

서울시민회관은 1972년 12월 3일 MBC 10대 가수 청백전 행사가 끝날 무렵 일어난 대화재로 불타고 만다. 50명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이 화재는 대연각 화재(1971년 12월 25일), 청량리 대왕코너 화재(1972년 8월 5일)와 함께 1970년대 '서울의 3대 화재'로 꼽힌다. 불타버린 서울시민회관 자리에 새롭게 건립한 공연 시설이 '세종문화회관'이다.

'우남시'가 될 뻔한 서울시
 
남산 한국자유총연맹 광장에 있는 이승만 동상 4.19 혁명 과정에서 탑골공원과 남산에 있던 이승만 동상은 모두 철거됐다. 2011년 8월 25일 한국자유총연맹은 4.19 혁명 유족과 시민단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동상을 다시 세웠다.
▲ 남산 한국자유총연맹 광장에 있는 이승만 동상 4.19 혁명 과정에서 탑골공원과 남산에 있던 이승만 동상은 모두 철거됐다. 2011년 8월 25일 한국자유총연맹은 4.19 혁명 유족과 시민단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동상을 다시 세웠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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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9월 16일 이승만 대통령은 담화를 통해 '외국인이 서울을 발음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서울'을 대신할 이름을 찾자고 제안한다. 대통령 담화가 발표되자 서울시는 수도의 새 이름을 찾는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서울시가 구성한 '수도명칭조사연구위원회'는 국민을 대상으로 우남, 한양, 한경, 한성 등 4개 명칭을 후보로 여론조사를 진행했다. 이 여론조사에서 우남이 1등을 차지했다는 결과를 발표하는데, '우남'은 이승만의 호다. 그가 유학을 갔던 미국 수도 워싱턴 D.C.가 초대 대통령의 이름을 딴 것을 염두에 두고 추진한 일은 아닐까. 

우상화를 위해서인지 아부를 위함인지 이승만 측근들은 서울시 이름을 '우남시'로 바꾸고자 했다. 다행히(?) 이듬해 서울시의회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이 이기면서 우남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대중문화평론가 이영미의 지적처럼 북한 김일성 우상화 못지않은 우상화가 남녘 땅에도 펼쳐졌다. 남과 북의 우상화 경쟁은 한반도에 '두 개의 태양'이 있다는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도서관에 남은 우남의 흔적 
 
중앙대학교 학술정보원 대전 우남도서관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도서관이다. 건축가 차경순이 설계해서 1959년 개관했다.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로 상부와 하부를 구분해서 수평감을 강조한 건물이다. 8층 높이의 타워를 세우고 건물 중앙에는 중정을 배치했다. 개관 당시에는 국내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 중앙대학교 학술정보원 대전 우남도서관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도서관이다. 건축가 차경순이 설계해서 1959년 개관했다.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로 상부와 하부를 구분해서 수평감을 강조한 건물이다. 8층 높이의 타워를 세우고 건물 중앙에는 중정을 배치했다. 개관 당시에는 국내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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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이력 중 이채로운 것 중 하나가 '감옥 도서관' 운영이다. 그는 고종 폐위 음모 사건으로 한성감옥에 투옥됐을 때 도서관을 운영했다.

1902년 12월 25일 벙커 목사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종교서적 150여 권을 가지고 왔는데, 이를 계기로 감옥 안에 '서적실'이 생겼다. 이승만은 여기저기 부탁해서 책을 수집하고, 이렇게 수집된 장서로 감옥에서 도서관을 운영한 모양이다. 이승만이 <독립정신>을 탈고한 것도 이때다. 어쩌면 그가 운영한 도서관이 기록으로 남은 우리 '교도소 도서관'의 첫 사례가 아닐지. 

도서관에도 이승만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있으니, 바로 '대전 우남도서관'과 '중앙대학교 학술정보원'이다. 건축가 유병우에 따르면 1957년 대전 대흥동 우리들공원에 문을 연 우남도서관은 이승만 탄생 8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도서관이다. 개관한 지 3년째인 1960년 4.19 혁명이 터지면서 이승만을 기념했던 도서관은 학생들이 던진 돌멩이에 유리창이 모조리 깨진 채 방치됐다고 한다. 

우남도서관이던 이곳은 1961년부터 KBS 대전방송국으로 쓰이다가 1978년에는 대전 중구청 별관으로 쓰였다. 1982년부터 연정국악원으로 쓰이다가 2004년 개인에게 넘어간 후 헐렸다.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승만 우상화와 중앙대학교 학술정보원 이야기를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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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사람사이에 조용히 부는 따스한 봄바람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 동물, 책을 좋아하는 고양이 집사입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가 지금은 소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