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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파고택에서 보관하고 있는 태극기. 일제강점기 의병들이 내걸고 싸웠던 국기다. 3·1만세운동과 8·15해방 기념식 때도 나주에 내걸렸다고.
 남파고택에서 보관하고 있는 태극기. 일제강점기 의병들이 내걸고 싸웠던 국기다. 3·1만세운동과 8·15해방 기념식 때도 나주에 내걸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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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일본에 맞선 의병들이 내걸고 싸웠던 태극기입니다. 이게. 3·1만세운동 때도 그랬고요. 8·15해방 기념식 때도 나주에 내걸렸어요. 제 증조할아버지가 마련한 태극기입니다."

안채 대청마루에 태극기를 펴보이던 박경중(73) 어르신의 말이다. 정사각형의 태극기는 오랜 세월 탓인지 닳아서 군데군데 해지고, 물감도 번져 있다. 1900년대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어르신의 증조부인 박정업(1884-1936) 선생이 마련한 것이라고.
  
 남파고택에서 보관하고 있는 옛 생활용품들. 오래 된 소반과 뒤주, 다구 등에서 종가의 내력이 묻어난다.
 남파고택에서 보관하고 있는 옛 생활용품들. 오래 된 소반과 뒤주, 다구 등에서 종가의 내력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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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중 어르신이 집안에 보관하고 있는 태극기를 대청마루에 펼쳐보이고 있다. 어르신은 밀양박씨 청재공파의 종손이다.
 박경중 어르신이 집안에 보관하고 있는 태극기를 대청마루에 펼쳐보이고 있다. 어르신은 밀양박씨 청재공파의 종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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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안에 전해지는 유물이 많아요. 태극기가 있죠. 선조들의 관직 임명장과 사진도 있고요. 100년 된 소반과 쌀 10가마니가 들어간 뒤주, 차를 마시는 다구 같은 생활용품도 많아요. 여러 종류의 책자, 학교와 시가지 풍경 사진, 가마와 말 장식용품, 곡식을 가는 데 쓰는 맷돌, 건축도구까지 정말 방대해요. 집안의 내림음식도 자랑할 만 하죠. 제사도 전통방식대로 지내고 있고요."

박 어르신의 말에서 남도를 대표하는 종가의 자부심이 묻어난다. 종가의 전통을 이으려는 어르신의 의지도 강하게 읽힌다.

집안에서 갖고 있는 근현대 유물을 한데 모아 생활유물전시관을 따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유물은 모두 1000여 종, 1만여 점에 이른다. 호남지역사는 물론 한국근·현대사가 배어있는 것들이다. 
 
 밀양박씨 청재공파 나주 종가의 안채. 한눈에 봐도 오랜 전통의 깊은 멋이 배어있다.
 밀양박씨 청재공파 나주 종가의 안채. 한눈에 봐도 오랜 전통의 깊은 멋이 배어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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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파고택의 안채 뒤편. 장독대가 보이는 아낙네들의 공간이다. 장식용 난간을 둔 것이 눈에 띈다.
 남파고택의 안채 뒤편. 장독대가 보이는 아낙네들의 공간이다. 장식용 난간을 둔 것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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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중 어르신이 살고 있는 집이 나주 남파고택(南坡古宅)이다. 남파고택은 밀양박씨 청재공파의 종갓집이다. 청재공파는 청재 박심문(1408-1456)에서 시작됐다. 고택은 전형적인 남도의 양반집으로, 옛 나주읍성의 남고문 안 동네(나주시 남내동)에 자리하고 있다. 단일 건물로는 전라남도에서 가장 큰 개인주택이다.

종가 전통의 깊은 멋이 고택의 안채에서 묻어난다. 대청마루에는 집의 역사가 고스란히 앉아있다. 아낙네들의 공간인 안채 뒤쪽에 장식용 난간을 둔 것도 여성에 대한 세심한 배려다.

안방 시렁 위에 가지런히 놓인 나무그릇(木器)에서는 제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종가의 풍습이 엿보인다. 쌀 10가마니를 담았다는 뒤주에선 '나주땅 절반은 밀양박씨 종가의 것'이라는 옛말이 스친다. 장롱 등 목공예 가구도 이름 높았던 장인들의 손때가 묻어있다.
  
 남파고택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초당채. 지금도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1884년 박승희 선생이 지었다고.
 남파고택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초당채. 지금도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1884년 박승희 선생이 지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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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파고택의 장독에 보관돼 있는 씨간장. 오랜 전통을 지닌 종가의 기품이 담겨 있다.
 남파고택의 장독에 보관돼 있는 씨간장. 오랜 전통을 지닌 종가의 기품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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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집과 초가, 장독대가 한데 어우러진 모습은 민속마을에서나 봤음직한 풍경이다. 장독에 보관된 씨간장에도 종가의 기품이 담겨있다. 여느 집과 달리, 나지막이 설치된 굴뚝도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배려다.

집의 기를 누를 목적으로 둔 길이 3미터 남짓의 큰확독(석지)도 눈길을 끈다. 금성산에서 만들고, 중문을 뜯어 집안으로 들였다고 한다. 궁궐이나 절집의 그것보다도 더 크다.

고택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집이 초당채다. 종손(박경중)의 6대조인 박승희(1814-1895) 선생이 1884년에 지었다. 안채는 장흥·곡성군수를 지낸 고조부 박재규(1857-1931)가 1917년에 지었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모양새가 옛 관아와 비슷하게 생겼다. 그의 호를 따 '남파고택'으로 부르고 있다.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문간채, 초당채 등 8동이 남아 있다. 근대화 '광풍'에서도 초가집을 허물지 않고 고스란히 지켜왔다. 안채의 부엌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크기도 하지만, 불을 때면서 생긴 그을음까지도 그대로다. 중요민속문화재(제263호)로 지정돼 있다. 
 
 남파고택 안채의 부억.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크기도 하지만, 불을 때면서 생긴 그을음까지도 정겹다.
 남파고택 안채의 부억.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크기도 하지만, 불을 때면서 생긴 그을음까지도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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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중 어르신이 장독 항아리의 뚜껑을 열고 있다. 집안의 장독대가 안채의 뒤안을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 앞에는 다른 굴뚝과 달리, 높이 세워 바람의 영향을 피한 굴뚝이 눈길을 끈다.
 박경중 어르신이 장독 항아리의 뚜껑을 열고 있다. 집안의 장독대가 안채의 뒤안을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 앞에는 다른 굴뚝과 달리, 높이 세워 바람의 영향을 피한 굴뚝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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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옛 주인 남파는 남다른 재테크 능력을 발휘했다. 1904년 1552마지기였던 토지를 2912마지기로 늘렸다. 17년 만이었다. 평소 근검절약하는 습관이 밑거름됐다. 물건 하나를 사면서도 값과 구입 시기, 구입처, 용도 등을 꼼꼼하게 적었다. 사진 한 장에도 언제, 어디서, 왜 찍었는지 적어뒀다.

남파는 소작인들에게 소를 나눠주며 기르도록 했다. 소를 부지런히 키우고, 송아지를 낳게 해서 자립심을 키워주려는 배려였다. 많을 때는 180여 마리를 나눠줬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쌀 수백 석도 선뜻 내놓았다. 갖고 있던 곡물을 시장에 싸게 내놓아 곡물유통도 원활하게 했다. 장흥군수로 있던 한말엔 붙잡혀 온 의병들을 많이 풀어줬다. 그 뜻을 기려 마을주민들이 휼민비를 세웠다.
  
 남파고택의 옛 주인 박재규는 장흥군수로 있으면서 한말 의병활동을 하다 붙잡혀 온 주민들을 많이 풀어준 것으로 전해진다. 박재규가 장흥군수로 있을 때 장흥읍성의 동헌 앞 평근당에서 찍은 기념사진이다.
 남파고택의 옛 주인 박재규는 장흥군수로 있으면서 한말 의병활동을 하다 붙잡혀 온 주민들을 많이 풀어준 것으로 전해진다. 박재규가 장흥군수로 있을 때 장흥읍성의 동헌 앞 평근당에서 찍은 기념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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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남도관찰부의 군수회의 기념사진. 1909년 12월 4일 찍은 것이다. 박재규는 사진 한 장에도 언제, 어디서, 왜 찍었는지 기록으로 남겨뒀다.
 전라남도관찰부의 군수회의 기념사진. 1909년 12월 4일 찍은 것이다. 박재규는 사진 한 장에도 언제, 어디서, 왜 찍었는지 기록으로 남겨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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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집안 사람들은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종손의 증조부인 박정업의 태극기가 이를 대변하고 있다. 박정업의 아들이면서 종손의 할아버지인 박준삼(1898-1976)은 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21살 때 3·1운동에 앞장섰다가, 옥살이를 했다.

박준삼은 이후 진보단체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26년 나주청년동맹을 조직하고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일제의 창씨개명도 단호히 거부했다. 해방 후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나주지회 위원장으로 일했다. 나주지역에 민립중학교(나주중학교 전신)도 세웠다. 공부를 하려는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돈을 대주기도 했다. 남파고택은 나주의 근대교육과 사회운동의 산실이었다.
  
 나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옛 나주역사. 남파고택에 살던 박준채와 박기옥은 이 역에서 기차를 타고 광주에 있는 학교를 오갔다.
 나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옛 나주역사. 남파고택에 살던 박준채와 박기옥은 이 역에서 기차를 타고 광주에 있는 학교를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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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학생독립운동 기념관 내부. 남파고택 사람인 박준채와 박기옥에 의해 시작된 일본인 학생과의 싸움에 얽힌 이야기가 세세히 소개돼 있다.
 나주학생독립운동 기념관 내부. 남파고택 사람인 박준채와 박기옥에 의해 시작된 일본인 학생과의 싸움에 얽힌 이야기가 세세히 소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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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도 이 집안에서 싹 텄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나주역에서 일본인 남학생들이 조선인 여학생의 머리카락을 잡고 희롱한 사건이 발단이었다. 당시 일본 학생에게 머리채를 잡혔던 여학생 박기옥과 일본 학생들과 충돌한 남학생 박준채가 이 집안사람이다. 박기옥은 박정업의 동생 관업의 딸, 박준채는 박준삼의 동생이다. 모두 이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고택의 대청마루에 봄햇살이 드리운다. 늠름한 대들보에서 종가의 향기가 느껴진다. 부잣집이라고 으스대지 않고, 이웃을 배려한 옛사람들이 떠오른다. '나'보다 '우리'를 먼저 생각한 사람들이다. 참 아름다운 집이다. 귀한 사람들이다. 
 
 박경중 어르신이 남파고택의 안채 앞에서 집안의 내력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르신은 밀양박씨 청재공파의 종손으로, 현재 남파고택의 주인이다.
 박경중 어르신이 남파고택의 안채 앞에서 집안의 내력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르신은 밀양박씨 청재공파의 종손으로, 현재 남파고택의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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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