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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블랑카 해변을 산책하는 주민들. 히잡을 쓴 사람들도 많다. 대서양과 지중해가 만나는 지점의 주요 항구도시 카사블랑카는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의 식민지를 차례로 겪은 곳이다.
 카사블랑카 해변을 산책하는 주민들. 히잡을 쓴 사람들도 많다. 대서양과 지중해가 만나는 지점의 주요 항구도시 카사블랑카는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의 식민지를 차례로 겪은 곳이다.
ⓒ 최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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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에 오기 전의 나에게는, 모로코라는 이름보다 카사블랑카라는 도시 이름이 더 익숙했다. 잉그리드 버그만과 험프리 보가트가 출연한 동명의 할리우드 영화 때문이다.

아카데미상 세 개를 받은 1942년작 흑백영화. 오래된 영화라 본 적이 없지만 '카사블랑카'라는 이름의 술집과 카페는 세계 곳곳에 있고, 채플린이나 오드리 헵번 마냥 주인공들의 사진도 익숙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아 사용되는 언어인 영어처럼, 가장 많이 팔리는 음료수인 코카콜라처럼, 할리우드 영화는 세계의 문화를 장악하고 있다. 모로코를 떠나기 전날 밤, 드디어 영화를 찾아서 보았다.

모로코 안의 유럽, 카사블랑카

<카사블랑카>(Casa branca)는 '하얀 집'이라는 뜻의 포르투갈어다. 1468년, 베르베르족이 살던 땅에 포르투갈이 침략해 요새를 세우며 형성된 하얀색 마을이 카사블랑카로 불리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은 1755년 대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된 뒤 떠났고, 이후에는 19세기 영국 직물 산업의 양모 공급처로 성장했다가 1907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됐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미국 공군기지가 있었으며, 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려는 유럽인들이 비자를 받기 위해 체류하던 장소이기도 했다. 영화는 그 시절을 배경으로 스웨덴 여성과 미국인 남성의 쓸쓸한 사랑을 그린다.

다양한 국적을 가진 등장인물들 중에 아랍인은 단 한 명, 도어맨 압둘 뿐이다. 세력을 확장해 프랑스 식민지 카사블랑카까지 들어온 독일군들은 카페에서 나치의 노래를 부르고, 프랑스의 민족 영웅은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저항의 의지를 일깨운다.

잔인하고 차가운 나치에 대항하는 용감한 프랑스와 미국인 주인공들.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너무나 익숙해진 이야기다. 제2차 세계대전 중반인 1942년 당시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연합군 국가의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며 나치에 분노하고 승전을 기원했을 것이다.

나는 프랑스인도 미국인도 아닌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인이며, 영화에는 프랑스 국가의 가사 자막조차 없었음에도, 합창 장면에서 약간의 감동을 느꼈다. 침략국에 대한 피침략국민의 마음, 강자에 대한 약자의 저항의식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프랑스가 아니다. 식민지 피지배국 모로코 땅이다.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 했던가. 내가 한 침략은 용감한 정복이고 내가 받은 침략은 경악스러운 만행인가. 유럽 강대국들 간의 침략은 나쁘고 제3세계 약소국에 대한 침략은 나쁘지 않은가. 침략 당한 역사를 가진 나라 사람으로서 마음이 불편했다.

프랑스는 곧 나라를 되찾았고, 패전국 독일도 수십 년 간의 복구를 거쳐 다시 유럽의 강대국이 됐다. 프랑스는 지금까지도 남미, 아프리카, 카리브해, 태평양, 인도양 등지에 영토를 소유하고 있다. 주요 승전국 미국과 영국 역시 마찬가지다. 식민지배는 끝나지 않았고, 정치, 경제, 문화적인 지배는 식민지배 못지 않게 견고하며 불평등하다.

1942년 당시 모로코의 풍경과 사람들이 어땠을지 궁금했지만, 할리우드 영화 <카사블랑카> 속에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영화의 마지막, 공항 장면. 미국인 험프리 보가트는 스웨덴인 잉그리드 버그만과 그의 프랑스인 남편을 미국으로 떠나보내고, 이륙을 막으려는 독일 장교를 쏴 죽인 뒤 홀로 모로코에 남는다. 나치 독일을 물리칠 때까지 미국은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나는 아프리카의 배우를 모른다

카사블랑카라는 지명을 발음하며 새하얀 집들이 자리한 아름다운 항구를 상상했지만, 인구 330만 명이 사는 모로코 최대 도시인 이곳은 교통체증이 심하고 공사 현장도 많아 먼지가 심했다. 도착하자마자 곧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은 막연히 상상하고 기대하던 것들이 가차없이 깨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카사블랑카에서 머문 유스호스텔에는 전에 그곳에서 머물렀던 이탈리아 배우 소피아 로렌이 식사하는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카사블랑카에서 머문 유스호스텔에는 전에 그곳에서 머물렀던 이탈리아 배우 소피아 로렌이 식사하는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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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박 3일을 머문, 하루 85디르함(한화 1만 원) 가격의 유스호스텔 벽에는 중년의 소피아 로렌 사진이 붙어 있었다. 호스텔에서 식사를 하는 모습이었다. 소피아 로렌이 머물던 숙소라니. 그가 나오는 영화 몇 편을 본 적이 있어 괜히 반갑고 신기했다.

나는 이탈리아 배우, 미국 배우, 스웨덴 배우는 알아도 아프리카에서 활동한 배우나 감독, 작가는 아무도 모른다. 서유럽-미국과 아프리카는 경제적인 격차만큼이나 문화적 영향력과 정보의 격차도 너무나 크다.

세계 문화의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 이미 너무나 익숙한 유럽과 미국보다는, 미지의 아프리카, 아라비아 세계가 더 궁금했다. 나의 이번 여행이 서구 중심의 주류 문화를 벗어나, 낯설고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상상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영화 <카사블랑카> 속 카페가 있었음직한 구도심의 모습
 영화 <카사블랑카> 속 카페가 있었음직한 구도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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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블랑카 해변의 하산 2세 모스크
 카사블랑카 해변의 하산 2세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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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블랑카 해변에는 1961년부터 1999년 사망 때까지 38년 간 모로코 국왕이었던 하산 2세가 건설을 지시한 거대한 모스크가 있다. 기도 시간을 알리는 모스크의 첨탑 '미나레트'는 세계 최고 높이로 200m에 이른다.

산책을 나온 주민들이 많았는데 그 중 한 소년과 아버지가 자꾸 말을 걸기에 인터뷰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랍어만 사용해서 내가 준비한 프랑스어 질문지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익숙한 알파벳과 달리 아랍어는 마치 그림 같고 낯설어서 따라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답답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도 미소와 따뜻함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서둘러 구글번역기를 돌려 아랍어 인터뷰 문장들을 찾아두었다.
 
카사블랑카에서 만난 아들과 아버지. 소년은 호기심이 많아서 나에게 계속 말을 걸었으나, 내가 아는 아랍어는 안녕, 고마워, 두 가지 밖에 없었다.
 카사블랑카에서 만난 아들과 아버지. 소년은 호기심이 많아서 나에게 계속 말을 걸었으나, 내가 아는 아랍어는 안녕, 고마워, 두 가지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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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는 이슬람교가 국교로 지정돼 있으며 인구의 약 99%가 이슬람교도라고 추산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자동적으로 종교를 가지게 되는 삶, 종교가 사회의 근간이 되는 나라에서의 삶은 어떤 것일지, 종교를 가져본 적이 없는 나는 짐작하기 어렵다.

모르는 이성에게 인사하지 마시오

나이가 많은 여성들은 대부분 히잡을 썼고,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젊은이들은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들이 더 많았다. 모로코에 대한 여행 안내 중에 '야외에서 모르는 여성과 남성은 인사를 하면 안 된다'는 문장이 있었다. 세상에나, 인사조차 하지 말라니.

나는 이번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라비아 여행을 통해서 되도록 다양한 연령층과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인터뷰를 통해 다큐멘터리를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다. 세상의 절반은 여성, 또 절반은 남성이니 당연히 성비도 비슷하게 맞추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슬람교가 중심이 되는 나라에서는 남성인 내가 여성들을 만나고 이야기 나누는 것이 어렵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모로코 시골 지역은 더 보수적일지 모르겠으나, 도시에 사는 여성과 남성들은 다른 사회와 다름없이 어울려 지냈고 별다른 경계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이슬람 사원은 여성과 남성이 들어가는 문과 기도하는 곳이 달랐다. 정문은 보통 남성들의 출입구인데, 따로 있다는 여성들의 출입구는 어디인지 잘 보이지 않는다.

전에 여행한 인도와 우즈베키스탄의 이슬람 사원들은 신발을 벗고, 조용히 하는 규칙만 지킨다면 비이슬람교 여행자의 출입을 막지 않았다. 같은 이슬람교라도 나라마다 사원의 규칙은 다른 모양이다. 모로코의 이슬람 사원은 입장료를 받는 관광지의 사원을 제외하곤 비교도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아가디르 해변. 어디에 있든 시간에 맞춰 절하고 기도를 하는 사람들.
 아가디르 해변. 어디에 있든 시간에 맞춰 절하고 기도를 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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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영혼을 빼앗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촬영할 때 조심해야 한다는 안내도 보았는데, 실제로 노인들은 대체로 카메라를 싫어했다. 하지만 청년들은 다들 휴대폰을 가지고 있었고, 셀카를 찍기도 했다. 그 모습은 다른 나라 청년들과 하나도 다르지 읺았다. 하산 2세 모스크 광장에서 만난 여성들과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조심스레 인터뷰 촬영이 가능할지 물어보았다.

"미안해. 네 여행을 응원하고 인터뷰 촬영도 도와주고 싶지만 나는 할 수가 없어. 우리끼리 사진 찍는 건 괜찮지만 외국인 남성과는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왜 그런지, 나도 이유는 잘 모르겠어."

아쉬웠지만 그게 모로코 사람들의 문화이니 여행자인 나는 기꺼이 받아들여야할 일이었다. 그저 내가 좋아서 하는 여행, 다른 사람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나의 글과 다큐멘터리를 위해서 현지의 누구에게도 조금이나마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망설이다가 촬영을 해준 여성인 레다(Reda)씨와 하스나 아노우차(Hassna Anoucha)씨도, 가까운 곳에 있던 남성 친구들을 불러서 같이 촬영하기를 원했다. 남성인 세 친구 아흐메드 주니어(Ahmed Junior)씨, 기타 바흐보타(Ghita Bajbota)씨, 모라드 코우참(Mourad Khoucham)씨는 무척 적극적이었고, 두 여성은 낯을 가리고 말수가 적었다. 불과 다섯 명이었지만, 외국인 여행자를 대하는 모로코 대다수 여성과 남성의 대조적인 모습이 이들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왼쪽에서부터 하스나 아노우차(Hassna Anoucha)씨, 레다(Reda)씨, 아흐메드 주니어(Ahmed Junior)씨, 기타 바흐보타(Ghita Bajbota)씨, 모라드 코우참(Mourad Khoucham)씨
 왼쪽에서부터 하스나 아노우차(Hassna Anoucha)씨, 레다(Reda)씨, 아흐메드 주니어(Ahmed Junior)씨, 기타 바흐보타(Ghita Bajbota)씨, 모라드 코우참(Mourad Khoucham)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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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가장 먼 곳

아프리카에 대해서는 '가난하고, 무덥고, 질병과 폭력의 위험이 있는 살기 힘든 곳'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다. 아라비아에 대해서도 '여성차별적이고, 호전적이며, 전쟁과 테러의 위험이 있는 살기 힘든 곳'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다. 주로 서구의 영화나 미디어를 통해 받아들여지고 견고해진 이미지다. 아프리카와 아라비아에서 비롯한 문화는 좀처럼 만날 기회가 없다. 아라비아는 유럽이나 미국보다 거리상으로 더 가깝지만, 문화적, 심리적으로는 지구에서 가장 먼 지역이 아닐까.

전쟁과 테러는 이슬람교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소수의 극단주의자들이 일으키는 문제일 것이다. 또한 그들의 전쟁과 테러는 냉전 체제로부터 이어지고 있는 강대국들의 개입, 가장 값비싼 자원인 기름을 둘러싼 이해관계와 밀접한 영향이 있다. 소수의 극단적인 문제를 확대해 이슬람교와 이슬람 사회, 사람들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여행을 통해서 내가 가진 이슬람 지역에 대한 편견을 깨고, 조금 더 온전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싶다.
 
수도 라바트 해변의 뱃사공
 수도 라바트 해변의 뱃사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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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모이, #모로코여행, #아프리카여행, #셰계일주, #아라비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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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바다 미륵섬에서 유년기를, 지리산 골짜기 대안학교에서 청소년기를, 서울의 지옥고에서 청년기를 살았다. 2011년부터 2019년까지, 827일 동안 지구 한 바퀴를 여행했다.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생활놀이장터 늘장, 여행학교 로드스꼴라,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센터, 섬마을영화제에서 일했다. 영화 <늘샘천축국뎐>, <지구별 방랑자> 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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