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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외출했다. 볼 일을 보고 집에 오니 싱크대에 그릇이 쌓여 있다. 평상시 나도 설거지를 미루는 편이라 개의치 않았다. 아이를 재우러 가면서 거실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 남편에게 설거지를 부탁했다. 본인이 먹은 그릇이어서 그랬는지 저항이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준비하러 부엌으로 갔다. 안방에서 나와 바라본 싱크대는 그릇 더미가 사라진 상태였다. 미소를 머금고 씽크대 앞에 섰는데 이럴 수가. 전날 아이와 내가 먹은 과일 접시가 남아 있다. 

'아니 내가 먹은 거라고 이것만 남긴 거야?'

배꼽 밑 단전에서부터 뜨거운 게 올라왔다. 자고 있는 남편을 깨워서 따지고 싶었다. 

'당신말야. 본인이 안 먹은 거라고 다른 건 다 설거지하면서 이것만 남긴 거야? 사람이 어쩜 그렇게 이기적이야? 자기가 번 돈은 왜 가져다 준대? 그렇게 니거 내거 따질 거면 앞으로 내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에 기댈 생각 하지마. 6시에 돌봄노동 퇴근할 거니까 나만 야근시키지 말고 6시 이후 육아는 요일마다 번갈아가면서 해. 또 가사는 세분해서 월별로 교대해. 이번 달 내가 음쓰(음식물쓰레기)했으면 다음 달 음쓰 당번은 자기야.'

생각은 점점 더 구체화 되었고 억눌려 있던 가사와 육아에 대한 불편한 마음까지 올라왔다. 과일 접시 하나에 억눌러 왔던 불만이 시루떡마냥 쌓여갔다. 더 이상 쌓을 곳도 없을 만큼 화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아이가 깼다.
 
 남편에서 설거지 좀 해달라고 했더니... 이럴 수가. 전날 아이와 내가 먹은 과일 접시가 남아 있다.
 남편에서 설거지 좀 해달라고 했더니... 이럴 수가. 전날 아이와 내가 먹은 과일 접시가 남아 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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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시간 안 그래도 바쁜데 따져봤자 서로 기분만 상하고 속상한 내 감정은 전달도 안 된다. 그릇 하나에 짜증내는 나만 잘못한 걸로 결론이 날 가능성이 크다.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를 택했다.

남편과 아이를 내보내고 머리를 굴렸다. '이걸 어떻게 되갚아 줄까... 남편 빨래를 안 해줄까? 밥도 안 해주고 철저히 소외 시켜줄까?' 여러 가지를 생각해 봤지만 어느 것 하나 시원하지 않았다. 분노로 가득한 마음을 쏟아내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카톡창만 열고 닫고를 반복했다.

그날 오후 아이 친구들이 집에 놀러왔다. 느티나무 도서관장 박영숙 님 책에 나온 것처럼 우리집도 놀기 전에 그림책을 읽는 게 규칙이다. 한글 책 1권, 영어 책 1권을 읽는데 이날 읽은 영어책은 <백헤드(baghead)>였다.
 
 < Baghead > 겉표지.
 < Baghead > 겉표지.
ⓒ Dragon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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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는 수요일 아침에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다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엄청 대단하고 멋진 아이디어였는데 그건 마트에서 주는 종이봉투로 만든 종이가면이었다. 눈과 입만 뚫어 얼굴에 종이봉투를 헬멧처럼 덮어쓴 조가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엄마는 "그런 얼굴로 어떻게 밥을 먹냐"며 나무란다. 하지만 조는 에그스크램블을 흘리거나 남기지 않고 다 먹는다. 

스쿨 버스에서는 운전기사가 그런 모습으로 어떻게 학교에 가냐고 말하지만 조는 아무일 없이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에 간다. 버스에 탄 아이들 중 조를 놀리거나 뭐라하는 친구는 없다.

학교에 도착하자 선생님은 종이봉투를 쓴 조를 보고 불만스런 얼굴로 숙제 해왔냐고 이야기한다. 조는 숙제도 해왔고 종이봉투를 뒤집어 쓴 채 친구들 앞에서 발표도 잘한다. 축구 코치는 종이봉투를 쓴 조에게 그런 모습으로 어떻게 축구를 하냐고 하는데, 조는 축구는 발로 하는 거라며 응수한다. 심지어 골을 세 개나 넣는다.

조를 데리러 온 아빠는 오늘이 학교에서 그런 이상한 모자를 쓰는 날이냐고 묻는다. 당연히 아니다. 저녁 식사 시간에 아빠도, 엄마도, 형도 조의 종이봉투에 대해 아무 말 하지 않는다. 조의 여동생만이 조에게 묻는다.

"오빠, 왜 종이봉투를 쓰고 있어?"

그러자 조가 봉투를 벗으면 대답한다.

"아침에 혼자 앞머리를 자르다 실수를 했거든."

종이봉투를 벗은 조의 앞머리는 삐뚤어져 있다. 목요일 아침 조의 여동생이 아이디어를 냈다. 여동생은 조의 머리를 헤어젤로 모두 올려 세웠다. 조는 더 이상 삐뚤어진 머리 때문에 종이가방을 쓰지 않아도 됐다. 

손잡이가 없는 종이봉투를 쓰지 않는 우리에게 종이봉투를 뒤집어 쓰는 건 익숙하지 않은 문화지만 아이들이 종이봉투에 구멍을 내 뒤집어 쓰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아직 우리나라에 번역본이 없는 < baghead >는 이런 아이들의 재밌는 장난을 이용해 다른 이에 대한 관심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어른들은 조가 종이봉투를 쓴 행동의 결과만 보고 그건 안 좋은 행동이라 판단하고 '밥을 먹을 수 있겠냐, 축구를 할 수 있겠냐'며 조언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여동생은 조의 행동이 아닌 이유를 궁금해 했다. 조가 종이봉투를 쓴 마음을 물어본 것이다. 조가 종이봉투를 벗는 일은 여동생의 물음 때문에 가능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아이들은 장난감으로 달려갔는데 나는 책장을 덮지 못하고 여동생이 조에게 질문하는 장면을 다시 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오빠에게 질문하는 여동생을 보면서 이따 밤에 남편에게 '왜 그릇을 남겼는지 물어나 보자'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재우고 부엌에서 뒷정리를 하면서 남편에게 물었다. 

"어제 설거지할 때 과일 접시는 왜 남겼어?"

'당연히 자기가 안 먹은 거라서 남겼다고 하겠지? 그럼 뭐라고 말 해 주지? 얌체냐는 말 대신 뭐라고 해야 적절한 지적과 조언이 될까?' 생각했다.

"세제 거품이 모자랐어."

맨 아래 깔려 있던 과일접시를 닦기에 세제가 모자랐다고 한다. 세제를 한 번 더 펌핑하는 게 귀찮았단다. 분노 게이지가 가득 차서 종일 안절부절 못했던 게 허무해 웃음이 났다.

이기적인 남편의 행동을 어떻게 고칠지 고상하고 교양 있는 답변을 고르느라 애썼던 아까운 시간들. 남편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물어보지 않고 얌체라고 생각한 내 판단대로 화를 냈다면 어땠을까? 

어떤 현상이나 타인을 보고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선입견과 판단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아야 된다는 건 머리로 알지만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 했던 교훈을 몸소 깨달은 하루였다.

운전기사와 축구코치가 남자가 아닌 여자로 나오는, 성별에 따른 차별도 없는 그림책 < baghead >가 우리 부부에게 평화를 선물했다. 앞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기보다 궁금해 하고 물어보는 일에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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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연재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