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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소설에 쉽게 손이 가질 않는다. 예전에는 소설을 자주 읽었는데, 언젠가부터는 소설을 거의 읽지 않는다. 주로 에세이, 인문·교양서적을 읽는다. 외국 소설도 가끔 읽는다. 그렇지만 한국소설은, 읽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도무지 책장을 펼칠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이유가 뭘까. 소설은 에세이처럼 언제든 펼쳐 읽다가 멈추고 다른 일을 하다가 다시 읽고 하는 과정이 잘 되지 않는다. 일단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그동안 애써 모른 척해왔던 온갖 보기 싫은 감정들에 포위 당해 옴짝달싹할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소설을 다 읽은 후에도 감정이 잘 수습되지 않는다. 나의 일상에 방해가 되는 그 감정들을 서랍에 넣어두고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한국 소설은 더 그렇다.
 
번역된 소설은 배경도 인물도 사건도 모두 (당연한 이야기지만) 번역된다. 어쩌면 나는 번역이라는 안전그물 안에 숨어서 거리감 있는 이야기만을 즐겨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 작가가 우리말로 쓴 소설을 읽을 때에는 일종의 각오가 필요하다. 이야기에 상처 입을 각오, 몸 한구석에 이야기를 각인시킬 각오, 그것으로 묵은 감각을 변화시킬 각오 같은 것. (서효인+박혜진, <읽을 것들은 이토록 쌓여가고> 222쪽)

단단히 이야기에 상처 입을 준비를 하고 <2019 올해의 문제 소설>의 책장을 넘겨본다. 이제 한국 소설을 읽지 못하는 두려움의 정체를 알았으니 더 이상 피하지 않을 테다.

이 책은 한국현대소설학회의 젊은 연구자들이 모여 2017년 11월부터 2018년 10월까지 여러 문예지에 발표된 단편소설과 중편소설을 읽어나가면서 후보작을 고르고, 편집위원회가 최종 12편의 소설을 선정해 엮은 책이다. 2002년부터 책이 나왔으니, 지금까지 나온 <올해의 문제소설>이 스무 권이 넘는다.

'문제 소설'이라는 주제 아래 묶여진 소설들이다 보니, 역시 읽어내기가 만만치는 않다. 모두 예민한 사회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젠더 문제,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 노동 문제, 공허한 청춘들의 일상과 연애. 그중에서도 눈여겨볼 대목은 2018년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퀴어 서사다. 이 책에 수록된 김봉곤의 <시절과 기분>, 박상영의 <재희>도 동성 간의 사랑을 주제로 쓰인 소설이다.
 
 <2019 올해의 문제소설>, 한국현대소설학회 엮음, 푸른사상(2019), 15900원
 <2019 올해의 문제소설>, 한국현대소설학회 엮음, 푸른사상(2019), 15900원
ⓒ 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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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동성애', '퀴어'라는 말만 들어도 자동으로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겠으나, 나는 그들의 글을 환영하는 입장이다. 그들의 글이 문학을 더 넓고 깊게 만드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소설 말고 달리 무엇을 통해서 우리가 그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들이 쓴 소설을 읽으며 그들의 아픔을 감히 짐작해 보고,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나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나와 같은 인간임을 느낀다.

모든 소설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더 많은 소설이 우리 사회 도처에 널려 있는 예민한 사회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부당하고 폭력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개인을 조명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소설의 역할이기도 하고, 그들의 인생을 읽으며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경험, 그 무엇도 아닌 소설만이 줄 수 있는 경험이다.

그제서야 비로소 신문 기사나 뉴스 보도에서는 멀게만 느껴지던 일이, 남 얘기만 같았던 일들이, 소름 끼치게 피부에 와닿는, 나와 무관하지 않은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을 읽으며 곳곳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은 문장, 내 머리를 열어서 훔쳐보기라도 한 듯한 문장들에 밑줄을 그으며 그 누구에게도 받지 못한 뜨거운 위로를 받는다.

권여선, 김봉곤, 윤이형, 정영수, 이주란의 소설을 읽으며 특히 밑줄을 많이 그었다. 그중에서도 지금까지도 계속 눈앞에 어른거리는 문장들을 다시 적어본다.
 
혼자라는 게 늘 편했는데, 세상에 내가 단 한 명이고 나는 나로 완전하다고 생각할 때마다 언제나 자부심에 가까운 감정을 느껴왔는데, 매번 숨을 깊게 들이마셔야 했고, 늘 하던 일들이 새로 배워야 하는 일처럼 두려워졌다. 이렇게 늦게 어지러움을 느껴도 되는 것일까. 이렇게 일찍 낡아버려도 괜찮은 것일까. 꼿꼿해야 한다고 생각할수록 그러기가 어려웠다. 사람들 앞에서 옷에 오줌을 싸버린 걸 들킨 사람처럼 나는 나를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193쪽, 윤이형의 <마흔셋>중에서)

도서관에 가서 나처럼 삶에 실패한 인물들이 나오는 소설을 읽었다. 삶에 실패하는 인물이 나오는 소설을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서가에서 아무 책이나 뽑으면 거기에는 처참하게 실패한 인물들이 있었다. (299쪽, 정영수의 <우리들>중에서)

문학상 작품집처럼 여러 작가의 단편 소설을 모아 엮은 소설집을 읽는 재미 중 하나는 새로운 작가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새롭게 알게 된 작가는 정영수와 장류진이다. 이 두 작가를 알게 되어 무척 기쁘다.

앞으로 그들이 쓸 이야기들이 기대된다. 장영수 작가는 나와 닮은 점이 많은 사람인 것 같아 반가웠고, 장류진 작가는 아주 오랜만에 유머 코드가 맞는 사람을 만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나와 유머 코드가 맞는 작가를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고, 그만큼 그 기쁨은 차마 말로 다 못한다.

<2019 올해의 문제 소설>을 다 읽고 가만히 생각해본다. '왜 이런 기획을 했을까. 이미 다른 문예지에 실렸던 소설을 '문제 소설'이라는 주제 아래 다시 모아 엮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을 다 읽고 다시 책의 처음으로 돌아가 머리말을 읽으니 그제서야 조금 알 것 같다.
 
개별 작품들이 지니는 독특성을 한 권의 앤솔러지에 묶어놓고 나면 날카로운 개성들이 무디어지는 느낌이다. 항상 새로운 일들로 지면을 가득 채워놓고 보면 정작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신문과 같이 앤솔러지 또한 그런 속성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모든 작품들이 하나하나 새롭고 특색 있는 작품들이지만 전체로 보면 이미 오래전에 본 듯한 모습이다. 그것은 아마 소설이 그려내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6쪽)

이 책을 읽어내는 일은 미리 짐작했듯이 수월하지 않았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마음이 천근만근이었고, 어질러진 감정들을 주워 담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래도 읽기를 잘 했다. 오랜만에 소설의 묘미를 느낄 수 있었다.

나에게는 소설의 서사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소설 속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 마치 나를 대신해서 쓴 것 같은 문장을 발견하고 떨리는 손으로 밑줄을 긋는 것, 길에서 무심하게 스쳤던 수많은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 소설이 나에게 주는 최고로 근사한 경험이다.

2019 올해의 문제소설 - 현대 문학교수 350명이 뽑은

한국현대소설학회 엮음, 푸른사상(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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