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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이용자와 도서관 사서가 함께 쓴 도서관 역사 여행기입니다. 대한제국부터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역사 속 도서관,  도서관 속 역사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편집자말]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때는 바야흐로 1978년 봄, 주인공 현수(권상우 분)는 말죽거리 근처 고등학교로 전학 온다. 현수 어머니가 집값 상승을 기대하고 서둘러 강남으로 이사 오면서 현수도 전학을 오게 된 것.  

제목뿐 아니라 영화의 주무대로 등장하는 '말죽거리'는 어디일까? 서울시 서초구 양재역 사거리 일대가 바로 말죽거리다. 

지금의 지하철 3호선 양재역 주변은 조선시대에도 '역'이 있었다. 역참(驛站) 제도의 '역' 말이다. 조선시대 양재역은 삼남지방으로 이어지는 역으로, 한양에서 경기 이남으로 가는 이들이 말을 갈아탈 수 있었다. 양재역은 종6품 찰방(察訪)이 머물며 경기도 전체 역을 관리하는 역할을 할 정도로 큰 역이었다.

말죽거리 이야기
 
‘말죽거리’ 지명 유래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모두 ‘말’과 ‘죽’이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지금의 양재역 동남쪽에 복덕방이 밀집해 있었다. 이름처럼 ‘죽을 쑤던’ 이곳이 ‘강남 땅값 신화’로 등장할 것을 누가 알았을까.
▲ 양재역 4번 출구 앞 ‘말죽거리’ 표석 ‘말죽거리’ 지명 유래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모두 ‘말’과 ‘죽’이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지금의 양재역 동남쪽에 복덕방이 밀집해 있었다. 이름처럼 ‘죽을 쑤던’ 이곳이 ‘강남 땅값 신화’로 등장할 것을 누가 알았을까.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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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죽거리 지명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조선시대 여행자가 이곳에서 말에게 죽을 끓여 먹였다고 하여 '말죽거리'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이괄의 난'으로 인조(仁祖)가 공주로 피난 갈 때 여기서 말에 탄 채 죽을 먹어서 이름이 생겼다는 설이다.

아무리 급하기로 왕이 말에 탄 채 죽을 먹었을까 싶은데, 그 사람이 '인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인조가 누군가. '프로 도망러' 아닌가. 인조는 이괄의 난(1624),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1637) 때 세 번이나 한양도성을 등지고 피신한 바 있다. 조선 역대 왕 중 가장 많이 도성을 버리고 달아난 기록을 보유한 왕이다. 도망 자체를 탓하는게 아니다. 청과 전쟁 과정에서 인조의 정책과 처신은 비판할 대목이 많다. 

제주도 말을 한양으로 데려오는 과정에서 말을 손질하고 죽을 쑤어 먹였다는 설, 병자호란 때 청나라 용골대(龍骨大)가 이곳을 병참으로 삼아 말죽을 쑤어 먹였다는 설도 있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말'과 '죽'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서울은 언제부터 초만원이었나
 
일제 강점기부터 꾸준히 늘어난 서울 인구는 한국전쟁 때 감소했을 뿐 이후부터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여왔다. 1953년 100만 명을 넘어섰고, 1959년 2백만 명, 1968년 4백만 명, 1979년 8백만 명, 1988년 1천만 명을 돌파한다. 서울의 인구는 1992년 10,969,862명일 때 최고점을 기록한다.
▲ 서울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 일제 강점기부터 꾸준히 늘어난 서울 인구는 한국전쟁 때 감소했을 뿐 이후부터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여왔다. 1953년 100만 명을 넘어섰고, 1959년 2백만 명, 1968년 4백만 명, 1979년 8백만 명, 1988년 1천만 명을 돌파한다. 서울의 인구는 1992년 10,969,862명일 때 최고점을 기록한다.
ⓒ 서울연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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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위해서든 말을 위해서든 '죽을 쑤던' 말죽거리 일대가 강남 땅값의 신화로 등장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1947년 4월 1일 서울시는 팔각형으로 된 새 휘장을 발표한다. 새 휘장의 '팔각'은 서울 주위 여덟 개 산, 즉 남산, 와우산,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무학봉, 응봉을 의미했다. 지금과 비교하면 당시 서울의 범위가 강북 일부에 국한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60년대 초까지 지금의 강남 일대는 행정구역상 경기도였고, 대부분 논과 밭, 과수원이었다. 1963년 시점에 지금의 강남구과 서초구 일대 땅에 살던 사람은 2만7천 명도 되지 않았다.

서울시는 1963년 1월 1일 자로 경기도 일대를 편입하며 크게 확장하는데, 경기도 광주군과 시흥군에 속했던 지금의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강동구가 모두 서울이 된다. 1963년 당시 서울은 인구 300만 명(325만 명)을 넘어선 터라 1985년 500만 명을 수용한다는 목표로 서울시를 대대적으로 확장한 것이다.

서울시의 인구 500만 명 수용 목표는 당초 계획보다 15년이나 이른 1970년 7월에 넘어서고, 서울 올림픽이 열린 1988년에는 1천만 명을 넘어선다. 빨라도 너무 빠른 목표 달성이었다. 1960년대 전국 인구 성장률은 연평균 2.3%인데 서울은 연평균 8.2%였다. 강명구의 표현처럼 '농촌 탈출'(rural exodus)을 통한 '압축적 도시화'(condensed urbanization) 현상이 서울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제3한강교가 놓인 이유 
 
1966년 1월 19일 공사를 시작, 1969년 12월 25일 완공한 다리. ‘제3한강교’라는 이름과 달리 한강철교, 제1한강교(지금의 한강대교), 광진교, 제2한강교(지금의 양화대교)에 이어 한강에 다섯 번째 놓인 다리다. 제3한강교는 1985년 한강 종합개발 공사 과정에서 ‘한남대교’로 이름이 바뀐다.
▲ 경부고속도로와 강남 대개발의 시발점, 한남대교 1966년 1월 19일 공사를 시작, 1969년 12월 25일 완공한 다리. ‘제3한강교’라는 이름과 달리 한강철교, 제1한강교(지금의 한강대교), 광진교, 제2한강교(지금의 양화대교)에 이어 한강에 다섯 번째 놓인 다리다. 제3한강교는 1985년 한강 종합개발 공사 과정에서 ‘한남대교’로 이름이 바뀐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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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1월 19일 제3한강교(가수 혜은이가 1979년 불러서 크게 유행한 그 <제3한강교>다) 공사가 시작되는데, 지금의 한남대교다. 제3한강교 건설은 경부고속도로의 시발점이자 강남 땅값 상승의 신호탄으로 자리매김하지만, 당초 이 다리를 놓은 건 군사 전략상 이유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 수많은 서울시민이 피난하지 못하고 인민군 치하에 놓인 것은 한강 다리 폭파로 피난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1960년대 중반까지 한강에는 한강철교(1900년 7월 완공), 제1한강교(지금의 한강대교, 1917년 10월 완공), 광진교(1936년 10월 완공), 제2한강교(지금의 양화대교, 1965년 1월 완공) 4개 다리만 있을 뿐이어서, 서울시민의 신속한 피난을 위한 추가 다리 건설이 필요했다. 

1960년대 후반은 남북한 군사적 긴장이 심했던 시기다. 1964년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 후 남북한 무력 충돌은 1967년 784건, 1968년 985건으로 급증한다. 남파 간첩 수도 1966년 50명에서 1967년 543명, 1968년 1247명으로 크게 늘었다.

굵직한 사건도 연이어 터진다. 1967년 1월 19일 해군 경비정 당포호가 북한의 포사격을 받고 침몰한다. 1968년 들어서는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군 특수부대 요원의 청와대 공격, 1월 23일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11월 2일 울진 삼척 지역 북한 게릴라 침투 사건이 터졌다. 1969년 4월 15일에는 미국의 EC-121형 정찰기가 격추되기도 했다.

이 시기 북한은 왜 전쟁에 준하는 도발을 감행했을까. 박태균 교수는 남한의 베트남 파병을 억제하기 위해 북한이 공세를 강화했다고 해석한다. 한반도에서 안보 위기를 일으켜 남한 병력의 베트남 증파를 막아 북베트남을 도우려 했다는 것이다. 북한과 북베트남, 김일성과 호치민의 긴밀한 관계를 생각하면 이런 해석도 충분히 가능하다. 

안보 위기 속에서 박정희 정권은 국민동원체제를 통해 '병영국가'를 완성한다. 징병제 강화, 향토예비군 창설, 주민등록제도 시행이 모두 1968년을 전후로 이뤄진다. 광화문 사거리에 충무공 동상을 세우고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한 것도 이때다. 1975년에는 캄보디아(4월 17일), 베트남(4월 30일), 라오스(5월 8일) 세 나라가 도미노처럼 공산화되면서 안보 위기의식이 크게 일었다. 강남 개발 이면에는 국제 정세 변화와 남북 군사적 긴장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제2서울'로 개발된 강남 
 
1970년 11월 5일 특별기자회견을 통해 한강 이남에 ‘제2서울’을 개발하겠다는 내용을 발표한다. 그는 자신의 임기 동안 개통된 서울 지하철 공사장을 누비고 다녀 ’두더지 시장’으로 불렸다. 서울지하철 개통식 날인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행사장에서 육영수 여사가 피격되어 사망하면서 서울시장에서 사임한다.
▲ ‘남서울계획’을 발표하는 양택식 시장 1970년 11월 5일 특별기자회견을 통해 한강 이남에 ‘제2서울’을 개발하겠다는 내용을 발표한다. 그는 자신의 임기 동안 개통된 서울 지하철 공사장을 누비고 다녀 ’두더지 시장’으로 불렸다. 서울지하철 개통식 날인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행사장에서 육영수 여사가 피격되어 사망하면서 서울시장에서 사임한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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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5월 3일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두고 박정희는 고속도로 건설을 공약으로 언급하는데, 재선되자마자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밀어붙인다. 고속도로 건설 결정과 동시에 설계와 공사를 병행했다고 하니, 무모한 '속도전'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1968년 12월 서울-수원 구간을 개통하고, 1970년 7월 7일에는 경부고속도로 428km 전 구간을 개통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강남 대개발'로 이어진다. 제3한강교가 경부고속도로 시발점이 되면서 고속도로 부지를 확보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구획정리사업을 하면서 강남 개발을 시작한 것이다. 

1970년 11월 5일 양택식 서울시장은 특별 기자회견을 연다. 강남 일대 837만 평 땅을 개발해서 한강 이남으로 인구를 분산하고, 새로운 제2서울을 건설한다는 '남서울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강남 개발과 함께 강남과 강북을 잇는 다리도 연이어 건설한다. 1971년 11월 영동대교를, 1972년 7월에는 잠실대교를 개통한다. 영동지구에 이어 잠실지구까지 포함, 1300만 평에 달하는 강남 일대 개발은 이렇게 추진됐다. 

경부고속도로 용지를 무상으로 확보하기 위해 추진한 영동1지구와 달리 영동2지구는 다른 목적으로 개발했다는 증언이 있다.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 분야 핵심 요직에 있던 손정목은 영동2지구가 박정희 정권의 정치 자금 마련을 위해 정략적으로 추진되었다는 증언을 남겼다.

실제로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국장 윤진우는 25만 평 가까운 땅을 싸게 사들였다가 비싸게 되팔아 20억 원의 정치 자금을 마련한다. 당시 20억 원은 2003년 기준으로 5천억 원이 넘는 거액이다. 이렇게 마련한 정치 자금은 박정희가 김대중과 맞붙은 1971년 4월 27일 대통령 선거와 5월 25일 국회의원 선거 비용으로 쓰였다. 투기를 막아야 할 정부가 정권 차원의 부동산 투기를 했다는 증언이다.

한강 남쪽에 개발되기 시작한 '제2서울'은 처음엔 '강남'(江南)이라는 명칭보다 영등포의 동쪽 또는 영등포와 성동구의 중간이라는 의미로 '영동'(永東)이라 불렸다. 1962년까지 서울에서 한강 남쪽에 있는 지역은 영등포가 유일했다. 지금의 강남 지역을 영등포를 기준으로 '영동'이라 부른 건 이 때문이다.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강남 개발과 도곡정보문화도서관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태그:#도곡정보문화도서관, #말죽거리, #강남, #영동, #제3한강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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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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