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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이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였다면 올해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 있다. 탐방은 총 여섯 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 현충원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에 이어, 이번에는 <상도길>이다. - 기자말

▶ 코스안내 : ①숭실대학교 - ②부부독립운동가 박영준·신순호 집 터 - ③김영삼대통령기념도서관과 사저 - ④상도동 철거투쟁의 현장 - ⑤현대판 송덕비 <동작을 빛낸 인물> - ⑥복개천(상도천, 대방천) - ⑦장승배기 장승 - ⑧원충연 반정부음모 사건과 우덕주 대령

상도리와 성도화리가 합쳐지기 전부터 상도동은 불의에 저항한 민중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담긴 곳이다. 1904년 이 일대에서 앞서 정착한 주민들은 일제의 경부철도 공사와 러일전쟁을 위한 역부 강제 모집에 항의하여 수천의 시흥군민이 함께 한 '2차 시흥농민봉기'에 성도화리(현 성대시장 일대) 집강 신동희, 상도리(현 상도4거리 일대) 두민(頭民, 백성의 우두머리) 강희를 중심으로 참여한다.

'1차 시흥농민봉기'(1898)에도 상도리와 성도화리 주민들은 시흥군 일대 6개면 42개 동리 사람들과 함께 참여했겠지만, 번대방리 집강 김회상의 경우와 달리 '1차 시흥농민봉기' 당시 상도리와 성도화리의 주모자가 누구였는지는 애석하게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상도동 일대가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자랑스러운 역사만 간직하고 있는 곳은 아니다.

"당돌한 반역행위", "반민족자의 발악"
  
<당돌한 반역행위>(경향신문, 1948. 8. 28) 당시 언론은 이신태 등의 돌출행동을 <당돌한 반역행위>, <반민족자의 발악> 등으로 묘사하며 규탄하였다.
▲ <당돌한 반역행위>(경향신문, 1948. 8. 28) 당시 언론은 이신태 등의 돌출행동을 <당돌한 반역행위>, <반민족자의 발악> 등으로 묘사하며 규탄하였다.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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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경원 의원(자유한국당 원내대표, 동작구을)의 "해방 이후 반민특위로 국론이 분열됐다"는 돌출 발언이 연일 화제다. 각계의 규탄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더니 급기야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도 나섰다.

상도동에 살고 계신 101살의 독립운동가 임우철 선생이 직접 나서 "대표적 친일파 이완용이 3월 1일 전국민적 독립항쟁을 무산시키고자 3월 항쟁을 두고 '몰지각한 행동'이고 '반일 행동'은 국론분열이라는 망언을 한 것처럼, 오늘날에는 나경원이라는 몰지각한 정치인이 이완용이 환생한 듯한 막말을 하고 있다"며 의원직 사퇴를 촉구했다.

오늘의 목적지 동작문화복지센터 마당의 맞은 편 상도동 171번지에 살고 있던 이신태(28)라는 한 청년의 1948년 당시 돌출행동이 떠올랐다. 상도동 청년 이신태(28)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그 해 8월 27일 동료 차양보(27)와 함께 국회의사당 방청석에서 기습시위를 벌여 파문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이신태가 시위를 벌인 그날, 국회에서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축조·심의하고 있었다. 친일 반민족행위자 처단은 당시 민중의 공통된 숙원 사업이었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이들은 "반민족 처단법은 시기상조다!", "반민족 처단법안을 철회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삐라'를 살포하고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이신태는 사건이 있기 3일 전 남산에서 대혁청년단의 박성술로부터 모종의 지령을 받고, 그에게서 받은 삐라 중 일부를 구두 속에 숨긴 채 국회 방청석까지 들어갔다고 했다. 그가 속한 대혁청년단은 이북 지역에 기반한 우익 청년단체로 1947년부터는 서울에 지부를 설치하여 이남에서도 활동을 시작한 조직이었다. 이신태와 차양보 역시 이북 출신이었다.

이들은 삐라를 통해 "친일파를 엄단하라고 주장하는 자는 빨갱이"라면서 스스로 '애국청년'으로 불렀다. 친일파 처단 문제를 교묘하게 이념대립의 문제로 몰고 간 점도 그렇고, 자신이 마치 애국자인 양 행세한 점도 최근의 나경원 의원의 경우와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하지만 당시 <경향신문>은 이들의 돌출행동을 "당돌한 반역행위"라고 표현했고, 심지어 <동아일보>조차도 "반민족자의 발악"이라고 개탄했다.

반민특위가 국론 분열했다고? 당연히 '틀렸다'

이후 이신태와 차양보는 수도경찰청에 넘겨지지만, 처벌은커녕 연행된 지 불과 열흘 만인 9월 6일에 석방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된다. 이들의 배후에 엄청난 비호세력이 있었을 것임을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당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조병옥과 함께 이승만의 오른팔과 왼팔 역할을 하면서 친일파를 비호한 대표적인 인사였다.

해방 직후 38선 이남을 담당한 미군정은 이북지역의 소군정과 달리 친일파 처단에는 관심이 없었다. 미국에게 친일파는 "일본에 대해서 늘 그랬듯이 미국에게도 고분고분 말을 잘 들을 사람들"로 평가되었다. 그래서 미국은 조선총독부 관리, 친일 경찰, 일본군 장교 출신의 친일파들을 그대로 중용했다. 심지어 독립운동가 출신 정이형을 중심으로 하여 1947년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에서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법률조례'를 만들었을 때도 미군정은 이를 공포하는 것마저 거부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제헌국회는 이신태 등 친일파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한 제헌헌법 제101조에 근거하여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법령 제2호로 통과시켰다. 이어 이 법에 근거하여 김상덕을 위원장으로 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를 구성하고 1948년 10월부터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예비 조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반민특위는 친일파와 결탁한 이승만 정권의 지속적인 방해로 제대로 된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급기야 이승만 정권은 1949년 6월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과 극회프락치 (조작)사건까지 터뜨린 끝에 공갈과 협박에 성공하여 반민특위 활동을 사실상 무력화시키는 반민특위법 개정을 밀어붙였다. 결국 김상덕을 비롯한 반민특위 위원들은 전원 사퇴로 항의할 수밖에 없었고, 새로 구성된 반민특위(위원장 이인)는 사건을 대충 마무리한 채 1949년 10월에 해체되는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반민특위> 표석 시내 중구 롯데백화점 길 건너편에 있는 국민은행 주차장 입구에는 이 곳이 반민특위가 있었던 곳임을 알리는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 <반민특위> 표석 시내 중구 롯데백화점 길 건너편에 있는 국민은행 주차장 입구에는 이 곳이 반민특위가 있었던 곳임을 알리는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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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해방 이후 줄곧 제기되어 온 친일파 청산의 과제는 나경원 의원이 주장하듯 '반민특위 활동으로 국론이 분열'되어 '(이념)전쟁이 벌어지면서' 중단되었던 것이 아니다. "친일파를 엄단하라고 주장하는 자는 빨갱이"라며 활동 시작 전부터 이념논쟁으로 몰고 가면서 물리력까지 동원한 친일파의 방해공작을 막아내지 못해 끝내 좌절된 것이다.

현대판 송덕비... 누가 '동작을 빛낸 인물'을 정하나
    
동작문화복지센터 앞에는 동작문화원에서 세운 '내고장역사인물 유일한' 표석이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유한양행 창업자인 유일한 선생을 동작구의 역사 인물로 선정하여 1999년에 세웠다.

유일한은 비록 동작구 출신은 아니지만, 1963년 유한양행이 지금의 동작구 대방동으로 이전한 이래 1969년 사망할 때까지 회사 옆의 사택에서 '참기업인'으로 살았으니 '내 고장 역사인물'로 선정하는 데 주저함이 있을 수 없다(<독립운동가 유일한과 실미도 사건, 대방동에서 만나다> 참조).
 
<내고장 역사 인물 유일한> 표석 동작문화복지센터 마당에는 동작문화원이 설치한 <내고장 역사 인물 유일한> 표석이 있다. 유일한은 대방동에 있는 유한양행 설립자이자, 미국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인물이었다.
▲ <내고장 역사 인물 유일한> 표석 동작문화복지센터 마당에는 동작문화원이 설치한 <내고장 역사 인물 유일한> 표석이 있다. 유일한은 대방동에 있는 유한양행 설립자이자, 미국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인물이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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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동작문화원이 2010년 지방선거가 끝나기 무섭게 임기 만료를 눈앞에 둔 당시 구청장 김우중을 '동작구를 빛낸 인물'로 선정하여 또 하나의 표석을 설치하면서 발생했다. 마치 조선시대 말 임기를 마친 지방관이 고을을 떠날 때, 마을 어귀에서 흐뭇해 하도록 지역 유지들이 발 빠르게 세웠다는 그 송덕비를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당시 언론은 "왕조시대도 아니고 구청장의 송덕비라니 황당할 따름"이라며 "지금이라도 치우는 것이 조롱거리가 되지 않는 길"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조선시대도 아니고 공공시설 앞에 생존한 공직자 송덕비가 있다는 것 자체가 창피한 일"이라고 지적하는 주민 양아무개(40)의 말을 전하며 해당 표석이 동작 주민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도 알렸다.

하지만 이 표석은 동작주민의 의사와 무관하게 지금도 버젓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동작구를 빛낸 인물 김우중' 표석은 주민자치 시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현대판 송덕비로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될 것이다.
  
<동작을 빛낸 인물 가산 김우중>?  동작문화복지센터 마당에는 2010년부터 당시 구청장으로 있던 김우중의 공을 기리는 현대판 송덕비가 설치되어 있다. 구청장이 물러나기 직전 설치된 이 표석은 마치 조선시대 말기 탐관오리들을 위한 송덕비를 연상케 한다.
▲ <동작을 빛낸 인물 가산 김우중>?  동작문화복지센터 마당에는 2010년부터 당시 구청장으로 있던 김우중의 공을 기리는 현대판 송덕비가 설치되어 있다. 구청장이 물러나기 직전 설치된 이 표석은 마치 조선시대 말기 탐관오리들을 위한 송덕비를 연상케 한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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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이 낳은 대표적 인물 흑석동의 심훈 같은 이는 오히려 외면한 채 퇴임을 앞둔 구청장의 송덕비를 세운 당시 동작문화원의 '문화 수준'도 동작구민들의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상도리에서 일제강점기에 브나로드 운동이?

1931년 노량진에서 사회주의계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양정고보 학생 김만수, 김학수, 김명룡 등은 농촌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인민 속으로, <동아일보> 주최)의 일환으로 '상도리 숲'에서 약 20일 동안 61명의 주민을 대상으로 한 강습회를 여러 차례 개최한다.

김만수를 비롯한 이들 양정고보 학생들은 상도리뿐만 아니라 봉천리(현 관악구 봉천동)에서도 동시에 브나로드 운동을 동시에 추진했는데, 노량진청년회의 자매단체였던 노량진소년회에서 활동하던 멤버였다. 이들은 자신의 활동 기반인 노량진 일대의 상가를 직접 돌며 후원금도 모으고, 브나로드 운동을 주최한 <동아일보> 시흥지국(노량진에 위치)의 재정 후원도 받아가며 강습소를 운영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상도리, 봉천리 일대에서 수행한 열정적인 브나로드 운동은 지속되지 못한다. 이듬해 1932년 2월에 김만수를 비롯한 9명의 학생들이 소년독서회 사건으로 경찰에 연행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들이 참여한 노량진소년회 내 비밀 조직인 노량진혜성소년독서회가 오성세, 정종명 등의 재건준비위의 반제동맹과 연계되어 활동하고 있던 사실이 일경에 발각되고 만 것이다(<노량진이 독립운동가 주활동지 된 이유②> 참조).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바뀐 상도동이지만,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을 띠고 있던 1930년대, 양정고보생 김만수 등이 벌인 브나로드 운동의 현장 '상도리 숲'도 이곳 국사봉이나 서달산의 기슭 어디쯤이었을 것이다.

복개천, 지금은 사라져버린 상도천과 대방천

숭실대 앞길에서 동작문화원 앞길을 지나 성대시장통을 거쳐 대방동과 신대방동을 가로지르는 구불구불한 길 아래에는 예전에 상도천과 대방천으로 불리던 작은 하천이 있었다. 홍수 예방, 도로 확보 등을 명분으로 한 상도천과 대방천을 덮는 복개공사는 1966년부터 시작된다.
 
복개천으로 바뀌기 전 상도천의 모습 1966년부터 복개공사를 시작한 상도천의 옛 모습. 상도2동에서 찍은 사진이다. 지금은 구불구불한 도로로 덮여 있어 옛 모습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 복개천으로 바뀌기 전 상도천의 모습 1966년부터 복개공사를 시작한 상도천의 옛 모습. 상도2동에서 찍은 사진이다. 지금은 구불구불한 도로로 덮여 있어 옛 모습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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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971년 7월 <경향신문>에는 '복개 넘쳐 침수 소동, 상도동 주민 엉터리공사 항의'라는 제목의 기사가 등장한다. "서울시가 민간자본 유치로 복개한 개울이 넘쳐 개울 근처 주택이 물에 잠기는 등 주민들이 큰 피해를 보고 있다"며 "이 개울을 복개하기 전에는 물이 넘치지 않았는데 서울시가 업자의 공사비를 줄여주기 위해 하수량을 엉터리로 추정하여 용량이 모자라는 복개를 하게 했다"고 항의에 나섰다는 내용이다.

기사는 상도동 주민들이 시청까지 찾아가 항의한 끝에 "서울시 관계자의 시정약속을 받아냈다"는 글로 마무리된다. 상도동 주민들의 권리의식과 실천력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하지만 서울시의 시정 약속이 얼마나 철저하게 지켜졌는지는 의문이다. 상도천이 흐르는 성대시장 일대는 이후에도 상당 기간 상습 침수구역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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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