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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추억이라도 기억된 상태는 각각 다르다. 너무 아픈 상처여서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겨졌을 수도 있고, 너무도 소중한 기억이라 소중하게 기억의 곡간에서 때때로 꺼내 추억할 수도 있다. 대체로 기억에 오래 잊히지 않게 깊이 각인 된 건 대부분 말도 안 되게 견딜 수 없던 통증이 남긴다.

세상이 기억을 잊으라 강요하기도 한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어쩌면 먼 훗날 마지막 순간까지도 잊혀지지 않을 기억을 잊으라 강요한다. 누군가에겐 지독히도 아픈 통증으로 각인된 기억을, 또 누군가는 불편하다고 잊을 걸 강요한다.

그런 기억 가운데 세월호가 있다. 304명의 고귀한 생명들이 별이 되고 나비가 된 기억으로 깊이 각인됐다. '에바폼', '단무지', '팝콘'으로 기억되고 과정을 거쳐 '노란리본'으로 많은 이들의 옷깃이나 가방, 카메라 등 다양한 위치에 달려 기억의 고리를 잇는…

2014년 4월 16일 이후 얼마나 많은 리본을 만들었는지 모르고, 또 얼마나 많은 순간들을 사진으로 기록했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춤사위로 아픔을 위로하며 기억했고, 누군가는 광장 가득 울려 퍼지게 나팔을 불어 기억했다. 그 기억들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광화문광장의 남쪽 끝자리엔 세월호를 기억하는 이들의 공간이 있었다.
▲ 세월호광장 광화문광장의 남쪽 끝자리엔 세월호를 기억하는 이들의 공간이 있었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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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26일 광화문광장을 찾았다. 20여일 뒤엔 새로운 모습으로 기억하게 될 모습으로 변할 공간이기에 이 모습을 기록하기 위해서다.

2016년 11월 21일 '세월호광장'으로 불리며 '서울시 종로구 세종대로 172'로 주소가 정해진 광화문광장의 남쪽 맨 끝자리에 며칠간 작업을 하더니 대한적십자사가 세운 사랑의 온도탑이 개막식을 앞둔 모습이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세운 사랑의 온도탑 개막식이 있던 날.
▲ 사랑의 온도탑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세운 사랑의 온도탑 개막식이 있던 날.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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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엔 사랑의 온도탑 개막식에 유명 연예인이 참석한다고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방송과 신문 등 언론사도 취재를 왔지만 세월호를 기억하는 천막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여느 때나 마찬가지로 '노리공'으로 아는 이들끼리 줄여 부르던 노란리본공작소에선 밖의 소란스러움은 아무 관심도 없는 듯 모두 노란리본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다.
 
노란리본을 만드는 자원봉사자들.
▲ 노란리본공작소 노란리본을 만드는 자원봉사자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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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이 날 때면 노란리본공작소를 찾아 리본 만들기를 했지만 광화문광장 차일마을의 촌민으로 소속되어 있으니 그곳의 활동이 우선이다. 이틀 동안 민족미술협회 팀과 작업을 해 2016년 12월 10일 저녁엔 희망촛불을 밝혔다.
 
"촛불은 촛불일 뿐이다. 바람이 불면 촛불은 꺼진다"는 춘천 지역구의 자유한국당 김진태 국회의원의 발언에 민족미술협회가 항거의 뜻으로 기획한 희망촛불.
▲ 희망촛불 "촛불은 촛불일 뿐이다. 바람이 불면 촛불은 꺼진다"는 춘천 지역구의 자유한국당 김진태 국회의원의 발언에 민족미술협회가 항거의 뜻으로 기획한 희망촛불.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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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이면 광화문광장은 온통 노란색으로 물결이 일 듯 했다. 그리고 해치광장엔 304개의 구명조끼가 놓여 304명의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기억했다.
 
304개의 세월호 영령을 위한 구명조끼
▲ 구명조끼 304개의 세월호 영령을 위한 구명조끼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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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던 11월 26일 한 친구가 페이스북에 "보슬보슬 낭만적으로다 눈이 내린다. 애인과 광화문에서 '박근혜 퇴진!'을 외치기 딱 좋은 날"이라고 올렸다.
 
광화문광장의 대형화분을 활용한 세월호 추모 작품.
▲ 세월호를 기억하라 광화문광장의 대형화분을 활용한 세월호 추모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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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와 아이들의 모습을 광화문광장의 대형화분과 몇 개의 마네킹, 그리고 검은색 천과 노란색 천만으로 연출한 작품도 여린 모습의 작가 혼자 작업을 하고 있었다. 잠시 도와주며 그 의미를 알게 됐다.
 
성탄절을 맞아 세월호를 기억하는 이들은 나팔 세월호를 의미하는 깃발과 리본을 달았다.
▲ 나팔부대 성탄절을 맞아 세월호를 기억하는 이들은 나팔 세월호를 의미하는 깃발과 리본을 달았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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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부대가 광장에 나왔다. 이들은 행진이 시작되면 맨 앞에서 나팔을 불며 행진했다. 나팔부대의 나팔에도 세월호를 기억하는 리본이 그려진 커다란 깃발이 매어졌다.
 
김원경 자원봉사자가 쓴 세월호 참사 1000일을 알림판
▲ 세월호 참사 1000일 김원경 자원봉사자가 쓴 세월호 참사 1000일을 알림판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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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1000일, 2017년 1월 9일로 세월호가 침몰한지 1000일이 된다는 걸 알리는 알림판이 2016년 12월 28일 노란리본공작소 밖에 걸렸다. 공작실에서 자원봉사자들의 식사와 커피를 수시로 챙겨주는 김원경씨는 글씨를 예쁘게 써 수시로 여러 가지 내용의 알림판과 주변 사람들의 부탁을 받은 내용까지 썼다.
 
노리공으로 통할 수 있는 공작소는 2016년 겨울은 가장 따뜻했다.
▲ 노란리본공작소 노리공으로 통할 수 있는 공작소는 2016년 겨울은 가장 따뜻했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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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부담 안 가지셔도 돼요. 언제든 오셔서 커피도 드시고,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없는 거 빼곤 노리공에 다 있어요."

노란리본공작소에서 총무로 봉사하시는 전춘자 성생과 스스로 개구리라며 웃는 김원경씨가 오랜만에 시간이 난 덕에 사진촬영도 할 겸 잠간 동안이라도 봉사를 할 생각으로 들려 "자주 찾아 봉사를 못해 미안하다"는 내게 한 말이다.

리본을 만드는 재료인 에바폼부터 과정 하나씩 촬영하는데 누군가 물었다.

"그 사진 뭐 하시러 그렇게 찍어요?"
"글 좀 쓸까 싶어서요."


기사를 쓸 생각으로 촬영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 뒤 <오마이뉴스>에 내가 계획했던 기사가 "500원 가져와 노란 리본 만들어달란 아이들, 역사죠"란 제목으로 먼저 나왔다. 기사 제목은 전춘자 선생이 했던 말이다. 그리고 공작소엔 가끔 "리본 얼마예요"라며 동전이나 천원짜리 지폐를 꺼내는 학생을 만날 수 있다.

더러 1만 원을 후원금으로 내려다 지갑에서 다시 5만 원 지폐로 바꿔 내는 이들도 수시로 만난다.

노란리본이 만들어지는 과정
 
노란리본은 세월호가 침몰한 직후부터 세월호를 기억하는 표식이 됐다.
▲ 세월호리본 제작과정 노란리본은 세월호가 침몰한 직후부터 세월호를 기억하는 표식이 됐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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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사진 아래 오른쪽에서 오른쪽으로 소개한다.

주문한 에바폼이 노란리본공작소 앞에 배달되어 왔다. 주문한 날 당일 낮이나 저녁이면 몇 곳 거래처에서 에바폼과 군번줄이 배달되어 온다.

에바폼을 몇 장씩 판에 올려 자를 대고 리본의 폭이 될 일정한 간격으로 칼로 자르는 작업을 한 뒤, 다시 리본의 모양을 형성하기 전단계로 길이를 일정하게 자른다. 이 재단 작업은 판화 작업을 하는 정찬민 작가가 도맡아 했고, 현재 노란리본공작소의 총무로 활동한다.

이 상태를 단무지를 닮았다고 공작소에서는 "단무지 줘요"라 한다. 단무지 달라는 말은 그 다음 단계 작업을 한다는 또 다른 표현이다.

그 다음 단계로 단무지로 불리던 에바폼이 '팝콘'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과정이다. 순간접착제를 뾰족한 대나무꼬지에 찍어 리본모양으로 말아 쥔 사이에 순간적으로 정확하게 발라 꼭 눌러주면 완성된다.

처음 이 작업을 하는 이들은 사선으로 잘린 양쪽 끝의 긴 부분이 바깥쪽으로 향하게 말아 접착작업을 해 놓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엔 불량으로 고칠 수 있는 경우엔 모두 다시 작업을 해야 된다. 이렇게 반대로 말아 접착한 건 팝콘이 아니라 모 협동조합의 마크를 닮았다고 한다.

제대로 접착돼 팝콘은 박스에 담아 두었다가 처음 봉사활동을 하러 공작소를 찾은 이들에 의해 군번줄이 끼워진다. 군번줄까지 끼워져야 가방이나 카메라, 옷의 지퍼와 단춧구멍 등에 걸리는 노란리본이 된다.

그 다음으로 50개부터 100개, 200개, 500개 등의 수량으로 포장되어 전국으로 보내질 준비를 마친다. 우편으로 배달될 준비를 마친 노란리본이 포장된 우편물 봉투다.

노란리본공작소는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운영된다. 그리고 모든 비용은 순수한 후원금에 의해 진행될 수 있다. 집에서 김치 등의 반찬을 가져오는 이들도 있고, 간식도 챙겨와 함께 나눈다. 자원봉사를 하는 이들을 위해 간식과 식사를 챙기며 김원경씨는 웃으며 말한다.

"있을 때 먹어둬요. 이것도 없으면 못 먹어요."

다른, 그리고 같은 참여
 
대형 걸개그림 하나, 거기에 노란나비나 노란색 별 모두 자원봉사자들과 익명의 후원자들의 힘으로.
▲ 세월호 대형 걸개그림 하나, 거기에 노란나비나 노란색 별 모두 자원봉사자들과 익명의 후원자들의 힘으로.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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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침몰 1000일을 앞 둔 2017년 1월 3일 노란리본공작소와 진실마중대에 걸린 커다란 걸개그림이다.

이때 '1000개의 태양을 만나고'를 썼다.

1000개의 태양을 만나고

여기 한 어미의 무너진 슬픔
피 맺힌 절규로 일렁거린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데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
그들은 슬픔조차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
잊지 않으마
죽어서도 절대 잊지 않으마
어미가 어찌 네 초롱한 눈빛 지울 수 있느냐

퍽퍽한 빵 한 조각도 미안해
천 날의 태양이 빛나도
다시 맞을 그 빛은 네 목소리였으면
아비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그림을 그렸다
완벽하게 아픈 불면의 밤
바다를 한 양동이 길러 그렸다
푸르고 검은 세상에서 별이 된
이름들을 온 몸 내던져 그렸다

다시 또 하루를 잊지않겠노라
완벽하게 푸르고 검은 바다에 그린다
별이 된 그 얼굴, 그 이름들을.

 
깊은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던 공작소
▲ 노란리본공작소 깊은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던 공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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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일을 사흘 앞 둔 노란리본공작소는 다음날 치러질 박근혜 퇴진 11차 집회에 나눌 노란리본을 준비하는 자원봉사자들이 밤새도록 함께했다. 경북 청송에서 광장에 세울 극장 블랙텐트 구조물을 뜯어 옮겨와 밤 10시 넘어 늦은 저녁을 먹고 돌아오다 촬영했다.

촬영만 하고 지나칠 수 없어 잠시라도 함께 할 생각으로 공작소에 들어갔다. 자정이 넘은 걸 확인하고 광화문광장의 화장실을 들려 세수를 하고 텐트에 들려 노트북을 챙겨 도로 건너 2층 커피숍으로 갔다. 전화와 보조배터리를 충전하며 '그 날에'를 썼다.

그 날에

그날
구름 낮게 드리운 바다
꿈이었음 싶었으나
마음이 허물어지는 걸 함께 보았지

해를 가리고
숲을 삼켜버리던
전혀 무게를 가늠할 수도 없던 투명함이
어둡게 무늬를 그리는 걸 함께 보았지

빛이 가려진 그때
더 명료해진 시선은
깊이를 가늠할 길 없이 무거웠고

그림자에 갇힌 숲
일제히 흔들리며
꼭 그렇게 물결로 아득했지

밤과 같은 낮들이
하루
이틀
그리고 다시 또 얼마나 더
그날 같은 오늘과 내일을
무자비에 환장할 노릇일지

 
촛불집회의 행진 선두엔 나팔부대가 자리했다.
▲ 나팔부대 촛불집회의 행진 선두엔 나팔부대가 자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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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번째 박근혜 퇴진 집회가 있던 날은 이른 아침부터 극장을 세웠다. 오후 4시에 블랙텐트의 지붕에 극장임을 알리는 '극(劇)'자를 쓴 깃발이 걸리자 나팔부대가 힘차게 나팔을 불기 시작했다.

청운동에 저녁약속이 있어 이동하는데 행진을 하던 나팔부대와 마주쳤다.
 
장순향 전 한양대 무용학과 교수의 추모 춤.
▲ 세월호 추모 춤 장순향 전 한양대 무용학과 교수의 추모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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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온은 차도 햇살이 좋았던 2017년 2월 18일 15번째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가 있었다.

장순향 무용가가 배와 그물 모양으로 제작한 소품으로 세월호 추모 춤을 췄다. 그의 맨 오른쪽에서 이삼헌 민족춤협회 이사가 함께했다.
 
봄을 맞은 광화문광장에 선 나팔부대
▲ 나팔부대 봄을 맞은 광화문광장에 선 나팔부대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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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에서 2017년 3월 10일 전 국민적 관심 속에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 사건에 대한 '탄핵 인용' 결정문을 이정미 재판관이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선고함으로 제18대 대통령 박근혜 파면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3월 17일 광화문 춤행동의 평가토론회, 18일 광장극장 블랙텐트 천막해체, 20일 광화문 차일마을 해단식, 21일 광화문 미술행동의 촛불 역사전 철수로 이어지는 숨 가쁜 일정이 이어졌다.

그러나 2017년 3월 25일 토요일이 되자 어김없이 광장엔 촛불을 든 시민들이 나왔다. 한결 가벼워진 옷차림이 마침내 광장에 봄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했다.

그들은 "세월호를 인양하라"고 외쳤다. 여전히 그들과 세월호 리본, 깃발이 함께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정덕수의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실립니다.


태그:#광화문광장, #세월호, #노란리본공작소, #촛불집회, #나팔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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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보고, 많이 듣고, 더 많이 느끼고, 그보다 더 많이 생각한 다음 이제 행동하라. 시인은 진실을 말하고 실천할 때 명예로운 것이다. 진실이 아닌 꾸며진 말과 진실로 향한 행동이 아니라면 시인이란 이름은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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