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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빨간약, 우린 어디에] 에세이 연재를 시작합니다. 
한국여성노동자회 영영페미 그룹 <페미워커클럽>은 페미니즘과 노동을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의 소모임 입니다.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노동을' 혹은 '노동의 관점으로 페미니즘을' 사유하며 세미나를 진행했고, 각자의 삶과 노동을 재조명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페미니즘이라는 빨간약은 그간 억눌려 자책하던 우리에게 큰 해방감을 주었지만, 사실 페미니스트로 스스로를 정체화 한 후에도 갈등은 계속됩니다. 현실과 이상, 상황과 존재의 위치 속에 발생하는 수많은 고민들... 이러한 맥락에서 <페미워커클럽> 멤버들이 나누어온 이야기를 보다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자 에세이로 적어 연재합니다. 


"A야, 나가자."

선생님이 A를 불러내는 소리에 나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거두고 나갈 채비를 하는 A를 곁눈질했다. 쉬는 시간마다 선생님은 A와 함께 학원 건물 옆에서 담배를 피웠다. 왜 선생님은 그저 수강생 중 하나인 A랑만 담배를 피우는지 모를 일이었다. 수강생 중 흡연자는 A말고도 많았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A가 20대 중후반인 수강생 다수와 달리 30대라는 것이었고 남성이라는 것이었다. 사회생활 짬도 어느 정도 찼고 같은 '남자'이니까 선생님은 A를 더 편하게 맞담배 상대로 생각했겠지. 그렇게 선생님은 6주 동안 쉬는 시간을 A를 불러내는 소리로 알렸다.

아주 이해 못할 행동은 아니었다. 나도 아르바이트를 할 때 휴게시간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며 담배를 피우곤 했으니까. 하지만 선생님과 수강생이 같이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그것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호 간의 위계가 존재하므로 맞담배를 하며 나누는 시시껄렁한 애기도 그저 시시껄렁한 얘기로 남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한 업계에 오래 종사하다 나와서 강의를 하는 만큼, 선생님은 그 업계를 떠도는 사적인 정보를 잘 알고 계실 것이다. 선생님과 A가 다른 수강생 얘기나 아침에 섭취한 음식 애기보다는 그런 사적인 정보들을 주고 받으면서 사제관계를 돈독하게 하려 하지는 않았을까.
  
 tvN 드라마 <이번생은 처음이라>에서는 우수지(이솜 분)의 직장 남성 동료들이 우수지를 향해 '은근한' 성희롱, 성차별을 가한다.
 tvN 드라마 <이번생은 처음이라>에서는 우수지(이솜 분)의 직장 남성 동료들이 우수지를 향해 "은근한" 성희롱, 성차별을 가한다.
ⓒ tvn 이번생은 처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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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애들은 오픈마인드가 부족해"? "페미니즘은 많이 팔리는 주제니까"?

"이 업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바로 오픈마인드야." 라고 말하며 선생님은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켰다. 수업이 끝난 오후, 한 전집에서 회식 아닌 회식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전집에 앉아있던 수강생들은 젓가락질을 멈추고 경청했다. 선생님은 업계 사람들과 제대로 소통할 수 있어야 일의 모든 과정이 원활해진다고 했다. '이런 말 하긴 뭐 하지만' 술자리가 그래서 중요하다고 했다. 술자리에는 허심탄회한 이야기들이 오고 가므로 업계 관련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돈독해질 수 있다는 게 요지였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이 자리에 '여자애들'이 오지 않은 것들을 지나가듯 지적했다. 칼같이 뭐는 되고 뭐는 안 된다고 구분 짓는 태도는 오픈마인드를 가로막는다는 것이었다.

'뭐는 안 된다'는 구절의 '뭐'는 술자리나 칼퇴를 의미하겠지, 라고 생각하며 눈알을 굴리자 선생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남성 수강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속에서 알 수 없는 짜증이 왈칵왈칵 올라왔다. 그 술자리의 여성은 정말 나뿐이었고, 나조차도 술자리에서 오가는 업계에 대한 비공식적인 정보를 획득하고자 그 자리에 참석한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런 식으로 술자리를 '올려치기'하는 건 싫었다. 술 잘 못 마시는 사람은 배제되는 거니까. 그리고 선생님이 말하는 술자리가 '사회생활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가게 되는 그런 곳'으로 이어지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을까. 왈칵 올라오는 짜증에 나는 선생님 들으란 듯 옆에 앉아있던 B와 딴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나한테 지방 방송 끄라며, 그게 바로 오픈마인드에 벗어나는 태도라고 날카롭게 말했다.

술자리가 길어지자 선생님은 취했고 나머지 수강생들은 말이 많아졌다. 선생님이 이제 집으로 향한다고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자, 구석에 앉아있던 A가 느닷없이 튀어나와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나섰다. 또 시작이라는 생각에 나는 눈알을 굴렸고 옆의 B는 나를 보며 다 안다는 듯 웃었다. 나는 느닷없이 B에게 혜화역 시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B는 자기는 페미니즘을 지지하지만 그런 식의 과격함은 잘못됐다고 단언했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이 방금 선생님께서 설파하신 오픈마인드에 벗어나는 거 아닌지요, 하고 비꼬았다. 그러자 B는, 하긴 페미니즘이 많이 팔리는 주제니까요, 제가 할말은 없죠, 라며 멋쩍은 듯 웃었다.

초미세먼지 같은 은근한 성차별, 뭐라고 얘기해야할까?

6주 간의 수업이 끝난 후 종강기념 회식자리. 술자리가 무르익자 A와 선생님을 포함한 흡연자들이 밖을 나서는 걸 보고 나도 뒤따라 나섰다. 흡연자 무리 중 여성 수강생 한 명한테 담배 한 까치를 빌려 피워 물며 나는 선생님에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스앵님은 왜 쉬는 시간 마다 A씨를 찾으시는 거에요? 이렇게 흡연하는 사람들 많은데." 여성 수강생 두 명이 내 말에 동조하며 끼룩끼룩 물개박수를 쳤다.
선생님은 당황한 듯, "아니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A랑 같이 담배 피우는 게 뭐 잘못된 거냐." 라고 답했다. 그런데 그 말이 나를 찔렀다. 남성 흡연자 두 명이 같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회식자리의 남성주의적 양상을 어떻게 비판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조차도 선생님한테 왜 그 많은 흡연자 중 A만을 골라서 데려가냐는 푸념을 비판이랍시고 하지 않았나.

메갈리아 이후, 나는 성차별적인 언어와 맞서는 법을 서서히 배웠다. 아니 배웠다기 보다는 구역질 나는 몇몇 발언을 더 이상 인내하지 못하게 되었다. 몇 달 전 할머니네 김장에서 술에서 덜 깬 외삼촌이 사촌언니에게 "살은 좀 뺐냐", "살 너무 빼지 마라, 여자가 만질 게 있어야지"라고 했을 때, 내가 정색하며 "'이런' 자리에서 '그런' 말을 들을 줄 몰랐다"고 역정을 낸 것도 무의식적인 반응에 가까웠다. 명백한 성차별과 성희롱을 마주했을 땐 피부에서부터 반응이 온다. 성차별적인 언어가 떠도는 공기가 피부를 짓누르는 것 같아 나는 이제 비판 받을지라도 잘못됐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됐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맞담배'와 '술자리'에서 오갔던 남성들의 언어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른다. 학원에서 선생님이 A를 맞담배 상대로 지정한 것도, 선생님이 술자리의 장점만을 극대화해 강조한 것도, 맞담배와 술자리의 양식을 잘 체화한 A도, 페미니즘이 잘 팔리는 주제니까 인정해주겠다는 양 구는 B도, 나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초미세먼지처럼 스며들어 깔짝깔짝 신경을 건드리는 '맞담배'와 '술자리'와 같은 양상 앞에선 '내가 예민한 게 아닐까'하며 여전히 검열의 잣대를 나 자신에 들이댄다.

'맞담배와 술자리의 구조가 선생님과 A 같은 사람을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 '맞담배와 술자리가 다수의 남성으로 채워지니 B 같은 사람이 멋대로 페미니즘을 평가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들이 머릿속을 넘나들지만 그것들을 입 밖으로 꺼내는 건 어렵다. 입 밖으로 꺼내도 문제의 핵심은 건들지 못한 채, 어떠한 경고도 불편함도 설파하지 못한 채, '좋았던 분위기를 흐린다'류의 비난만 받을 것 같아서일까.

'맞담배'와 '술자리'가 소외시키는 존재들을 위하여

그럼에도 나는 앞으로 미세하게 신경을 건드는 성차별도 불편하다고 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술자리'와 '맞담배'로 소외시키는 존재들이 곧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적나라한 성차별뿐만 아니라 은근한 성차별에 대해서, 그러니까 맞담배와 술자리가 특정 성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양상들에 대해서, 뚜렷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면 좋겠다. 무겁게 짓누르는 공기 같은 발언뿐만 아니라 초미세먼지 같은 성차별도 걸러내고자 하는 필터가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서 작동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경험을 공유한다. 은근하게, 축축하게, 스며드는 성차별적 기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복잡한 심경일 모든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당당하게 꺼내어 '이것도 성차별이었고, 나는 그 사이에서 배제되는 것 같이 느꼈다'고 주장할 수 있길 바라며.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여성노동자회 영영페미 모임 '페미워커클럽'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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