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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빨간약, 우린 어디에] 에세이 연재를 시작합니다. 
한국여성노동자회 영영페미 그룹 <페미워커클럽>은 페미니즘과 노동을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의 소모임 입니다.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노동을' 혹은 '노동의 관점으로 페미니즘을' 사유하며 세미나를 진행했고, 각자의 삶과 노동을 재조명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페미니즘이라는 빨간약은 그간 억눌려 자책하던 우리에게 큰 해방감을 주었지만, 사실 페미니스트로 스스로를 정체화 한 후에도 갈등은 계속됩니다. 현실과 이상, 상황과 존재의 위치 속에 발생하는 수많은 고민들... 이러한 맥락에서 <페미워커클럽> 멤버들이 나누어온 이야기를 보다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자 에세이로 적어 연재합니다. 


나는 20살에 경제적 이유로 대학을 입학하고 바로 취직을 했다. 첫 회사는 통신사 콜센터였다. 동종업계 최고 대우를 한다는 회사에 사회초년생인 내가 지원을 하는 것은 매우 떨리고 긴장되는 일이었다. 꼭 합격하고 말겠다는 다짐으로 며칠 동안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고 최종 면접을 보러갔는데, 면접 날 나는 합격의 기쁨보다 현실의 처참함에 압도되었다.
  
"결혼한지 얼마 안됐는데 아이는 언제?" 질문에 임신사실 숨겨

4~5명씩 한조로 묶어 면접을 진행했는데,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경력직이었고 나이도 어느정도 있었다. 속으로 이렇게 아무 것도 모르고 경력도 없는 나보단 나머지 면접자들이 뽑힐거라 생각했다. 면접관이 바로 내 옆자리 면접자에게 질문을 했다. " 결혼한지 얼마 안됐네요? 아이 가질거에요? 임신하면 회사는 어쩔거에요?"
면접자는 결혼한지는 얼마 안됐지만 아이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아이가 생겼을 땐 출산휴가를 사용하고 복귀하겠다고 말했다. 다른 질문엔 너무 능숙하게 대답하고 경력도 많았으나 그녀는 불합격했다. 나는 결과를 보며 결혼과 출산에 대한 질문이 나왔을때 면접장의 분위기를 상기했다. 회사를 위해서 결혼을 꼭 늦게하거나 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입사하고 육성실 발령시 막내인 내가 임신을 했다. 수습기간에 임신 사실을 들키면 짤릴 것 같아서 제일 친한 동료 두사람에게만 말하고 비밀로 했다. 쉴틈 없이 입덧이 올라와 게워내도 요즘 속이 안좋고 체해서 그렇다며 둘러댔다.

수습 해제 직전에 임신 사실을 들켰는데 상사는 왜 말을 안했냐고 말했다. 꼭 자기를 죄인 만들었다는 어투였다. 그런 분위기를 형성해서 압도되었던 여성 노동자의 고민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수습 초반에 말했으면 나는 수습 통과를 했을까?

임신 사실을 밝힌 후 더 눈치를 주는 회사

 
 <미생> 속 한 장면.
 <미생> 속 한 장면.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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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습 해제되고 이제 한시름 놓았다 싶었더니 생각과 다르게 더 힘들어졌다. 먹고 살아야하고 가정을 꾸려하니 나는 만삭 때까지 회사를 다녔다. 지하철 최고 혼잡도 구간을 배를 감싸고 탑승하고, 그것도 안되겠다 싶어 원래 출근 시간보다 한시간 일찍 나와 사람이 없고 돌아가는 노선을 탔다.업무시간 중 임신으로 인해 화장실에 자주가게 되었는데, 자꾸 자리를 비워 실적(콜 수) 못 채우는거 아니냐는 눈치를 주어 오줌을 참다가 방광염에 걸릴 뻔 했다. 실적이 안나온 날이면 상사 앞에 한 시간이고 서있었다. 잘못한 걸 생각하라는데 잘못한 게 없었다.

직무 시험을 위해선 연장근무도 피할 수 없었다. 강요가 아니고 은근한 눈치를 주는 것이라 자발적인 연장근무라고 포장되었다. 임신 노동자에게 초과근무 시킬 수 없고 단축근무 전환할 수 있다고 정해놓은 법 따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조산 증세를 보여 조기 휴직에 들어갔다. 휴직 중에도 출산 후 복귀할거냐 최사에서 계속 연락을 받았다. 나는 회사에서 죄인이었다.

취업에 독이 되는 가족사항

이후 이사를 가게 되어 이전 직장에서 퇴사를 하고, 이직을 준비했다. 둘째 아이를 낳고 홑벌이로 4인 가구 생활이 어려워 출산 40일 만에 구직을 했다. 나는 11곳에 면접을 봤고 모두 탈락했다. 이유는 너무 어린 아이의 엄마라서 였다. 모두 사무직 면접을 봤는데 경리나 사무직 여직원이면 사무실 청소도 해야하고, 잡일을 해야하는데 산후조리가 안되어 부담스럽다고 했다. 아이가 아프면 회사를 빠질 것 아니냐 물어봐서 아이를 돌보아줄 시부모님이 계시다고도 했지만 안된다고 했다.

만약 남편이 같은 상황에서 이직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도 그 이후 이직을 했지만 나와 같은 상황은 단 한 번도 겪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지원한 회사에는 이력서에서 가족사항을 빼고 기재했다. 합격하고 출근은 했지만 전 회사처럼 수습기간에 아이가 있다는 게 알려지면 불이익을 받을까봐 마르지 않은 모유를 화장실에서 짜내며 근무했다.

한 직원이 눈치를 채고 알게 되었으나, 나는 수습 끝나기 전까지 사장님께 비밀로 해달라 부탁할 수 밖에 없었다. 자녀가 나의 인생에서 오점이 되고, 가족사항이 나의 취업에 독이될 줄 몰랐다. 다시 태어나면 절대 여자로, 엄마로, 아내로 살고 싶지 않다고 이를 갈며 다짐했다. 너무 서글픈 일이었다.

노동조합과 페미니스트가 만나면? - '성평등위원회'를 만들다

마지막으로 취업한 회사는 현장직과 내근직으로 이루어진 회사다. 현재까지도 다니고 있는 회사이며, 내근직에 대한 대우와 인식때문에 노동조합에 가입하기로 결심했다. 내근직은 아무래도 현장업무를 전산으로 처리하고 도와주는 일을 주로 한다. 그래서 초반엔 '부수적인' 일이다 라는 인식이 강했다. 주로 여성노동자들로 이루어진 내근직이 만만하니 감정 쓰레기통, 욕받이, 잡부로 취급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심지어 노동조합의 임금협상에서도 이런 인식이 나왔다. 당연히 현장직이 더 힘드니 기본급 자체에 차등을 두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던 것이다. 같은 직급으로서 같은 회사에서 말도 안되는 일이었으나 결국 남성 현장직들이 요구한대로 임금협상이 타결되었다. 성(性)을 떠나 노동자로서 이런 취급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평등을 알리고자 더 활동하기로 결심했다.

노동조합은 뭔가 깨어있는 인식을 가지고 있을줄 알았으나 오산이었다. 남초 회사인만큼 기성세대 남성들의 인식과 사고가 압도하고 있었다. 90%의 남성 조합원들이 여성 노동자들이 어떤 고충을 겪고 있는지 알지도 못했고, 공감받고자 하는 기대는 사치였다. 굳이 공감하자면 '힘들겠다' 정도인데 소수인 여성 노동자들이 그 무리에 결합하는 것은 무리였고, 어떻게 힘을 합쳐 투쟁해야하는지 함께 고민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조합 안에 '성평등위원회'를 만들었다. 우선 추진위로 시작해서 여성 노동자의 권리뿐만 아니라 성평등 노동을 이룩하자는 꿈을 가지고 기획했다. 순탄한 길이 아닐거라 예상은 했다. 우선 추진위원 개개인이 가지고 있던 사고의 틀을 깨부수어야 했고, 더욱 많이 공부해야했다. 널리 알리고자. 주마다 모여 회의하고 토론회, 집담회 활동도 했다. 아직 눈에 보이는 변화가 있진 않지만 내실을 다지는 단계라고 생각하고 준비하려 한다. 이러한 움직임만으로도 노동자들 안에 차츰 조심하고 의식하려는 사람들이 보이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다시 찾아온 페미니즘의 봄과 함께 성장의 전망이 더욱 밝으리라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여성노동자회 영영페미 모임 '페미워커클럽'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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