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베트남 종단 열차
 
베트남 종단 열차를 타자
 베트남 종단 열차를 타자
ⓒ 이희동

관련사진보기

 
다낭에서 후에까지는 그랩을 타고 왔지만, 후에에서 다낭은 기차를 선택했다. 그랩이나 택시가 약 7만 원인데 반해, 기차는 다섯 식구 모두 해서 2만원이 채 안 되는 가격이었고, 시간도 크게 차이 나지 않았으며, 언제 또 베트남 종단 열차를 타보겠냐며 아내가 강하게 주장한 덕분이었다.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의 침략과 함께 도입되었을 베트남의 철도. 철도는 식민지 수탈을 자행하는 열강들의 수단이기도 했겠지만, 동시에 베트남을 근대국가로 만드는 초석이었을 것이다. 베트남인들은 하노이에서 사이공까지 기차로 가면서 우리가 하나의 국가임을 되새겼을 것이고, 기차를 통해 근대의 힘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 기차를 한 번 타보자.

어제와 마찬가지로 맛있게 베트남 가정식을 먹은 뒤 우리는 기차역으로 향했다. 너무도 아쉬워하며 우리를 배웅해주는 에어비앤비 주인. 7살 막내는 택시 안에서 주인 할아버지랑 헤어지는 게 너무 슬프다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단지 이틀 밤을 잤을 뿐인데, 성심을 다하는 것은 7살 꼬마도 느낄 수 있는 거구나.
 
에버지앤비 할아버지와 함께
 에버지앤비 할아버지와 함께
ⓒ 정가람

관련사진보기

 
후에역에 도착하니 줄지어 서 있던 택시 기사들이 주위로 몰려들었다. 어디 가냐고 묻는 사람들. 기차로 다낭까지 간다고 하니 그때부터 잡담이 이어졌다. 몇 살이냐, 어디서 왔느냐 등등. 우리가 한국인이라 하자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박항서 감독으로 이어졌다. 오늘 아시안컵 축구 대회에서 베트남과 요르단 경기가 있는데 자신들은 박항서 감독을 믿는다던가. 아내는 자신이 박감독과 같은 경남 산청군 출신이라며 숟가락을 보태기도 했다.

기사들과의 대화를 끝내고 들어간 대합실. 많은 이들이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외국인도 간혹 보였지만 대다수가 베트남 현지인들로서, 그들에게 기차가 얼마나 주요한 교통수단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긴. 역사도 역사지만 어제 후에를 오면서 봤던 고속도로의 상태가 엉망이었으니, 현지인들도 현실적으로 기차를 선호할 수밖에.
 
처음 타보는 기차 침대칸
 처음 타보는 기차 침대칸
ⓒ 이희동

관련사진보기

 
이윽고 기차가 들어왔다. 우리 가족은 기차 안에서도 가장 좋은 4인 침대칸에 올랐다. 이런 곳이 2만 원도 안 되다니. 아이들은 처음 타보는 기차 침대칸에 흥분했고, 4개의 침대를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아내는 중국 유학 시절에 탔던 기차 침대칸을 떠올렸고, 난 유럽 배낭여행 때 탔던 밤기차 침대칸을 떠올렸다. 침대칸에서 맥주를 마시며 기차로 국경을 넘을 때의 그 짜릿함. 남북 관계가 좋아지면 우리도 곧 그런 기차를 탈 날이 오겠지.

후에에서 다낭까지 고속도로 옆으로 달리던 기차는 하이번 고개에 이르자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제 그랩으로 올 때는 꽤 긴 터널로 왔었는데 기차는 터널이 없었다. 고속도로보다는 기차가 먼저였으니 100년 전쯤 베트남 사람들이 열강의 강압에 의해 철도를 놓으면서 이 험한 산에 기찻길을 직접 만들었을 것이다. 깎아지는 절벽 밑으로 보이는 바다. 이 철도를 만들면서 얼마나 많은 베트남 민중들이 고초를 겪어야 했을까.

베트남의 옛 모습, 호이안 올드타운

다낭역에서 내려 호이안의 숙소까지는 픽업 차량으로 이동했다. 호이안은 다낭으로부터 약 30km, 40분 정도 되는 거리에 떨어져 있었는데, 차는 바다를 옆에 끼고 해안도로를 내달렸다. 시원하게 뻗은 해안도로. 그러나 바다는 띄엄띄엄 보였다. 해안가에 들어서 있는 수많은 리조트가 풍광을 가리거나, 앞으로 들어설 리조트의 공사가 시야를 방해하는 탓이었다.

하야트, 쉐라톤, 빈펄 등 이름만 들어도 알 것 같은 유명한 리조트들. 씁쓸했다. 공공재였을 바닷가가 대자본의 차지가 되어 있는 모습이라니. 물론 베트남도 사회주의 국가인 이상 중국처럼 소유 대신 장기임대 개념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어쨌든 자본주의 개방과 함께 바닷가도 돈을 내야 갈 수 있다는 것은 서글픈 현실이었다.
 
다짜고짜 수영장
 다짜고짜 수영장
ⓒ 이희동

관련사진보기

 
호이안 숙소 도착. 아이들은 숙소 앞마당에 설치되어 있는 수영장으로 곧바로 들어갔고, 우리 부부는 나름대로 망중한을 즐기며 여독을 풀었다. 아내는 베트남에 도착하면서부터 컨디션이 엉망이었는데, 사흘이 지난 이제야 경우 적응을 하는 듯했다.

5시쯤 되었을까? 아이들을 수영장에서 꺼내어 씻긴 뒤, 저녁도 먹고 산책도 할 겸 호이안 올드타운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요즘 한국 사람들이 베트남 다낭에 오면 꼭 들린다는 바로 그 '핫 스페이스', 호이안 올드타운이었다.

올드타운은 엊그제 봤던 다낭과 후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다운타운 전체가 유네스코의 유적으로 지정되었다더니 과연 그 명성대로 아름다웠다. 베트남의 옛 가옥들이 예전 모습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고, 밤이 되니 조명으로 그 아름다움은 배가 되었다.

 
맛있는 저녁을 먹은 뒤
 맛있는 저녁을 먹은 뒤
ⓒ 이희동

관련사진보기

   
호이안 올드타운 야간 보트
 호이안 올드타운 야간 보트
ⓒ 이희동

관련사진보기

 
우리로 치면 개념상 낙안읍성마을과 비슷한 듯했는데, 호이안의 올드타운은 훨씬 더 활기가 넘치고 세련되었으며, 실용적이고 아기자기했다. 마치 전주의 한옥마을을 걷는 것 같다는 아내. 그래, 후에가 경주라면, 다낭은 창원이요, 호이안은 전주 같았다.

그래도 결혼 10주년 기념 여행인지라 나름 비싼 레스토랑에서 맛있게 저녁을 먹고 여유를 즐기고 있는데, 매니저로 보이는 이가 다가왔다. 음식이 어떠냐고 묻던 그는 이어서 호이안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제 갓 돈이 흘러들어가는 다낭과 달리 호이안은 고풍스럽고 전통적이며, 인간적이고 살기 좋다는 등등. 그의 말에는 원주민의 자부심이 섞여 있었다. 우리네 안동 같은 느낌이랄까?

베트남에서 2002년 한일월드컵을 떠올리다

레스토랑에서 나와 호이안 밤거리를 돌아다녔다. 소위 '열대과일의 왕'이라는 두리안을 사먹었고, 호이안 올드타운에 오면 꼭 타야 한다는 야간 보트 투어도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인터넷에서 찾아봤을 때는 많은 인파로 항상 붐비는 호이안의 밤거리였는데 너무 조용한 탓이었다. 뭐지?
 
베트남-요르단 경기 시청 중
 베트남-요르단 경기 시청 중
ⓒ 이희동

관련사진보기

  
의문은 쉽게 풀렸다. 거리 한 가운데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모여 TV를 시청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오늘 아침 기차역에서 들었던 아시안컵 베트남-요르단 축구 경기였다. 상점 주인들이 가게를 닫고 단체로 모여 축구 경기를 시청하고 있었다. 어쩐지. 거리가 조용하더라니.

경기는 연장전 후반 막바지였다. 점수는 동점. 우리 가족도 어느새 가던 발길을 멈추고 베트남 사람들과 함께 베트남을 응원했다. 아이들은 의자를 차지하여 앉았고, 나는 그들과 함께 탄성을 지르고 응원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보더니 역시나 박항서를 외치며 반갑게 대해주었다.

연장전이 끝나고 승부차기. 거리는 골 하나하나에 들썩거렸다. 지나가던 외국인을 포함해서 모든 이들이 TV에 집중했고, 그 순간만큼은 모두 하나였다. 슛~골인. 베트남의 승리. 사람들은 모두 환호했으며, 그 중 한 명은 나와 부둥켜안고 펄쩍펄쩍 뛰었다. 누군지 몰라도 상관없었다. 그냥 기뻐했고, 같이 즐겼다.
 
이겼다! 환호 중인 베트남 사람들
 이겼다! 환호 중인 베트남 사람들
ⓒ 이희동

관련사진보기

 
여전히 경기의 감흥을 즐기는 베트남 사람들을 뒤로 숙소로 향해 걸었다. 거리는 다시 분주해졌다. 사람들도 사람들이었지만 오토바이들이 베트남 국기를 들고 떼를 지어 질주했다. 경적을 울리며. 숙소까지 거리는 꽤 되었지만 택시를 잡을 수 없었다. 차도며, 인도며 사람들이 뒤엉켜 모두 승리를 만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트럭에 올라가 베트남기를 흔들고, 사거리에 모여 움직이지 않은 채 환호를 지르는 베트남 사람들.

그런 광경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2002년 한일 월드컵 때가 떠올랐다. 당시 광화문에서 승리를 지켜본 뒤 모르는 사람들과 껴안고 마냥 기뻐했던 우리들의 모습. 모두 빨간 티를 입고 버스에 올라, 지하철 출입구에 올라 만세를 부르고, 버스 안에서도 반대편 차선의 버스 승객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대한민국을 외쳤던 그때.

그래, 지금 베트남 사람들도 2002년도의 우리처럼 짜릿한 기분을 즐기고 있겠지. 아마도 이 공유의 기억은 두고두고 이 세대들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우리가 2002년 붉은 악마의 기억을 바탕으로 광장의 촛불을 들고 나오는데 주저함이 없어진 것처럼.
 
베트남기를 흔들며 질주하는 오토바이들
 베트남기를 흔들며 질주하는 오토바이들
ⓒ 이희동

관련사진보기

   
2002년 대한민국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
 2002년 대한민국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
ⓒ 이희동

관련사진보기

 
비록 베트남인들이 기뻐하는 걸 보기는 좋았지만 숙소까지 30분 이상 걸어오려니 고역이었다. 정신없이 내달리는 오토바이에 위험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매연도 심각했다. 아이들 셋을 이끌고 걷기는 분명 쉽지 않았다. 게다가 첫날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안 그래도 예민해 있지 않은가.

다행히 숙소에 들어섰고, 우리는 잠을 청했다. 내일은 아침부터 다시 찬찬히 호이안 올드타운을 돌아보자.

태그:#베트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