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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이용자와 도서관 사서가 함께 쓴 도서관 역사 여행기입니다. 대한제국부터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역사 속 도서관,  도서관 속 역사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편집자말]
* ①편에서 이어집니다. 

1937년 겨울 백석은 함흥에서 경성으로 향했다가 부모의 강요로 결혼한다. 상심한 자야에게 백석은 만주국 수도 신징(新京)으로 함께 떠나자는 제안을 하지만 자야는 거부하고 홀로 경성으로 향한다. 경성으로 떠난 그녀에게 여러 달만에 백석이 찾아와 연인은 재회한다. 다시 만난 그가 함흥으로 떠나면서 그녀에게 쥐어준 시가 바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 응앙 울을 것이다

1939년 1월 백석은 함흥 교사 생활을 접고 경성으로 돌아와 <조선일보>에 재입사한다. 이 무렵 백석은 청진동 자야 집에서 1년 남짓 함께 살았다. 1939년 2월 백석은 부모의 강요로 두 번째 결혼을 한다. 돌아온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 신징으로 떠나자는 제안을 다시 하지만 그녀는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1940년 2월 백석은 홀로 신징으로 향한다.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을 두 사람은 알았을까. 한국전쟁 후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두 연인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영영 만나지 못한다.

만주에서 살며 백석은 간간히 시를 발표한다. <흰 바람벽이 있어>는 이때 발표한 시. 1941년 백석은 신징에서 안둥(安東)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즈음 그는 피아니스트 문경옥과 결혼하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1943년 안둥 세관에서 일할 무렵 백석은 시라무라 기코(白村夔行)로 창씨개명한다. 백석은 일본 이름과 일본어로 작품을 쓰거나 남기진 않았다. 해방 이후 남한 문단에 마지막으로 발표된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만주 시절 쓴 작품이다.

해방과 분단 이후 백석의 행적
 
요정 대원각에서 일하던 수많은 여인은 팔각정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여인이 웃음을 팔기 위해 옷을 갈아입던 팔각정이 지금은 종소리 울려 퍼지는 ‘범종각’으로 바뀌었다.
▲ 길상사 범종각 요정 대원각에서 일하던 수많은 여인은 팔각정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여인이 웃음을 팔기 위해 옷을 갈아입던 팔각정이 지금은 종소리 울려 퍼지는 ‘범종각’으로 바뀌었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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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백석은 고향 정주로 돌아온다. 정주에 있던 백석은 오산학교 스승 조만식의 요청으로 평양에서 통역비서로 그를 돕는다. 1945년 12월 29일 백석은 평양에서 리윤희와 결혼했다.

북조선에서 김일성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조만식을 돕던 백석의 입지도 좁아진다. 한동안 침묵하던 백석이 다시 활동을 시작한 건 1947년부터다. 조선문학예술총동맹 4차 중앙위원회에서 그는 외국문학 분과위원을 맡았다. 백석이 러시아 문학 번역에 주력했던 시기도 이때다.

한국전쟁 포화가 휩쓰는 동안 백석은 러시아 문학 번역에 매진한다. 한편 백석의 연인 자야는 김숙(金淑)이라는 가명으로 부산에서 요정을 운영한다. 임시수도 부산에서 그녀는 신익희, 조병옥, 이범석 같은 정치 거물이 드나드는 사교장으로 자신의 요정을 키웠다.

전쟁이 끝나고 1956년 백석은 동화시를 발표하고 아동문학 평론도 시작한다. 1948년 발표한 시 이후 8년 만이다. 1957년 북한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가던 중 백석은 아동문학 논쟁에 휘말리며 격렬한 비판 대상이 된다. 그해 10월, 그는 아동문학 토론회에서 혹독한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1958년 10월 이후 백석은 문학 활동을 중단하다시피 한다.

시인과 연인의 최후
 
유언 대로 자야 김영한의 유골은 길상사에 뿌려졌다. 그녀의 유골이 뿌려진 곳에 공덕비를 세웠다.
▲ 길상화 공덕비 유언 대로 자야 김영한의 유골은 길상사에 뿌려졌다. 그녀의 유골이 뿌려진 곳에 공덕비를 세웠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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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1월 백석은 현지 파견 임무를 받고 평양을 떠나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에 있는 관평협동조합으로 향한다. '삼수갑산'이라는 표현에 나오는 바로 그 삼수다. 삼수군에 내려간 이후에도 백석은 1962년 상반기까지 꾸준히 시와 산문을 발표한다. 1962년 10월 북한에서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크게 일면서 작품 활동이 어려워졌다. 이후 백석은 농사일을 하며 지냈다. 1996년 1월 백석은 삼수군 관평리에서 84세 나이로 숨을 거뒀다.

한때 '모던보이'로 불리며 촉망받던 시인 백석. 그의 삶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백석에 대한 방대한 평전을 쓴 안도현은 '시인으로서 그의 말년은 행복하지 못했지만 자연인으로 생을 마친 그의 삶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하긴 어렵다'고 했다. "삶은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므로."

월북 문인으로 남한에서 조명받지 못한 백석은 1987년 창작과비평사에서 <백석시전집>이 출간되고, 북한 문인에 대한 해금 조치가 이뤄지면서 본격적으로 재평가 받는다. 우리 문학사에서 '잊힌 시인' 백석은 다시 제 자리를 찾게 되었다.

자야 김영한은 성북동에서 요정 대원각을 다시 이어갔다. 한때 대원각은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북한산 3각'이라 불리며 거물이 드나드는 대표적인 요정이었다. 1995년 자야는 대원각 부지 7천여 평 땅과 40여 채 건물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했다. 1997년 12월 14일 대원각은 길상사라는 이름으로 새로 태어난다. <내 사랑 백석>이라는 자서전을 펴낸 김영한은 창작과비평사에 2억 원을 기탁, '백석문학상' 제정에 기여하기도 했다. 

평생 백석을 그리워한 시인의 연인은 1999년 11월 14일, 8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녀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한겨울 눈이 제일 많이 내린 날, 내 뼛가루를 길상사 마당에 뿌려 달라."

눈이 푹푹 나리는 날, 나타샤는 그녀를 생각하는 그를 향해 갔나 보다.

길상도서관과 다라니다원
 
법정 스님은 길상사에 대중을 위한 도서관을 세웠다. 그 도서관이 ‘길상도서관’이다. 길상도서관은 복합문화공간 ‘다라니다원’으로 이름을 바꾼다.
▲ 길상사 다라니다원 법정 스님은 길상사에 대중을 위한 도서관을 세웠다. 그 도서관이 ‘길상도서관’이다. 길상도서관은 복합문화공간 ‘다라니다원’으로 이름을 바꾼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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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에는 도서관이 있는데, 흔치 않은 사찰 도서관 중 하나다. 사찰과 도서관,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지만 불교와 함께 한 우리 역사가 길다 보니, 사찰은 책이 전해진 또 다른 공간이다. 법정 스님은 길상사를 일반 대중이 공부하고 수련하는 절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길상도서관'을 세우고 개방했다.

도서관에 있는 장서도 무려 3만 권. 작은 규모 공공도서관에 육박하는 장서량을 자랑한다. 불교 서적뿐 아니라 일반 단행본도 함께 갖추고 있다. 도서관에는 입적 후 낙양의 지가를 흔든 법정 스님의 절판된 책이 전시되어 있다. 도서관은 책을 '사유'하지 않고 '공유'하는 공간이다. '무소유'를 갈파한 법정 스님 책이 도서관이라는 공유 공간에 있는 건 퍽 어울린다. 백석과 자야, 법정 스님 모두 책을 사랑하고 뛰어난 글솜씨를 자랑했다. 이들의 사연이 깃든 길상사에 도서관이 있는 건 더할 나위 없는 '인연'일지 모르겠다. 

길상사는 2016년 12월 27일 도서관을 리모델링해서 북카페 '다라니다원'을 만든다. 저렴한 가격에 커피와 음료를 즐길 수 있고 365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다라니다원이 문을 열면서 길상도서관은 쉼터와 카페, 도서관 기능을 가진 복합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한다. 혹자는 사서 없는 다라니다원을 도서관이 아니라 할 것이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이곳은 사랑이 시가 되고, 그리움이 전설이 되고, 한 권의 책이 기적을 만든 공간 아닌가. 

자야 김영한은 대원각을 시주하면서 수많은 여인이 웃음을 팔기 위해 옷을 갈아입던 팔각정이 종소리 울려 퍼지는 공간으로 바뀌기를 바랐다. 그녀의 소망처럼 대원각 여인이 옷을 갈아입던 팔각정은 종루(범종각)로 바뀌고, 향응과 야합의 무대였던 수많은 별채는 기도처로 바뀌었다.  

길상사 다라니다원 근처 자야의 유골이 뿌려진 곳에는 길상화(吉祥華) 공덕비가 서 있다. '길상화'는 요정 대원각이 길상사로 문을 연 그 날, 자야 김영한이 법정 스님으로부터 염주와 함께 받은 법명. 길상화 공덕비 앞에는 그녀의 사연과 함께, 그녀가 그토록 사랑했던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가 새겨져 있다.

그 많은 재산을 시주한 게 아깝지 않냐는 세인의 물음에 길상화가 이런 말을 남겼다 했던가.

"천억이 백석의 시 한 줄보다 못하다."

[길상사 다라니다원]

- 주소 : 서울시 성북구 선잠로5길 68 (성북2동) 길상사 내 지장전 1층
- 이용시간 : 10:00 - 16:30
- 휴관일 : 없음
- 이용자격 : 이용 자격 제한 없음. 무료.
- 홈페이지 : http://kilsangsa.info/
- 전화 : 02-3672-5945
- 운영기관 : 대한불교조계종 길상사

태그:#다라니다원, #도서관, #길상사, #백석, #김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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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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