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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인간과 세상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라는 철학적 물음이 떠오른다.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인간과 세상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라는 철학적 물음이 떠오른다.
ⓒ 구창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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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푸른 물빛과 투명하게 빛나는 햇살. 타일랜드의 바다는 "문학이 세상의 중심"이라 믿었던 청년들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그들 사이에서 '전설'로 떠도는 19세기 상징주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 만약 랭보가 200살쯤까지 살아 태국 푸켓과 파타야의 파도를 보았다면 어떤 노래를 만들어냈을까 궁금하다.

사철 내내 더위만 지속되는 남국. 태국에선 가만히 있어도 줄줄 흐르는 땀이 사람을 힘들게 한다. 거기에다 폭염과 잠복한 게릴라처럼 일상을 습격하는 스콜. 사람을 축축 늘어지게 만드는 눅눅한 습기에 두 손 들고 항복해야 하는 나라.

내가 거길 찾았던 우기(雨期). 여행 기간 내내 하늘은 물에 젖은 담요처럼 내려앉고 바다는 길 잃은 아이처럼 울어댔다. 흩뿌리는 소나기를 보며 방파제에 서서 듣는 파도소리는 흡사 천둥소리인양 두렵고도 장엄했다.

낯선 나라의 익숙지 않은 날씨처럼 심란해진 마음은 쓸쓸함을 부르고, 그 쓸쓸함은 아주 먼 기억을 느리게 소환했다. 빛나는 태양 아래서의 우울증이라니… 어울리지 않았지만 닥쳐온 진솔한 감정을 떨쳐낼 이유 또한 없었다.

<칼의 노래>를 쓴 소설가 김훈의 문장을 빌리자면 시인이란 "누런 해가 뜨는 곳에서 다시는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을 슬픈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니까. 유럽과 중국 관광객이 하나 둘 빠져나간 황량한 해변, 서늘하고 푸른 바다의 적막감이 마구잡이로 밀려왔다.

그것들과 만났으니 독한 술이 간절해질 수밖에. 나무로 만든 계단이 삐걱거리는 항구의 조그만 카페에 홀로 들어섰다. 오징어회나 우럭매운탕처럼 눈에 익은 안주는 없지만, 게와 새우를 튀겨 독한 태국산 버번(Bourbon) '리젠시'를 몇 잔이고 거푸 들이켰다.
 
맑은 물빛의 태국 바다. 그걸 바라보는 마음이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다.
 맑은 물빛의 태국 바다. 그걸 바라보는 마음이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다.
ⓒ 구창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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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해변에서 떠올린 '한국 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달콤한 취기가 밀려왔다. 다시 방파제를 향했다. 철썩대며 밀려오는 파도의 하얀 포말을 깔깔거리며 반기는 얼굴, 푸른 눈동자의 연인들이다.

5~6살로 돼 보이는 딸을 무등 태워 바닷물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는 젊은 아버지의 환한 웃음도 참으로 보기 좋았다. 가득한 부러움으로 그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 오래 전 인류학자들의 전언을 떠올렸다.

"지구 위 모든 생명은 바다에서 왔다."

그 바다가 선물하는 새하얀 파도가 무람없이 밀려드는 조용한 이국의 해변. 낯선 바다에서 익숙한 한국의 동해안이 갑작스레 떠오른 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더불어 시인 최영미의 가슴 아픈 문장으로 채워진 시 한 편이 눈앞으로 흘러가는 걸 봤다. <속초에서>였다.

속초에서

바다, 일렁거림이 파도라고 배운 일곱 살이 있었다
과거의 풍경들이 솟아올라 하나 둘 섬을 만든다
드문드문 건져 올린 기억으로
가까운 모래밭을 두어 번 공격하다보면
어느새 날 저물어
소문대로 갈매기는 공 없이 어깨춤을 추었다
지루한 비행 끝에 젖은 자리가 마를 만하면
다시 일어나 하얀 거품 쏟으며 그는 떠났다
기다릴 듯 그 밑에 몸져누운 이마여
자고 나면 한 부대씩 구름 몰려오고
귀밑털에 걸린 마지막 파도 소리는
꼭 폭탄 터지는 듯 울렸다

바다, 밀면서 밀리는 게 파도라고 배운 서른두 살이 있었다

더 이상 무너질 것도 없는데 비가 내리고
어디 누우나 비 오는 밤이면 커튼처럼 끌리는 비린내
비릿한 한 움큼조차 쫒아내지 못한 세월을
차례로 무너뜨리며 밤이 깊어가고
처벅처벅 해안선 따라 낯익은 이름들이 빠진다
빨랫줄에 널린 오징어처럼 축 늘어진 치욕
아무리 곱씹어도
이제는 고스란히 떠오르지도 못하는 세월인데
산 오징어의 단추 같은 눈으로 횟집 수족관을 보면
아, 어느새 환하게 불 켜고 꼬리 흔들며 달려드는 죽음이여
네가 내게 기울기 전에 내가 먼저 네게로 기울어가리.

 
낯선 나라에서 만난 일렁이는 파도가 여행자의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
 낯선 나라에서 만난 일렁이는 파도가 여행자의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
ⓒ 구창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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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댈 사람이 있는 곳이 곧 아름다운 세상

어린 자식의 어깨를 안아주는 아버지의 듬직한 팔뚝이 없다면, 밀려오는 파도에 새파랗게 질린 입술에 가 닿는 연인의 입맞춤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그 애정과 연민의 힘이 세상을 이어가는 것이 아닐까?

마침내 타일랜드 바다에도 까무룩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들었다. 몇몇 여행자들은 어두운 길을 걸어 다시 한 번 방파제로 가거나, 좀 더 농밀한 취기를 위해 또 다른 카페를 찾고 있었다.

난바다로 불빛을 비춰 길 잃은 배를 항구로 귀환시키는 등대와 느닷없이 찾아온 슬픔과 물기 어린 비애를 안고 산책에 나선 사람들의 앞을 밝혀주는 가로등만이 쓸쓸하게 불을 밝히는 밤.

세상과 인간의 비애를 남들보다 일찍 깨달은 최 시인은 '일렁거림이 파도라고 배운 일곱 살'을 서럽게 기억하며 '하얀 거품 쏟으며' 제 곁을 떠나간 것들을 그리워했다.
하지만 최영미의 그리움은 마냥 아래로만 침잠하지 않았다.

'더 이상 무너질 것도 없는' 삶이고 세상이지만 희망의 실마리를 놓치지 않는다. 그렇기에 '환하게 불 켜고 꼬리 흔들며 달려드는 죽음' 앞에서도 이렇게 노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네가 내게 기울기 전에 내가 먼저 네게로 기울어가리"라고.

맞다. 제 곁에 기울어가거나, 기댈 사람이 있는 이들은 외롭지 않은 법. 그 따스함이 인간을 무엇보다 큰 힘으로 위로하는 것이 아닐지.

 
저물녘 바다 풍경은 인간에게 진원지 불분명한 쓸쓸함을 선물한다.
 저물녘 바다 풍경은 인간에게 진원지 불분명한 쓸쓸함을 선물한다.
ⓒ 구창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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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막한 바다를 떠도는 인간의 삶이지만...

태국에서나 한국 동쪽 바다에서나 마찬가지로 우뚝 서 뱃사람들의 길잡이 역살을 하는 등대를 봤다. 제 안에 간직한 안타까운 빛으로 세상의 막막한 어둠을 잠시 잠깐이나마 비추는 등대의 몸부림에 심장이 서늘해졌다.

생명이 없는 등대지만 '착하고 믿음직한 향기'가 풍겨왔다. 소리 내 말하지 않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세상엔 등대만큼도 선량한 인간이 드물다"는 엄정한 사실을.

바다와 파도를 처음 만난 것처럼 설렘 가득했던 태국 바닷가에서의 그날. 나는 '환하게 불 밝힌 죽음이 꼬리 흔들며 달려들기' 전에 내 아픔보다 타자의 슬픔 속으로 먼저 기울어 가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기억되긴 하는데….

아직도 모르겠다. 아무리 부정해도 나는 결국 자신의 존재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그저 '떠도는 사람'에 불과한 것이데, 그런 나와 우리가 대체 세상과 타자를 위해 무얼 할 수 있는 것인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당신은 가지고 있는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에 게재된 것을 일부 보완한 것입니다.


태그:#타일랜드, #최영미,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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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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