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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 목사의 빈소가 1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 돼 있다. 2019.3.10
 문동환 목사의 빈소가 1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 돼 있다. 2019.3.10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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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고 문동환 목사님에 관한 추모의 글을 써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처음엔 그다지 망설이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감히 내가.."

그 분이 살아오신 삶의 무게와 깊이는 물론이고 지난 시간 그 분과 함께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분투한 이들의 노력과 고초를 기억한다면 어찌 감히 제가 붓을 놀릴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감히 고인을 생각하며 부족한 글을 남깁니다.

공교롭게 저는 고 문동환 목사님의 마지막 일을 함께했습니다. <북간도의 십자가>. 북간도 지역 기독교인들의 독립운동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CBS에서 기획했고 유일한 생존자이신 목사님을 대신하여 북간도 일대와 상하이 임시정부를 다녀오는 여정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목사님과의 인연은 없었습니다. 제가 크고 자란 세계는 민주화가 이미 이루어진 세계였고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란지라 문동환 그리고 그의 형 문익환 두 목사의 삶을 오롯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저는 예수교 장로회 교단에서 성경과 신학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기독교 장로회가 가진 호방함 그리고 고 문동환 목사님이 보여주신 과감한 신학 세계에 대한 거부감마저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북간도의 십자가>의 한 장면. 심용환 역사가가 병상의 문동환 목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북간도의 십자가>의 한 장면. 심용환 역사가가 병상의 문동환 목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CBS
 
방송을 위해 그 분을 처음 뵈었을 때 저는 차분히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목사님. 저는 역사책을 쓰는 심용환이라고 합니다. 저는 학창시절 때 기독교 신앙과 역사 의식 사이에서 갈등이 컸어요. 참된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과 역사적 책무를 담당해내는 것 사이에서 오랜 시간 방황을 했답니다. 그 때 목사님의 삶과 정신 덕분에 이 혼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바른 신앙을 갖는 것과 바른 역사 의식을 갖는 것.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것과 역사 속에서 정의와 공의를 이루는 것이 결코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그리고 이제야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계시던 목사님에게 제 간절한 마음이 닿았는지 어여쁘게 여겨주시며 많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목사가 된다는 것은 민족을 위해 사는 것이야. 그래서 목사가 되었어."
"역사를 산다는 것, 역사를 살다보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어."
"이름이 뭐라고? 그래 심용환. 내가 다시 사는 것 같아. 내가 다시 사는 것 같아."


작품은 무사히 만들어졌고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 '공식 추천작'으로 올해 초에 방영이 되었습니다.
 

한반도에서 북간도로, 다시 북간도에서 남한으로

그러고 나서 문동환 목사님은 결국 9일 오후 5시50분께 하나님께 돌아가셨습니다. 향년 99세. 목사님을 추모하는 기사가 곳곳에서 올라오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근현대사 박물관', '민주화운동사의 살아있는 신화'... 모두 맞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저는 목사님을 통해 '한반도에서 북간도로, 다시 북간도에서 남한'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지점에는 문동환 개인이 아닌 아버지들의 아버지, 어머니들의 자녀들이 함께 이루어낸 역사 그 자체가 보일 뿐입니다.

함경북도에서 5개의 가문이 북간도 용정 일대로 건너갔고 그 곳에서 김약연을 중심으로 명동학교를 세웁니다. 이상설의 서전서숙과 더불어 명동학교는 만주 일대 민족교육의 상징입니다. 이즈음 이 마을은 집단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기독교 민족주의의 산실이 됩니다. 송몽규, 윤동주, 문동환과 그의 형인 문익환. 작은 마을에서는 수많은 인재를 길러냈고 이들은 이후 또다른 인연을 만들어냅니다. 문익환 목사님은 일본 유학길에 장준하 선생과 우정을 쌓았고 문동환 목사님은 형님과 형님 절친의 혼사 자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시기도 합니다.
 
만주 만보산 교회 앞에서 신혼시절 문익환과 박용길, 그리고 문동환
 만주 만보산 교회 앞에서 신혼시절 문익환과 박용길, 그리고 문동환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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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시인 윤동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일찍 떠났고 두 분 목사의 아버지인 문재린 목사님은 직접 아들 친구의 장례를 주관했습니다. 참으로 고단하고 아픈 시절, 감당하기보단 그저 버텨야 했던 그 시절에 북간도에서는 민족과 십자가를 짊어진 수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헌신했습니다.

해방 후 북간도의 청춘들은 완숙한 어른이 되어 남한에 정착하게 됩니다. 이를 두고 변상욱 기자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북간도가 직접 남한에 내려온 거예요. 그래서 남한의 민주주의를 직접 쟁취한 거죠."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출신이자 1960년대 한국 지성의 상징인 '사상계'를 이끌던 장준하는 박정희에 맞서 싸우다 의문의 죽음을 맞았습니다. 문익환 목사는 반유신투쟁, 전두환 군사독재에 맞선 투쟁, 1987년 6월항쟁 그리고 방북까지 현대사의 가장 예민하고 심각한 복판을 가로질렀습니다.
 
일본에서 제작된 3.1 민주구국선언 인사들의 석방 요구 포스터. 위에서부터 차례로 함석헌, 문익환, 김대중, 윤보선, 이우정, 안병무, 김지하, 이태영, 정일형, 서남동, 함세웅, 문동환, 이문영
▲ 구속자 석방 포스터 일본에서 제작된 3.1 민주구국선언 인사들의 석방 요구 포스터. 위에서부터 차례로 함석헌, 문익환, 김대중, 윤보선, 이우정, 안병무, 김지하, 이태영, 정일형, 서남동, 함세웅, 문동환, 이문영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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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 목사님 또한 마찬가지셨습니다. 전태일 분신사건, 삼선개헌, 유신헌법 등 한국 현대사의 심각한 모순을 바로 잡으려 노력했습니다. '3.1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하여 긴급조치로 구속(1976)되고 YH사건(1979)으로 또다시 구속됐습니다. 전두환 정권 때는 망명길에 오르기도 하고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합니다.

한 편에서는 신학자로서 목회자로서의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으셨죠. 민중신학, 민중교회의 길을 열었고 90이 다된 나이에는 '예수와 바울'을 둘러싼 새로운 신학적 논쟁에 불을 지피려고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반대되는 현실은 여전

이런 지난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것이 목사님 보시기에 탐탁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항상 역사를 살고자 애를 쓰셨고 당대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려고 분투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저 같은 후배들이 당신을 향한 기념사업에 애쓰기보다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 우리가 짊어진 문제에 맞서 분투하기를 바라실 겁니다.

목사님의 영면 소식을 들은 후 결국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이제 기독교인들의 독립운동사와 민주화운동사는 실질적으로 멸실의 단계로 들어섭니다. 자본이 횡포를 부리는 사회, 여전히 켜켜이 쌓여있는 적폐 등 문 목사님이 싸우고자 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반대되는 현실을 봅니다. 저는 권선징악을 믿고 천국을 믿고 부활을 믿습니다. 그리고 참된 믿음의 길이란 무수한 독립운동가들과 민주화운동가들이 갔던 그 길을 따르는 것이라 믿습니다.

문 목사님 가시는 길에 감히 다짐해 봅니다.

'제가 꼭 뒤를 이어 살겠다고, 그렇게 살아가겠다고, 그게 예수의 길임을 믿는다고.'

함께 갔으면 좋겠습니다. 모두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가슴에는 이상을 품고, 정의를 꿈꾸며 역사의 진보를 향해 함께, 그렇게 함께 내달렸으면 좋겠습니다.

태그:#문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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