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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독립군이 불리한 처지에서 싸운 것은 사실이지만, 심리적 면에서까지 꼭 열세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태에서만 무장 독립투쟁을 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점은 독립군의 사상적 기반에서 드러난다.

무장 독립투쟁은 대체로 구한말 의병투쟁에 사상적 기반을 두었다. 그리고 의병투쟁은 위정척사운동에 정신적 기반을 두었다. 화서 이항로(1792~1868년)로 대표되는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은 바른 것을 지키고 잘못된 것을 배척하는 사상 운동이었다.

위정척사운동 및 의병투쟁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항로는 성리학자로서 주리론(主理論)을 표방했다. 성리학에서 이(理)는 우주를 움직이는 기본 원리, 기(氣)는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적 단위다. 저서인 <화서아언>에서 그는 "이(理)를 중심으로 해서 기(氣)를 이끌면 어디를 가도 길하지 않음이 없다"며 '이'를 중시하는 주리론을 펼쳤다.

이항로는 그런 사상을 국제관(觀)에도 적용했다. 조선을 '이'로 보고, 외세를 '기'로 봤다. 조선을 세계의 중심으로 본 것이다. 공자의 도(道)를 중국보다도 잘 계승했으므로 조선이 세계문명의 중심이라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따라서 '기'에 불과한 외세가 세상의 중심인 '이' 즉 조선을 침범하는 것은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외세와 싸우는 것은 정(正)을 보위하고 사(邪)를 배척하는 정의로운 길이었다.

'공자의 도를 계승한다'는 표현이 현대 한국인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도 있다. 조선이 세계문명의 중심이라는 표현 역시 국수주의적 느낌을 풍길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항로의 이론을 기초로 구한말 의병들이 싸웠으며, 이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무장 독립투사들이 싸웠다는 점이다. 이들의 정신적 배후에 이항로라는 사상가가 있었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다.

이는 의병과 독립투사들이 일본을 겁내는 게 아니라 하찮게 여기는 심리적 상태로 투쟁했음을 의미한다. 무섭지만 어쩔 수 없이 대적해야 하는 상대가 아니라, 하찮고 만만해서 충분히 해볼 만한 상대라는 마인드로 싸웠던 면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서울 용산구의 전쟁기념관에서 찍은 광복군 군복.
 서울 용산구의 전쟁기념관에서 찍은 광복군 군복.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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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의 대일 심리전

일본에 대한 그 같은 심리적 자신감을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가 광복군의 대일 심리전이다. 일본군과 직접 부딪히는 전쟁뿐 아니라 그들의 심리를 움직이는 전쟁에도 광복군은 신경을 썼다. 어느 전쟁에서나 심리전이 수반되기 마련이지만, 광복군은 그 열악한 환경에서도 심리전 전담팀을 설치했다. 심리적 여유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측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을 만만히 보는 전통적인 대일관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수 있다.

그런 대일 심리전을 수행한 인물 속에 독립운동가 김정숙이 있다. '독립운동가 김정숙' 하면 김일성 주석의 부인이자 김정은 노동당위원장의 할머니인 김정숙(1917년 생)을 떠올리기 쉽지만, 여기서 소개할 분은 광복군에서 활약한 김정숙(1916년 생)이다.

김정숙은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항일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국가보훈처 홈페이지에 실린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이렇게 소개한다.
 
"평남 용강 사람이다. 1919년 부친 김붕준(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역임)을 찾아 모친과 같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37년 7월 광둥 중산대학 재학 중 학생전시복무단을 조직하고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1938년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였으며, 1940년 6월 17일에는 중경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조직하여 상임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활동했다."
 
김정숙은 중국에서 독립운동 중인 아버지 김붕준(1888~1950년)을 찾아 어머니 손을 잡고 혹은 어머니 등에 업혀 중국으로 떠났다. 우리 나이로 네 살 정도 때 일이다. <엄마 찾아 삼만리>를 연상케 하는 일제강점기판 <아빠 찾아 삼만리>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광복군의 행사 장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광복군의 행사 장면.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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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 전문가 김정숙

중국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대학 생활을 한 뒤 조직활동을 주로 했던 김정숙은 항일전이 한창이던 1940년(당시 24세)부터 선전 전문가로 나서게 된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이어지는 대목이다.
 
"같은 해(1940년) 9월 17일 광복군이 창립되자, 여군으로 입대하여 대적 심리공작을 수행하였다. 1942년 4월 임시정부 교통부 비서, 1943년에는 의정원 비서, 1944년 6월에는 법무부 비서 겸 총무과장에 임명되었다. 1945년에는 심리작전 부문을 중요시하게 된 광복군 총사령부가 작전처 내에 심리작전 연구실을 신설하게 되자, 여기에 파견되어 보좌관으로서 한국어를 전담하여 전단 작성, 전략방송, 원고 작성 등 각종 심리작전을 수행하였다."
 
김정숙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심리전을 전개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에서 원문을 다운받을 수 있는 <독립유공자 증언자료집> 제2권이다. 그가 심리전 경험담을 직접 구술한 부분이 여기에 실려 있다. 그가 상부로부터 받은 임무는 이랬다.
 
"어떻게 해야 염전(厭戰) 사상을 일으킬 수 있느냐, 그래 가지고 그걸 회의를 하고 생각을 해서 안을 제출하는 거예요."
  
전쟁기념관에서 찍은 광복군 기관지.
 전쟁기념관에서 찍은 광복군 기관지.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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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 나온 일본군 병사들이 전쟁에 염증을 느끼게 만들 만한 선전 자료를 만드는 게 그의 임무였다. 그가 속한 선전팀이 구사한 방법 중 하나는 일본군에게 편지 형식의 전단지를 뿌리는 것이었다. 조선인 병사들도 있었으므로 조선어로도 편지를 썼다. 전쟁이 하기 싫어져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할 만한 문구들을 편지지에 기입해 넣었다.

편지 같은 노골적 방법 외에 은근한 방법도 구사했다. 일본 군영에 화투를 살포하는 것도 그런 방법이었다. 편지 형식의 전단지는 일본군이 줍자마자 폐기할 가능성이 높지만, 화투는 다음에 쓰려고 감춰둘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것을 살포했던 모양이다. 일본군이 쉬는 시간에 화투를 칠 경우에 대비해 화투 패마다 글자를 써넣었다고 한다. 작은 글씨로 써넣었던 모양이다. 김정숙은 이렇게 구술했다.
 
"그 안에 '아버지 보고 싶어요' 뭐 이케 쓰든지 하면 화투 하면서 자꾸 보잖아요."
 
김정숙은 아버지를 찾아 중국까지 간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 보고 싶어요'란 문구를 얼른 떠올렸겠지만, 심리전 팀의 다른 멤버들은 '어머니 보고 싶어요'를 써넣었을 수도 있다. 그런 문구를 자꾸 보다 보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 거라는 생각에서 그런 방안을 기획했다고 한다.

김정숙은 독립운동 하러 나간 '아빠'를 찾아 엄마와 함께 '삼만리' 길을 나선 사람이다. 그 자신도 독립투사가 된 김정숙은 가슴 속에 절절하게 끓는 효심을 독립운동에 응용해 심리전을 펼쳤다. 아빠 찾아 중국까지 온 자기처럼 일본군도 부모 찾아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심리전에 담았다. 1990년에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투사 김정숙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그는 2012년에 세상을 떠났다.
 
광복군 출신 항일애국지사 김정숙 선생
 광복군 출신 항일애국지사 김정숙 선생
김정숙을 포함해 대일 심리전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들의 사례는, 독립투사들이 심리적으로 불리한 처지에서만 투쟁한 게 아니라 유리한 위치에서도 투쟁하는 일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일본군의 심리를 갖고 놀겠다'는 마인드를 갖고 활동하는 독립운동 파트도 있었던 것이다. 조선은 '이'이고 외세는 '기'이니 외세의 침략을 묵인해서는 안 된다는 사상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니, 더욱 더 자신 있게 심리전에 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태그:#여성 독립운동가, #김정숙, #광복군, #심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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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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