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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영국 BBC가 브리스톨 해협의 골뱅이 어획과 수출 현황을 기사로 전하던 과정에서 '한국에선 골뱅이가 최음제로 여겨진다'는 잘못된 설명을 담았다. 오보에 대한 지적이 일자 현재 기사에서 해당 내용은 수정됐다.
 지난 10일, 영국 BBC가 브리스톨 해협의 골뱅이 어획과 수출 현황을 기사로 전하던 과정에서 "한국에선 골뱅이가 최음제로 여겨진다"는 잘못된 설명을 담았다. 오보에 대한 지적이 일자 현재 기사에서 해당 내용은 수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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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선 골뱅이 없이 남성과 여성의 데이트가 완성되지 않는다."

지난 10일, 영국 BBC가 브리스톨 해협의 골뱅이 어획과 수출 현황을 기사로 전하던 과정에서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졌다. 대부분의 영국산 골뱅이가 아시아로 수출되는 이유에 대해 '한국에선 골뱅이가 최음제로 여겨지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내놓은 것. 오보에 대한 지적이 일자 기사에서 해당 내용이 수정됐지만, 이는 한 외신의 오보 혹은 오역 해프닝을 넘어 한국 '데이트' 문화의 씁쓸한 단면이 의도치 않게 폭로된 사건으로 남았다.

동의와 약물, 그 끔찍한 상호교환

'골뱅이'는 '술에 취한 여성'을 부르는 남성들 사이의 은어다. 술에 취한 여성을 '술에 취한 여성'이라 그냥 부르지 않고 '골뱅이'란 특정 단어로 범주화하는 남성들의 문화엔 끔찍한 의도가 숨어 있다(여성들은 '술에 취한 남성'을 특정 단어로 따로 부르지 않는다). 데이트, 섹스 등 모든 관계 맺기의 최초 단계인 '동의'의 단계를 무의식의 힘을 빌려 건너뛰겠다는 것.

한국에선 골뱅이가 데이트의 완성이라는 BBC의 오역은, 사실 한국의 상황을 곡해한 것이 아니라 데이트에 대한 일부 남성들의 인식을 오히려 실제에 가깝게 전달한 것일 수도 있다. 여성과의 새로운 관계 맺기를 무조건 성폭력에 가까운 성관계로 끝내야만 비로소 '성공'했다고 여기는 미성숙한 문화 말이다.

'한국에선 골뱅이를 최음제로 사용한다'는 BBC의 오보는 클럽 '버닝썬'을 둘러싼 논란과 시기가 맞물렸다. 강남의 유명 클럽에서 직원들이 주도해 술에 취한 여성들을 VIP룸에서 성폭행하거나, 심지어는 불법 약물을 이용해 여성들을 '취하게 만든' 후 남성 고객들에게 '제공'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소위 '물뽕'이라고 불리는 최음제가 클럽 등의 공간에서 암암리에 판매되고, 피해자가 생겨나고 있다는 가능성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남녀 간의 자연스러운 만남이 가능한 공간인 클럽에서마저도 어떤 남성들은 범죄의 힘을 빌려 폭력을 저질러 왔다. 데이트는 하고 싶지만 동의를 구할 용기는 없고, 섹스는 하고 싶지만 동의는 구할 필요는 없다는 듯. 약물을 이용한 성범죄를 서로서로 눈감아주거나 때로는 장려하는 분위기 속에서 한국 남성들의 데이트 문화가 일그러졌다.  

'최음제', '불법약물강간' 등 상식 밖의 단어들이 등장한 건 비단 최근의 일이 아니다. 지난 19대 대선에선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의 '돼지 발정제 강간모의 사건' 논란이 일었다. 홍 후보는 2005년 발간한 자신의 책에 '돼지 흥분제 이야기'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고려대 1학년 재학 시절 하숙집 친구 중 한 명이 짝사랑하는 여학생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흥분제를 구해달라고 요청했고, 자신을 포함한 룸메이트들이 그를 위해 흥분제를 구해다 줬다는 내용이다.

이를 두고 비판이 거세지자,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고 "하숙집에서 있었던 돼지 흥분제 이야기를 마치 내가 성범죄를 저지른 것인 양 몰아 세웠고 심지어 강간미수범이라고까지 덮어 씌우고 그것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해명을 떠나, 예나 지금이나 이런 행태를 데이트나 섹스라고 생각하는 남성들이 새로 태어나고 자라 강간문화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건 일정 부분 사실인 듯하다.

그들은 데이트를 어떻게 망쳐 왔나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가 14일 오후 서울 강남구의 유명 클럽 '버닝썬' 출입구 앞 경찰 수사관들이 디지털 포렌식 장비 등을 들고 들어가려 하고 있다. 2019.2.14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가 14일 오후 서울 강남구의 유명 클럽 "버닝썬" 출입구 앞 경찰 수사관들이 디지털 포렌식 장비 등을 들고 들어가려 하고 있다. 2019.2.14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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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한국 클럽에 더는 가지 않게 된 건 외국의 전혀 다른 클럽 문화를 경험한 후부터였다. 한국의 클럽 문화, 클럽에서 이뤄지는 어떤 만남들이 단단히 잘못됐음을 깨달은 것이다. 독일 베를린의 한 클럽에서 있었던 일이다. 친구들과 무아지경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도, 그 어떤 합의되지 않은 스킨십은 일절 일어나지 않았다. 쑥스러운 눈맞춤 정도가 최고 수위의 스킨십이랄까.

더 놀라운 건 그 다음이었다. 잠깐 휴식을 갖고자 바에 몸을 기대어 쉬고 있는데, 한 사람이 말을 걸어 왔다.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며 대화를 시작한 그는, 한 시간 전부터 나를 보고 내가 스테이지에서 벗어나 쉬기를 기다렸다고 했다. 춤추는 걸 방해하지 말고 바에 오면 정식으로 말을 걸어 봐야지, 생각한 것이었다.

무작정 술부터 권한다거나, 통성명은커녕 얼굴도 보지 않은 상태로 뒤에서 스킨십을 한다거나, 추행에 해당하는 불쾌한 스킨십을 피하면 "나도 너 같은 애랑은 안 자 XX야" 하는 욕설이 날아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공간이 클럽이라고 해서 만남의 방식이 유별날 필요는 당연히 없다.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라면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 그 당연함을 포기한 만남은 결코,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외국에서 (영어로) 데이트를 할 때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을 하나만 꼽으라면, 그것은 바로 'If you want'(네가 원한다면)일 것이다. 함께 무얼 하자는 제안을 완곡하게 표현하기 위함이다. 같이 새로운 음식을 먹어 보자는 제안에도, 내일 아침엔 짧은 트래킹을 나가자는 제안에도, 저녁을 먹고 후식으로 젤라또를 먹자는 간단한 계획에도 'If you want'가 언제나 따라온다. 동의에 해당하는 긍정적인 답변을 들어야만 데이트가 성사된다. 동의라는 최초의 단계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 무엇도 시작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렇듯 'If you want'는 모든 관계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특히나 젠더적 위계가 불가피하게 동행하는 이성 간의 데이트에서는 더욱 중요하다. 물론 이성과 관계를 맺는 데엔 다양한 결이 있다. 그들은 재미있는 만담 듀오가 될 수도, 논리적인 토론 파트너가 될 수도,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로맨스를 써내려 갈 수도, 혹은 상호 합의 하에 성적인 관계를 맺는 사이가 될 수도 있다.

문제는, 한국의 '남성성'이라는 틀 안에선 그 다양한 결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성애자 남성에게 '여성'이란, 꼭 성적인 관계로 묶여야 하는 대상인 듯하다. 심지어 상대방이 거부하면 위력이나 약물을 사용해서까지 강간하기도 한다. 

성관계 '성공'의 여부는 관계의 '성공' 여부로 곧장 연결된다. 남성들이 원나잇스탠드에 '성공'하면 '홈런 쳤다'는 은어로 자축하는 상황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모든 여성과는 성적으로 관계 맺어져야 하지만, 동의의 단계는 저 멀리 내팽겨치는 것이 그들이 지금까지 해온 데이트, 약물과 성폭력으로 망쳐온 '데이트'의 모습이었다.

'좋은 데이트'를 둘러싼 논쟁의 수준을 점검하며
 
'좋은 데이트'란 무엇인가. 우리 사회의 논의는 어느 지점까지 왔나.
 "좋은 데이트"란 무엇인가. 우리 사회의 논의는 어느 지점까지 왔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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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8년 1월, 미국에선 성적 관계에 있어서 '동의'란 무엇인가를 두고 열띤 사회적 논의가 벌어졌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소개하고, 미투 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미국 사상 가장 진보적인 쇼'라고 평가받는 넷플릭스 드라마 <마스터 오브 넌>을 제작한 유명 코미디 배우 아지즈 안사리를 둘러싼 성폭력 혐의가 불거진 것이 시작이었다. 한 여성이 그와 밤을 보내면서 직간접적으로 그와 섹스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밝혔고, 아지즈가 그 표현을 무시했다는 폭로였다.

이를 두고 뉴욕타임스, 애틀랜틱, 복스 등 매체들은 '나쁜 섹스'와 '성폭력'을 구분하는 것이 가능한가, 성적인 상황에서 동의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져야 하는가, 성폭력의 구성 요소는 무엇인가를 두고 난상 토론을 벌였다. 정답을 염두에 둔 논의는 아니었지만, 동의의 개념을 재점검하고 좋은 데이트를 만드는 것에 대한 대중의 고민을 되새김하는 계기가 됐다.

위 상황과 비교했을 때 한국에서 벌어지는 논의 상황은 처참하다. 미국은 상대방의 적극적인 의사 표현에 기반을 둔 no means no(노 민스 노)에서 yes means yes(예스 민스 예스)의 단계 전환의 길을 걷고 있다면, 한국은 밑바닥에서부터 좋은 데이트에 대한 교육이 시작되고 있다. '술에 취한 여성을 추행하지 말자' '불법 약물을 쓰지 말자'는 구호가 대표적이다.

'골뱅이'란 은어는 사라져야 할 단어다. 동의의 단계를 건너뛰게 해주는 각종 불법 약물들도 사라져야 마땅하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난 장소가 클럽이든, 공원이든, 박물관이든 가장 먼저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법칙은 유효하다. 당신의 이름을 먼저 소개하며 다가가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 인간이 인간답게 관계 맺는 방식이니까. 데이트는 그렇게 시작되어야 한다. 불법의 힘을 빌려온 그 데이트는,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었다.

*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 미국의 저널리스트 로빈 윌쇼의 1988년 출판된 책. 부제는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다.

태그:#데이트, #데이트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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