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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은 반전의 도시다. 

미다스의 황금손으로 빚은 것 같은 금빛 찬란한 사원은 낮에는 '짝퉁' 같지만, 밤에는 달빛을 반사한 금빛이 은은하게 감돈다. 고층빌딩 사이로 지상철이 지나가는 스쿰빗은 영락없이 배트맨의 고담 시티인데, 그 옆에는 악어가 사는 방콕의 마지막 정글 숲 '방 끄라짜오'가 있다.   

그리고 방콕은 한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뒤지지 않는 일회용 플라스틱 천국이다. 즐비한 길거리 음식은 죄다 두 겹, 세 겹의 플라스틱에 싸여 있다. 물 한 잔을 마셔도 일회용 빨대가 딸려온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속사포처럼 '빨대 필요 없어요'라고 내질렀건만(스테인리스 빨대를 미리 올림픽 성화처럼 치켜들어 보여줬는데도), 보란 듯 미리 꽂아둔 일회용 빨대를 쏙 빼서 버린다. 아놔… 이쯤 되면 '플라스틱 프리'고 뭐고 그저 '졌다'는 열패감만 한가득. 차라리 한국이 낫지 말입니다.  
   
그런데 또 반전이다. 방콕에는 포장재와 쓰레기가 나오지 않는 '제로웨이스트 숍'이 유럽의 내로라하는 도시들만큼이나 존재한다. 그중 우리 동네로 모셔오고 싶은 실하디 실한 두 곳을 소개한다.

한 곳은 '수완나품' 공항 근처에 위치에 '제로모먼트(Zero Moment)'. 간장, 식초, 기름, 곡식, 세제 등 살림의 밑바탕이 되는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구비해 놓았다. 다른 한 곳은 방콕의 지상철 '온눗(onnut)' 역 근처에 위치한 '베터문 앤 리필 스테이션(Better Moon & Refill station)'. 오래된 가구를 재활용한 게스트하우스와 일회용품 반입을 금지한 카페를 운영하고 각종 세제와 화장품을 리필해준다. 둘 다 모두 당장이라도 서울에 프랜차이즈를 내고 싶어 마음이 달았던 곳이다.

평범한 직장인, 왜 제로모먼트를 열었나
 
제로모먼트 샵 전경
 제로모먼트 샵 전경
ⓒ 유혜민(필름고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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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모먼트' 대표 미아오씨
 "제로모먼트" 대표 미아오씨
ⓒ 유혜민(필름고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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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모먼트'의 소셜네트워크 계정으로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일주일이 지나도 묵묵부답이었다. 지름신 강림하사 '선 쇼핑 후 인터뷰'를 마음먹고 직접 찾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주인장은 '별다른 마케팅을 안 하는데 어떻게들 아시고 손님들이 찾아온다'며 해맑게 웃는다. 여전히 인터뷰 요청 메시지는 읽지 않은 상태. 주인장은 영화 <카모메 식당>의 주인공처럼 하고 싶은 일을 군더더기 없이 하고 산다는 분위기였다. 다른 삶을 선택한 단단한 사람 특유의 무탈하고도 평온한 기운이랄까.

'제로모먼트'의 주인장은 나이 서른의 '미아오'씨다. 필자가 방문한 지난달은 숍이 문 연 지 두 달 된 시점이었다. 미아오씨는 제로웨이스트 숍을 창업하기 전까지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는 사회적 가치가 있는 좋은 일을 하며 살고 싶었다고 한다. 프레디 머큐리의 아버지 식으로 말하자면 '선한 생각, 선한 말, 선한 행동'이 되는 비즈니스에 뛰어드는 삶. 그래서 직장을 그만두고 독일의 제로웨이스트 숍 방문 후 가게를 차렸다. 방콕 시내와 꽤 떨어진 근교에 '제로모먼트'가 문을 연 배경이다. 아담한 가게지만 200여 개 이상의 식재료와 생활용품을 깨알같이 갖추고 있다. 

특히 식재료의 밑감이 탄탄하다. 쌀과 잡곡류, 스파게티, 슈퍼푸드는 물론 꿀, 간장, 식초, 설탕, 소금, 오일류 등이 즐비하다. 아몬드, 땅콩, 마카다미아넛 등의 견과류, 망고, 살구, 코코넛 등의 말린 과일, 각종 차와 원두도 갖추고 있다. 없는 것은 비닐봉지와 플라스틱 포장재, 그리고 맥주와 음료수다. 따로 용기를 판매하지만 식료품에 한해 코팅되지 얇은 크래프트지 봉투(일명 '빵 봉투')를 제공하기도 한다.
  
제로모먼트를 방문한 한 손님이 본인이 들고온 용기에 견과류를 구입하고 있다
 제로모먼트를 방문한 한 손님이 본인이 들고온 용기에 견과류를 구입하고 있다
ⓒ 유혜민(필름고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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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님이 본인이 가져온 찬통에 구매할 먹거리를 담은 모습
 한 손님이 본인이 가져온 찬통에 구매할 먹거리를 담은 모습
ⓒ 고금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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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류의 경우 자기 용기에 직접 상품을 넣고 무게를 재서 구매한다. 샴푸, 바디워시, 데오도란트 등의 개인위생용품과 세제, 섬유유연제, 비누 등의 생활용품이 다양하게 구비돼 있다. 고체 비누의 경우 원하는 만큼 잘라서 구매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용기를 저울에 올리고 '제로'를 누르면 용기 무게를 빼고 '0'이 뜬다. 그 용기에 원하는 양만큼 담아 다시 저울에 달면 내용물의 무게가 표시된다. 혹은 자기 용기에 내용물을 담아 카운터에 가져가면 주인장이 무게를 달아 가격을 알려준다.

우리는 물건을 사면서 "이것이야말로 1인 가구를 위한 맞춤형!"이라며 감탄했다. 혼자 써도 남지 않을 만큼 조금씩 구매가 가능했으니까 말이다. 일회용 플라스틱도, 다 못 쓰고 버리는 재료도 없다. 그야말로 낭비 없는 제로웨이스트다.

어렵지 않아요, 용기만 있으면 끝!
 
비닐 없이 직접 용기에 구입하는 방법
 비닐 없이 직접 용기에 구입하는 방법
ⓒ 유혜민(필름고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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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푸바, 세탁비누, 일반 비누 등은 직접 잘라서 구매한다
 샴푸바, 세탁비누, 일반 비누 등은 직접 잘라서 구매한다
ⓒ 유혜민(필름고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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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용기에 직접 담아 구매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용기 준비: 용기를 가져온다. 
2. 용기 무게 제외: 저울에 용기를 올리고 영점 버튼을 누른다. (저울이 '0'이 된다.) 
3. 리필: 용기를 들고 그 안에 제품을 담는다. 
4. 무게 측정: 저울에 담은 제품의 무게를 잰다. 
5. 계산: 제품의 무게를 적은 종이를 카운터에 가져가 계산한다.  

'제로모먼트'는 멋들어진 대용량 스테인리스 용기가 일품이다. 벌크 용기마다 흘리지 말라고 달랑달랑 받침을 매달아 놓았다. 자세히 보면 더 세심하다. 꿀과 캐놀라유의 디스펜서 마개가 각각 다르다. 꿀은 점성이 강해 이에 적합한 마개를 장만해야 했다.

가게를 준비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점이 뭐냐고 물으니, 제품에 맞는 적절한 디스펜서와 용기를 마련하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각국의 제로웨이스트 숍에 문의해 용기를 공수했고 적당한 것이 없을 때는 알음알음 주문제작을 맡겼다.    
 
꿀을 구입하는 모습
 꿀을 구입하는 모습
ⓒ 유혜민(필름고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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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거리와 생활세제는 최대한 태국에서 생산된 제품을 들여놓지만, 퀴노아나 올리브 오일처럼 태국에서 나지 않는 제품은 수입산이다. 태국에서 기른 농산물은 모두 농민과 직거래로 마련한다. 중간 마진이 없기 때문에 농민들에게는 더 좋은 가격을 드릴 수 있고 가게로서는 좋은 농산물을 적절한 가격에 판매할 수 있다.

제로웨이스트 숍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 마진은 최소한으로 잡았다. 아무리 뜻이 좋고 물건이 좋아도 가격이 너무 부담스러우면 사람들이 이용하기 힘들다. 실제로 꿀과 견과류 등을 사서 비교해 보니 대형마트의 프로모션 상품보다는 비싸지만 동일한 수준의 상품보다는 저렴했다.

우리는 샴푸 바, 야생꿀, 캐놀라유, 말린 과일, 천연 실크로 만든 생분해성 치실 등을 구입했다. 샴푸 바는 100그램에 4000원, 야생꿀은 1킬로그램에 1만6000원, 실크 치실은 25미터에 3000원 정도였다. 꾸준히 방문하는 손님들 덕에 일주일이면 대용량 용기에 담긴 재료들이 떨어질 정도로 회전율이 빨라 신선도나 위생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집에서 가져온 용기에 리필해가는 모습
 집에서 가져온 용기에 리필해가는 모습
ⓒ 고금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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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실제 자기 용기를 가져오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2시간 정도 가게를 기웃거리는 동안 꽤 많은 손님들이 자연스럽게 용기를 들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주인장에 따르면, 재방문 손님의 약 90%가 사용하던 용기를 가져와 리필해 간다고 한다. 일회용 플라스틱 천국인 방콕에서 자발적으로 불편을 감수하는 시민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하지만 '자발적 불편' 운운에 한 손님이 반박했다. '제로모먼트'에서 15분 거리에 산다는 그는 "우리 아이는 용기에 리필하는 것을 재미있어 해요. 저는 다 쓴 용기를 씻어서 가져오는데, 습관이 들어서인지 왜 불편하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쇼핑하면서 환경교육도 할 수 있어 아이랑 자주 옵니다. 아이가 좋아해요"라고 응원했다. 
    
제로웨이스트 숍의 존재 이유

하지만 혼자만 이런들 무슨 재민겨? 태국은 플라스틱 정책은 말만 무성하고, 실제로는 미세먼지처럼 무수한 일회용 플라스틱이 사용된다. 미아오씨는 태국의 플라스틱 정책에 한숨이 나온다고 한다. 특히 한국산 쓰레기가 필리핀에 버려진 뉴스에 화가 나고 슬펐다고.

"하지만 멈출 수는 없으니까, 전 이 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뿐입니다."

길거리에서 장사하는 영세 상인들에게 비싼 생분해 재질을 쓰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저 자기 용기를 가지고 다니는 문화가 가능하다는 실마리를 보여주고 싶다. 이러한 삶의 방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나누고 싶다. 그가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제로모먼트'를 해나가는 거다. "시스템을 바꿀 수 없다면 나라도 바꿔야겠다"던 <노임팩트맨>처럼.
 
제로모먼트의 저울이 놓인 카운터
 제로모먼트의 저울이 놓인 카운터
ⓒ 유혜민(필름고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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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모먼트'를 통해 '플라스틱 프리' 여행을 준비하면서 해결하지 못했던 과제를 깔끔하게 해치웠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생수는 휴대용 필터가 달려 있는 '라이프스트로우'로, 클렌저, 바다워시, 샴푸는 샴푸 바 하나로, 화장품은 직접 만들어서 리필 용기에 담아 해결했다. 

그런데 겨드랑이털을 제모할 면도기와 치실은 적절한 대안이 없었다. 치실은 합성섬유, 여성용 면도기는 일회용 플라스틱 제품뿐. 그런데 방콕의 제로웨이스트 숍에는 면도날만 리필해 쓰는 '스뎅' 면도기와 천연 실크 소재인 생분해 치실이 놓여 있었다.

방콕에서 '플라스틱 프리'는 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찰나, 그곳에서 일회용품의 대안을 발견했다.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조곤조곤 하라고, '플라스틱 프리'가 가능하다고 밝혀주는 것이 바로 제로웨이스트 숍이 존재하는 이유다.
 
여기서 바로 천연 실크로 만든 생분해성 치실을 찾았다! 것도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여기서 바로 천연 실크로 만든 생분해성 치실을 찾았다! 것도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 유혜민(필름고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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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스틱 천국' 방콕의 제로웨이스트 숍 탐방기 태국 방콕 제로웨이스트 숍 '제로모먼트'를 방문했다.
ⓒ 필름고모리(유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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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모먼트(ZeroMoment) 정보

주소| Rama 9 Road Soi 41, Soi Ramkhamhaeng 24 Yaek 16, Suan Luang, 방콕, 태국
전화| +66 81 551 7700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zeromomentrefillery/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숲과나눔' 재단의 시민 아이디어 '풀씨' 사업의 지원으로 작성됐습니다.


태그:#플라스틱프리, #제로웨이스트, #쓰레기, #일회용품, #플라스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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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쓰레기쿠스, 알맹@망원시장, 쓰레기기덕질 운영자, 발암물질없는사회만들기국민행동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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