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형님, 큰일 났어요! 어제 새벽에 발전소에서 사고로 한명의 노동자가 죽었어요. 1년 계약직으로 채용되어 불과 3개월째 근무하던 24살 먹은 비정규직 청년인데 태안화력 9., 10호기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머리와 몸체가 분리되었습니다. 그동안 노동자들이 누누이 경고한 일들이 현실에서 벌여졌습니다. 4~5km나 되는 긴 구간을 입사 3개월 된 계약직 노동자 혼자서 관리했으니 죽음의 현장으로 몰아넣는 것이나 다름없죠."

평소와 같이 출근해 취재 일정을 점검하던 지난해 12월 11일 오전 10시경. 한국서부발전(주) 태안화력에서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는 후배한테 급하게 걸려온 전화에서 쉼 없이 쏟아진 말이다.

제보 전화를 받고는 한국서부발전 홍보팀, 태안경찰서, 태안소방서 등에 확인하고 오전 11시 10분경 첫 기사를 올렸다. 태안에서 기자 생활을 하면서 태안화력에서 잊을 만하면 발생하는 사망사고이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첫 보도 이후 늦은 밤 후배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유족들이 노조를 비롯한 시민대책위 구성을 요청하고 장례 일정을 위임할 것 같아요. 그리고 아직 공개를 못하지만 사고를 당한 용균이가 일주일 전에 문재인 대통령 만나 달라고 한 사진이 있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끊었다,

순간 이 사고가 그간의 사망사고와는 다른, 큰판이 벌어질 것 같은 감이 왔다. 뜬눈으로 밤을 새고 12일 아침 일찍 아예 고인이 모셔진 충남 태안군보건의료원 상례원 2층 3호로 출근을 했다. 이후 시민대책위가 꾸려졌다는 기사를 시작으로 매일 빈소를 지키면서 김용균의 죽음과 관련한 거의 모든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지난 1월 4일 암 투병 중이던 장인 어르신이 영면하셨고 우연인지 모르지만 고인의 바로 옆 분향소인 2층 4호실에서 모셨다. 장례 일정과 삼오제 등을 마치는 5일 정도만 빼고는 김용균의 시신을 태안의료원에서 서울로 옮겨가기 전 44일간 매일 분향소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리고 고인의 장례가 모셔진 오늘(9일) 태안화력에서 열린 1차 노제 기사까지 모두 71건의 기사를 썼다.
 
노제를 위해 태안화력에 들어서는 고인의 영정
 노제를 위해 태안화력에 들어서는 고인의 영정
ⓒ 신문웅

관련사진보기

  
25년간 지역신문 기자를 하면서 한 사안을 가지고 이렇게 긴 기간 많은 기사를 쓴 것은 지난 2007년 태안앞바다에서 삼성중공업소속 크레인선이 묘박중인 유조선을 들이받은 태안기름유출사고 이후 처음이다.

지난 62일간 고 김용균이라는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의 삶과 그의 희망을 들여다보고 동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 원청에 당한 설움이 섞인 얘기들, 공공부분을 비롯한 위험의 외주화가 부른 문제점들, 부모님과의 첫 언론 단독 인터뷰를 통해 '김용균'이라는 비정규직 청년이 고단한 삶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취재 사흘 만에 안 사실이지만 고인을 비롯한 한국발전기술 직원들의 숙소가 나의 사무실 바로 옆 원룸이었다. 그들은 회식 때면 우리 사무실 아래층 당구장에서 동료들과 당구 게임을 하고 화합을 다졌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늦은 퇴근길 계단에서 만난 풋풋한 청년들의 무리 속에 그를 봤던 것도 같다. 이제 고인을 떠나보내며 지난 62일간의 긴 터널과 같았던 일들을 정리해 보았다.

'문송면'이 당한 아픔, 30년 지나 '김용균'도 반복

1971년 2월 14일, 태안군 원북면 양산리에서 태어난 '문송면'씨는 4남 2녀 중 넷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나 형제가 많고 집안 사정이 넉넉치 않아 고등학교 진학이 힘든 상황이었다. 그는 충남 태안중학교 졸업을 압둔 1987년 온도계·압력계 제조업체인 '협성계공'의 직원이 학교를 방문, 잠은 기숙사에서 재워주고 밤에는 야간학교에 다닐 수 있다고 한 말에 1987년 12월 5일 협성계공에 입사하여 신나와 수은을 취급하는 작업을 했다.

하지만 한 달 뒤인 1988년 1월 신체에 이상 증세가 발생해 입사 두 달 만인 1988년 2월 8일 병가를 냈고 그해 2월 16일 자신의 고향집에서 발작을 일으켜 입원했지만 별 이상 증세를 찾지 못하고 퇴원한다. 이후 3월 9일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수은에 의한 질병 등의 진단을 받게 된다.

6월 29일 성모병원으로 병원을 옮겨 치료를 받다가 7월 2일 구토물이 기도를 막아 불과 17세에 숨지고 말았다. 초기 가족들은 이 일을 산업재해로 신청하려 했으나 노동부는 계속 반려하다 언론 보도와 노동계의 요구가 높아가자 사망 2주 전인 6월 20일에야 산재로 인정해 큰 공분을 일으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원진레이온 직업병 투쟁이 본격화됐다. 17세 문송면의 죽음은 한국 노동 운동사에 산업재해, 환경오염으로 인한 질병 피해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기억되며 산업안전보건법의 개정을 이끌어냈다. 문송면군은 산업재해 노동자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마석 모란공원에 영면했다.

문군의 마지막 말은 "살고 싶어... 병 다 나으면 무서운 서울을 떠나 엄마랑 농사지으며 살자"였다고 전해진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18년 12월 11일 고 문송면씨의 고향인 충남 태안군 원북면에 위치한 태안화력 9, 10호기 컨베이어 벨트에서 나홀로 근무하던 24살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도 위험한 산업현장에서 숨졌다.

30년이라는 시간 차이만 있을 뿐 둘의 가정 환경과 고단한 삶, 위험에 방치된 작업에 따른 산업 재해, 마석 모란공원에 영면하는 등 닮은 점이 많다. 우리가 지난 30년간 고속 성장을 통해 G7국가가 되었다고 자랑했지만 세월만 흘렸을 뿐 노동 환경은 변한 것이 없다.
 
지난 9일 고인의 영정 사진이 멀리 보이는 가운데 열린 노제에서 부모님들이 슬픔속에 잠겨 있다.
 지난 9일 고인의 영정 사진이 멀리 보이는 가운데 열린 노제에서 부모님들이 슬픔속에 잠겨 있다.
ⓒ 신문웅

관련사진보기

  
고 문송면군의 사고 이후 일부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은 2016년 5월 서울지하철 구의역 김군 사고로 개정안이 국회에 여러 건이 발의는 되었으나 공전만 거듭되며 방치되고 있었다. 고 김용균의 죽음은 여기에 다시 불을 지폈고 2018년 마지막 정기국회 마지막 날인 지난해 12월 27일 극적으로 여·야 정치권이 28년 만에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국민적 요구와 시민대책위 특히 고인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48시간 국회에 상주하며 눈물로 호소한 결과였다. 일명 '김용균법(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은 35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좀 더 안전한 일터와 도급사의 사고에 대한 책임을 강화시키도록 했다.

원청 서부발전의 습관화된 거짓해명과 은폐 시도

지난해 12월 11일 새벽 4시경 한국서부발전(주) 태안화력 9, 10호기 석탄 운송설비 타워 컨베이어 벨트에서 머리와 몸체가 분리된 채 발견된 고 김용균(만 24세)은 한국서부발전(주) 태안화력 9, 10호기의 석탄 운송설비 하청을 맡은 한국발전기술(주)에 입사한 지 불과 3개월 된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였다.

사고가 발생되자 고인 근무조의 한국발전기술(주)의 담당 L과장(얼마 전까지 원청 업체인 태안화력의 팀장으로 근무하던 사람으로 발전소 하청업체 직원들 사이에서는 원청에서 낙하산타고 온 이들을 'OB출신'이라 부른다)은 상부에 보고했고 즉시 현장에 온 태안화력 관계자들은 다시 본사인 서부발전에 연락을 한다. 사고 수습은 뒷전인 채 보고를 하고 조치를 기다리느라 고인은 검은 탄가루 속에 한 시간 넘게 방치되고 있었다.

여기에 한술 더 떠 태안화력은 사고사실을 밖에 전달하지도 말고 기자들도 접촉하지 말 것을 긴급 지시하고는 경찰 신고보다는 정비업체에 현장으로 달려오라고 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한 노동자는 "처참하게 죽은 용균이를 방치한 채 태안화력이 대책회의를 하며 한 시간 넘게 시간을 보내다가 경찰에 알렸다"며 "시신도 같이 근무했던 우리들이 수습했다"고 증언했다. 또 "용균이 시신을 옮기고도 기계를 다시 돌리다가 30여분 만에 고용노동청의 중지로 기계를 멈추었다"고도 했다. 시신을 옆에 두고 멈추어선 발전 설비를 기동했다는 증언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기계 부품 정도로 여기는 원청회사의 인식을 보여주는 대목이였다.

당시 태안화력 시민대책위는 "사망사고가 발생하고 5시 37분 9, 10호기 벨트 작업 중지 명령이 고용노동청 보령지청에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생명보다 전기를 생산하여 이윤을 추구하는 서부발전의 지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지적했다.

김용균의 죽음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커지자 한국서부발전(주)는 사고발생 5일 만인 지난해 12월 16일에 '임직원 일동' 이름으로 대국민 사과문을 내놓았다. 하지만 일요일 저녁 7시에 기자들에게 이메일로 10 문단의 '속빈 강정 같은 사과문'을 보내 유족들과 시민대책위를 조롱하기에 이르렀다.
 
어머니 동료 노동자들에게 노조에 가입해서 부당한것에 대해서는 말을 하고 시정을 요청하는 활동을 해야한다는 소회도 밝혔다.
 어머니 동료 노동자들에게 노조에 가입해서 부당한것에 대해서는 말을 하고 시정을 요청하는 활동을 해야한다는 소회도 밝혔다.
ⓒ 신문웅

관련사진보기

  
사고 발생 열흘이 지난 지난해 12월 21일 아침 한국서부발전(주) 태안화력에 출근한 노동자들은 깜짝 놀랐다. 발전소 안이 너무나 깨끗해졌기 때문이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태안화력 방문 전날인 지난 20일 한국서부발전이 하청용역업체를 동원, 발전소 내부를 대대적으로 물청소를 했다. 더 나아가 이 대표 방문 동안에는 발전소의 다른 컨베이어 벨트 가동도 중단해 여당 대표 방문에 맞춰 발전소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은폐하는 시도라는 지적도 받았다.

한편 한국서부발전(주)은 무재해 사업장으로 정부 인증을 받아 최근 5년간 497억원의 산업재해 보험료를 감면받고 성과급 잔치를 벌였다. 하지만 국회에 제출한 2017년 자료에는 기자가 이미 <오마이뉴스>를 통해 보도한 3건의 4명의 사망사고를 누락해 태안화력 산재를 숨기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후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은 하청노동자들에게 사내 정보 유출 방지 교육을 하고, '민·형사상 책임'을 언급하는 보안각서 제출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청노동자들은 이미 사고 이전인 지난해 11월 보안각서와 서약서를 제출한 바 있다. 하지만 김용균의 죽음 이후 동료 노동자에 의해 각종 사진과 동영상이 언론에 공개되자 추가 제출을 요구한 것이다. 

또 태안화력 9~10호기가 시운전 때부터 낙탄이 많이 발생했지만 원청인 한국서부발전이 개선 조치를 하지 않았고 안전사고 방지를 위해 물청소 라인 설치를 수차례 요구했지만 서부발전이 번번히 묵살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사고 초기 별다른 대응을 안 던 한국서부발전(주)는 직원들의 명예가 실추된 것을 바로 잡겠다는 취지로 지난 1월 12일 고 김용균 사망사고와 관련 <오마이뉴스>의 단독 보도 등 14가지 언론 핵심 보도를 부정하는 글을 홈페이지 내부 게시판에 올리기도 했다. 서부발전은 "오해" 혹은 "하청업체의 잘못"이라며 서부발전과 무관함을 주장했다.

여기에 서부발전 직원들만 글을 쓸 수 있는 어플리케이션인 블라인드(Blind, 익명성이 보장돼 기업 직원들이 회사 내부 문제 등을 공유하는 애플리케이션)와 한국발전산업노조 게시판에 일부 서부발전 직원들이 고인은 물론 유가족을 폄훼하고, <오마이뉴스> 보도와 관련 기자를 근거 없이 비방하는 글을 수백건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4일 뒤 발표된 정부의 특별근로 감독결과에서 서부발전이 1029건 위반, 과태료 6억 6700만원에 달함이 알려지자 김병숙 사장은 "고 김용균씨 사망사고로 통렬한 자기반성을 하게 됐다, 안전을 최우선 가치로 현장 개선 200억원을 투입하는 등 모든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밝혀 기존의 입장을 번복했다. 
 
고인의 사고 현장에 태안화력 9.10호기 타워 앞으로 고인의 대형 걸개 영정과 그림이 들어서고 있다.
 고인의 사고 현장에 태안화력 9.10호기 타워 앞으로 고인의 대형 걸개 영정과 그림이 들어서고 있다.
ⓒ 신문웅

관련사진보기

  
정부가 시민대책위와 합의 끝에 지난 7일부터 김용균의 장례 일정에 돌입한 후 한국서부발전이 본사 사옥 1층에도 7일부터 분향소를 마련했으나 하루동안 썰렁하게 방치한다는 <오마이뉴스>의 보도가 있자 다음날인 8일에야 김병숙 사장 외 경영진 일동이 조문하기도 했다.

용균이와 어머니가 남긴 것은

사고 발생 7일 만에 고인의 아버지 김해기씨와 어머니 김미숙씨는 <오마이뉴스>와 첫 단독 인터뷰를 했다.

고인과 똑같은 비정규직 노동자로 교대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던 지난해 12월 11일 새벽 6시 40분경 태안경찰서에서 아들이 사고를 당했다며 가족들의 확인이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고 올라왔다는 어머니와 아버지는 꿈에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단다.

어머니와의 인터뷰를 하면서 그가 왜 투사로 변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당연히 회사에서 사고가 났으면 회사(관리자)에서 연락을 주어야 하는데 회사가 아닌 경찰이 연락을 하고는 회사 측 이사는 용균이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며 책임을 전가했다. 사고 발생 이틀 만에 사고 현장에 가보니 아들의 동료들도 언제든 죽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이에 어머니는 비록 내 아들은 먼저 갔지만 다른 애들은 안전하게 일할 수 있게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이후 보는 사람마다 만나는 정치인들마다, 또 마이크를 잡거나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들이 일한 9, 10호기만 멈춰 있는데 나머지 1~8호기도 당장 멈춰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누구보다도 힘든 상황이지만 어머니는 먼저 간 용균이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같은 곳에서 일하는 또 다른 김용균들에게 안정적이고 안전한 일터를 만들어 줄때까지 멈출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태안장례식장에서 사고 발생 44일 만에 서울로 빈소를 옮겨가는 날 어머니에게 "힘내세요" 했더니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씀만 연신하시고는 떠나셨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설날인 5일 시민대책위가 정부, 한국서부발전과 합의안을 발표하고 7일부터 장례 절차에 돌입했다. 그리고 9일 새벽 6시45분 62일 만에 태안화력 정문 태안화력 9, 10호기 석탄 설비 타워 앞에서 노제가 열렸다.

이제 고 김용균은 문송면과 전태일 열사가 잠든 마석 모란공원에 안치됐다. 이 땅의 수많은 비정규직 김용균들에게 '정규직'이라는 선물을 남기고 위험의 외주화에 노출되었던 350만 비정규직에게 보다 안전한 일터를 만드는 물꼬를 만들어 주었다.
 
고인의 사망사고이후 멈추어진 태안화력 9.10호기 이제 진상조사와 안전장비를 갖추어 안전한 일터로 정비가 되어 재 가동을 해야 한다.
 고인의 사망사고이후 멈추어진 태안화력 9.10호기 이제 진상조사와 안전장비를 갖추어 안전한 일터로 정비가 되어 재 가동을 해야 한다.
ⓒ 신문웅

관련사진보기

   
어머니는 진상규명, 책임자처벌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계속적인 투쟁을 약속하고 있다.
 어머니는 진상규명, 책임자처벌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계속적인 투쟁을 약속하고 있다.
ⓒ 신문웅

관련사진보기

  
문송면과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집단 산재사고 이후 30여 년 만에야 개정된 일명 김용균법으로 일컫는 산업안전보건법의 전부 개정안의 공표로 원청업체의 안전 관리 책임과 사고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었다. 그동안 배달원과 특수형태근로종사자 등 근로자 범위에 포함되지 않던 노동자들도 산업안전보건법의 보호를 받는 대상이 되었다.

"아들아, 우리 다시 만날 때 꼭 두팔 벌려 안아줄게"라는 어머니의 마지막 인사와 함께 영면한 고 김용균님.

장례 후에 본격화 될 진상규명위원회와 사법기관의 수사를 통해 책임자들이 처벌돼 다시는 태안화력에서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 나도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을 고인에게 약속하며 62일간의 긴 터널 같았던 인연을 끝맺고자 한다.
 

태그:#고김용균,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 #진상규명, #위험의 외주화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지방자치시대를 선도하는 태안신문 편집국장을 맡고 있으며 모두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