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책 표지
▲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책 표지
ⓒ 난다

관련사진보기

 

고향과 고국을 떠나, 정든 거리와 사람들, 익숙한 음식과 말씨를 떠나서 그 모두를 간절히 그리워하게 된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오래 전 세상을 등지고 흙 속에 파묻힌 물건을 꺼내어 그 안에 담긴 사연을 읽어내는 걸 평생의 업으로 삼았다. 그 사람은 제 삶 가운데 쌓인 이야기를 길어 올려 시라는 맑은 결정으로 빚어내는 것 또한 제 일로 여겼다. 둘 사이엔 어떤 공통점이 있었는데, 감춰진 무엇을 표면으로 드러내어 깊이 바라보게끔 하는 것이었다.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는 지난해 10월 3일 세상을 떠난 허수경 시인의 산문집이다. 유작이 되어버린, 어쩌면 유작이 될 것을 스스로 짐작해 펴낸 책으로, 위암 말기로 투병 중이던 시인 스스로 떠난 뒤 남겨질 결정으로 선택한 책이라 할 수 있겠다. 고인이 제 글을 통해 밝혔듯이 '중요한 것은 들여다보고 해석하는 관점'이므로, 정말 중요한 건 오롯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맡겨졌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시인은 투병 중이던 지난해, 본래 2003년에 세상에 나와 있던 산문집 <길모퉁이의 중국식당>의 제목과 구성을 달리해 다시 펴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일종의 개정판인데 그녀는 스스로 책을 '아름다움을 닮으려 한 기록'이라 명명했다. 개정판 서문에서 '그리움은 네가 나보다 내 안에 더 많아질 때 진정 아름다워진다'고 했으므로, 제 안에 저보다 더 많이 담아내고자 한 어떤 그리움에 대한 기록인 셈이다.

당신도 부디 그러세요
 
제가 받은 응원을 여러분께도 보내드립니다.
▲ 선물받은 책 마지막 페이지에 쓰여진 메모 제가 받은 응원을 여러분께도 보내드립니다.
ⓒ 김성호

관련사진보기

  
나는 이 책을 지난해 말 만난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았다. 내가 배를 타고 멀리 떠나기를 선택하기 전, 그와 나는 한 모임에서 알고 지냈었다. 몇 주에 한 번씩 서로가 읽은 책을 이야기하거나 함께 영화를 보고 감상을 나누는 모임에서였다. 나는 몇 년 째 그 모임을 이끌고 있었고 그는 자주 참석하는 회원이었다.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다. 정체된 삶을 완전히 새롭게 바꿔보고 싶다며 나는 떠나야겠다고 말했다. 항해사가 되겠다고 결심했으니 한 삼사년 쯤 걸릴 거라고. 그렇게 모임은 그렇게 멈추었다.

그로부터 이년의 시간이 흘렀다. 먼 바다 위에서 나는 할 줄 몰랐던 일을 했고, 본 적 없는 것을 보았으며, 느낄 일 없던 감정을 느꼈다. 다칠 수 있음을 알면서도 마음을 열었고 익숙지 않은 것과 기꺼이 마주했다. 그렇게 나는 항해사가 됐고, 다시 돌아오기를 선택했다.

2년 만에 연 모임에서 다시 만난 지인이 내게 이 책을 건넸다. 감명 깊게 읽은 책이라며 마지막 장에 '누군가에게 영감이 되어주는 사람이어주세요. 계속' 하고 글씨까지 적어주었다. 책을 받고서 적어도 어느 누군가에게 작은 영감을 주었구나, 하고 안심하였다. 많은 애정을 갖고 진행한 일이 어떤 의미를 피웠음을 알게 되는 건 기쁜 일이다.

멀리 떠나 있으면 외로워진다. 떠나 있다는 건 제 일부가 떠나온 그곳에 남아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떠나온 곳에 제 무엇을 남겨둔 채 다른 곳에서 삶을 사는 건 대단한 일이다. 외로움과 그리움을 온 몸으로 견뎌내며 살아가는 대단함, 대개 그 대단함은 대단한 것만이 남길 수 있는 것을 삶 속에 새겨놓곤 한다.

어느 대단한 삶을 축하하며

허수경 시인도 그런 사람이다. 1992년 독일로 건너간 그녀는 고대 근동 고고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현지에서 고고학 연구와 시 쓰기를 병행했다. 꾸준히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소통하며 글을 통해 독자들과 만나왔지만, 독일과 한국 사이의 거리를 온 몸으로 감당해내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허 시인을, 그녀의 글을 빚었다.
 
 어떤 가설이 옳은가, 하는 것은 두 번째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를 들여다보고 해석하는 관점입니다. 거대한 기념물은 그 기념물대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거대한 기념물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평범한 생활이 그 안에 있었고 많은 사람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이 거대한 유물 발굴에 열을 올릴 당시 유럽의 제국주의가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었지요. 그때 세계 각 지역에서 식민지들이 발생했고 국가 간의 패권주의가 인류를 전쟁으로 이끌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의 일상을 해석하는 것이 소중한 이유는 그 안에 평화주의의 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 124~125p

책엔 길고 짧은 139편의 글이 담겼다. 어느 글은 무겁고 어느 글은 가볍지만 글쓴이를 보이기에 충분할 만큼 무겁고 가볍다. 글의 내용에 대한 더 이상의 설명은 무용할 듯하다. 땅 속에 묻힌 유물을 꺼내고 친구를 만나고 물건을 사고 밥을 먹는 매 순간이 글의 재료가 됐다. 중요한 건 그녀가 겪은 일 자체가 아니라 그걸 대하는 작가의 관점이다. 가설보다도 역사를 들여다보고 해석하는 관점이 더 중요하듯이.
 
이탈리아, '만토바'라는 도시 근처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다. 발굴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발굴 차는 숙소를 찾기 위해 한참을 길 위에서 보내다가 드디어 어떤 작은 마을에서 여관을 발견했다.

여관에 짐을 부려놓고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화덕을 차려놓고 피자를 구워 파는 식당이었다. 식당에는 이미 한가득 손님들이 들어앉아 있었다. 식당 주인은 우리에게 오늘 식당에서 가족 파티가 열리니까 다른 식당으로 가라고 했다.

그때, 손님 가운데 한 사람이 "같이 앉지요, 괜찮아요" 해서 우리는 구석자리를 잡을 수가 있었다. 손님들은 다 한 가족이라는데,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거나하게 먹고 마신 그들은 서로 붙잡고 춤을 추고 박장대소하고 노래를 불렀다.

우리에게 자리를 권했던 이가 술을 권하며 우리 자리로 왔다. 그는 붉은 샴페인을 우리 잔에 부어주었다. "오늘 백열 살 된 할아버지를 묻었어요. 가족 모두가 그분의 삶을 축하하는 거랍니다." 검은 상복을 입은 이들이 호호가가 하는 모습이 기묘하기는 했으나 어쩐지 아름다웠다.

거하게, 그리고 작게 살던 분이 저세상으로 갔다. 수를 다했다. 가족들은 명복을 빌면서 축제를 벌이는 것이다. 지상의 삶과 지하의 삶이 그렇게 맞닿아 있다. - 140~141p

거하게, 그리고 작게 살던 분이 저세상으로 갔다. 허 시인이 살았을 적 나는 그녀를 알지 못했으나 시인이 남긴 글을 통해 그녀가 누구인지 알게 됐다. 시인을 좋아하던 사람 하나가 잔에 샴페인을 부어주듯 자연스럽게 그녀의 책을 선물했다. 책 뒤편에 멋진 덕담까지 적어서. 내겐 그 것이 마치 시인의 삶을 축하하는 듯 느껴졌다. 아름다웠다.

거하게, 그리고 작게 살던 분이 저세상으로 갔다. 그녀를 아는 이들은 이렇게 명복을 빌면서 저들만의 축제를 벌인다. 지상의 삶과 지하의 삶은 그렇게 맞닿아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허수경 지음, 난다(2018)


태그:#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난다, #허수경, #김성호의 독서만세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6,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