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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열단 단원들. <약산 김원봉 평전>에서 발췌
 조선의열단 단원들. <약산 김원봉 평전>에서 발췌
ⓒ 오마이뉴스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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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의열(義烈) 투쟁은 여러 독립운동 방략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투쟁노선이었다.

가장 적은 희생으로 가장 많은 효과를 내는 것이 의열투쟁이다. 또 수단과 방법, 시간과 장소, 인물과 기관을 가리지 않고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외침과 내우가 유난히 심한 우리나라는 오래 전부터 의열투쟁의 전통이 이어져왔다. '의열'이란 흔히 의사(義士)와 열사(烈士)를 가리키거나 그들의 특징적인 행동을 의미하는 용어로 쓰인다.

국난기에 관군이 패퇴하거나 적군에 투항할 때 민간인(백성)들이 궐기하여 침략자들과 싸워서, 이를 물리치거나 전세를 바꾼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여기에는 장렬한 자기 희생이 따랐다. 

임진ㆍ정유왜란 때에 의열투쟁이 강력한 저항의 모습을 보였고, 한말 일제침략기에도 수많은 의열사들이 궐기하여 의병전쟁(義兵戰爭)에 참가하고, 여의치 않을 때는 일신을 던지는 단독 의열전을 전개하였다.

1970~90년대 반독재 민주항쟁 과정에서도 수많은 재야인사ㆍ학생ㆍ노동자가 투신ㆍ분신ㆍ할복ㆍ고문사ㆍ의문사 등의 희생을 감내하면서 민주주의를 쟁취하였다. 

의열투쟁은 정규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전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사의 의열투쟁이 최근 세계 각처에서 나타나고 있는 테러와 다른 것은, 국권회복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정의의 실현방법이어서, 자신을 던지는 지극히 도덕적 수단의 목표축에 있었다는 점이다.

한말 일제침략세력과 싸운 민간병(民間兵)을 의병이라 한 것이나, 의열단의 경우,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는 공약 제1조에서 제시한 '정의'의 가치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일제는 의열단의 존재가 얼마나 공포심을 불러온 대상이었던지 일본 외무대신은 "김원봉 체포시 즉각 나가사키(長崎) 형무소로 이송할 것이며, 소요경비는 외무성에서 직접 지출할 것"이라는 요지의 훈령을 상하이 총영사관에 하달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1920년대 전반기 의열단의 투쟁역량에 대해 조선공산당은 1926년 3월 코민테른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민족혁명전선에서 직접 투쟁하는 단체는 의열단ㆍ신민부ㆍ통의부 밖에 없다."는 평가도 있었다. 

일제 군경과 관리들에게 의열단원은 염라대왕과 같은 존재로 인식되었다. 언제 어디서 불쑥 의열단원이 나타나 폭탄을 던지고 권총을 들이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두렵기는 친일파와 악질 지주들도 마찬가지였다.

의열단에서 감행한 주요 의열투쟁은 다음과 같다.

주요 의열단 활동

1920년 3~6월 : 곽재기 · 이성우 등이 국내활동에 사용할 폭탄을 밀양으로 반입하려 한 의거.
1920년 9월 : 밀양 폭탄 반입사건에 대한 응징으로, 박재혁이 일본인 부산 경찰서장을 폭상시킨 의거.
1920년 11월 : 최수봉 (최경학)이 밀양경찰서를 폭파한 의거. 
1921년 9월 : 김익상이 종로경찰서에 투탄한 의거.
1922년 3월 : 김익상ㆍ이종암ㆍ오성륜이 상하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한 의거.
1923년 3월 : 김시현ㆍ남정각ㆍ유석현 등이 경기도 경찰부 황옥 경부를 동원하여 무기와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려 한 의거. 
1924년 1월 : 관동대지진 때 한인 학살에 대한 응징으로, 구여순ㆍ오세덕 등이 국내 폭동을 시도한 의거. 
1925년 3월 : 이인홍과 이기환이 베이징에서 일제밀정 김달하를 처단한 의거.
1925년 11월 : 이종암ㆍ배중세ㆍ고인덕 등이 국외로부터 무기를 반입하여, 거사를 준비하였던 '경북의열단사건'.
1926년 12월 :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습격한 의거. 


1919년 11월 9일 (음 10월 27일) 일단의 조선청년들이 중국 지린성 파허문(巴虛門) 밖 중국인 농민 반(潘)씨 집에 모였다. 이 집은 자금의 여유가 있었던 이종암이 반씨로부터 세내어 거처 겸 연락처로 사용되고 있었다. 여기서는 가끔 폭탄제조 실험도 하였다. 일종의 비밀아지트인 셈이다.

반씨 집에 모인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까지의 조선청년 13명은 밤이 새도록 토론을 거듭하였다. 11월 초순이면 지린 지방은 벌써 눈이 덮이고 강추위가 몰아치는 계절이다. 청년들은 추위 따위는 아랑곳 없이 이날 밤 의열단의 활동지침으로 공약 10조를 결정하고, 구축왜노(驅逐倭奴)ㆍ광복조국ㆍ타파계급ㆍ평균지권(平均地權)의 4개 항목을 최고의 이상으로  내걸었다. 
 
약산 김원봉 장군은 1920년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의열단’을 창설한 인물이다. 1930년대엔 중국 난징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운 뒤 애국지사를 직접 길러냈다. 이후엔 항일운동의 선봉을 맡았던 조선의용대를 창설, 총대장을 맡았다. 일본은 약산에게 지금 가치로 320억 원 이상의 현상금을 걸었다.
▲ 약산 김원봉 장군 약산 김원봉 장군은 1920년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의열단’을 창설한 인물이다. 1930년대엔 중국 난징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운 뒤 애국지사를 직접 길러냈다. 이후엔 항일운동의 선봉을 맡았던 조선의용대를 창설, 총대장을 맡았다. 일본은 약산에게 지금 가치로 320억 원 이상의 현상금을 걸었다.
ⓒ KBS 다큐영상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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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의 명칭은 김원봉의 작품이다. '정의'의 '의(義)'와 '맹렬'의 '열(烈)'을 취하여,  '의열단'이라 명명한 것이다. 이날 창단식에 참석한 사람은 김원봉을 포함하여 13명이었다. 그런데 기록에 따라서는 참석자 중에는 몇 사람의 차이가 있다.

다음은 김원봉이 제시한 명단이다.
윤세주(尹世冑)ㆍ이성우(李成宇)ㆍ곽경(郭敬 : 일명 곽재기), 강세우(姜世宇)ㆍ이종암(李鍾岩)ㆍ한봉근(韓鳳根)ㆍ한봉인(韓鳳仁)ㆍ김상윤(金相潤)ㆍ신철휴(申喆休)ㆍ배동선(裵東宣)ㆍ서상락(徐相洛) 외 1명

창립단원들은 형제의 의를 맺고 '공약10조'로서 조직기율을 정하였다. 김원봉이 맏형격인 '의백(義伯)'으로 선출되어 단장의 임무를 맡았다. 대표자의 명칭을 '의백'이라 하고 있음은 단원 상호간의 관계를 반(半) 혈연적 운명공동체 의식으로서 묶인 일종의 형제 결연적 관계로 상정하였음을 말해준다.

초겨울 대륙의 긴 밤이 어느새 밝았다. 새날은 11월 10일, 의열단이 정식 창단되는 날이다. 회의는 밤새도록 계속되고, 그 이튿날, 곧 1919년 11월 10일 새벽에 이르러, 후일 왜적들이 오직 그 이름만 들어도 공포하고 전율하던 의열단은, 이에 완전한 결성을 보게 된 것이다. 이날 채택된 '공약10조'는 다음과 같다.

공약10조

1. 천하의 정의의 사 (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2.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 (身命) 을 희생하기로 함.
3.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됨.
4. 단의 (團義) 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함.
5. 의백 (義伯) 일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6. 하시하지 (何時何地 : 어느 때 어느 곳) 에서나 매월 일차 씩 사정을 보고함.
7. 하시하지에서나 초회 (招會)에 필응 (必應) 함.
8. 피사 (被死) 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 (盡) 함.
9. 일 (一) 이 구 (九) 를 위하여, 구가 일을 위하여 헌신함.
10. 단의에 반배 (返背) 한 자를 처살 (處殺) 함.


의열단이 창단될 때 성문화된 단의 강령 같은 것은 달리 없었다.
 
조선의열단 김원봉 단장(좌)와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서(우)
▲ IMG_1 조선의열단 김원봉 단장(좌)와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서(우)
ⓒ 신채호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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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단재 신채호의 손으로 <조선혁명선언>(의열단선언)이 쓰여질 때까지 일제와 친일파를 몰아내고, 조국을 광복하여, 계급을 타파하며, 토지소유를 평등하게 한다는 4대 목표를 최대의 이상으로 삼았다.  

'평균지권'은 의열단의 진보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조항은 지주소작 관계가 더욱 강화되어 가고 있던 조선 국내 사정을 두고 볼 때 대단히 진보적인 것이었다. 요컨대 의열단은 단순한 독립만이 아니라 사회개혁을 지향했으며 대한광복회의 진보적 노선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의열단과 김원봉 단장을 다룬 신문기사.<약산 김원봉 평전> 발췌
 의열단과 김원봉 단장을 다룬 신문기사.<약산 김원봉 평전> 발췌
ⓒ 오나이뉴스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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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의열단이 채택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공포의 "마땅히 죽여야 할 대상" 즉 '7가살(七可殺)'이다.

7가살

(1) 조선총독 이하 고관.
(2) 군부 수뇌. 
(3) 대만 총독. 
(4) 매국적.
(5) 친일파 거두.
(6) 적의 밀정.
(7) 반민족적 토호열신 (土豪劣紳 : 악덕 지방유지).


의열단은 '7가살'과 함께 5가지의 '파괴대상'도 선정하였다.

파괴대상

(1) 조선총독부.
(2) 동양척식회사. 
(3) 매일신보사.
(4) 각 경찰서.
(5) 기타 외적 중요기관.


의열단은 '7가살'과 '5파괴'를 명시적으로 규정하였다.

처단대상을 명확히 함으로써 활동목표를 적시한 것이다. 총독 정치의 우두머리와 하수인 그리고 민족반역자 모두를 세분화해서 구체적으로 '마땅히 죽여야 할 대상'으로 지목하였다.

또 파괴해야 할 핵심기관으로, 통치기관은 조선총독부, 수탈기관으로는 동양척식회사, 선전기관은 매일신보사, 폭압기구는 각 경찰서와 기타 중요기관을 적시하였다.

이는 의열단이 어느 독립운동단체보다 격렬하게 일제와 싸우고자 하는 결의, 치열함과 조선민중의 소망을 담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의열단, #7가살, #5파괴대상, #조선혁명선언, #김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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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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