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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대한의 독립을 외치고있다
▲ 3.1운동 당시 수많은 인파 많은 사람들이 대한의 독립을 외치고있다
ⓒ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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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하오 2시, 서울 인사동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에 민족지사 29인이 은밀히 모였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김병조는 독립을 알리기 위해 해외로 나가고 길선주ㆍ유여대ㆍ정춘수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길이어서 참석하지 못하였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간략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먼저 불교계 대표로 서명한 한용운이 일어나 독립선언을 알리는 식사(式辭)를 한 다음 그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하였다. 독립선언서는 전날에 이미 모두 읽은 터라 생략하였다. 

같은 시각, 종로 파고다공원에는 2천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회집(會集)하여 민족대표들의 참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족대표들은 당초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기로 했다가 학생ㆍ시민들이 일경과 충돌하면 희생자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장소를 태화관으로 바꾸었다. 

시민ㆍ학생들은 기다려도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군중 속에서 한 청년이 팔각정 위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우렁차게 낭독하였다. 낭독이 끝나자 군중들의 독립만세가 고창되고, 이어서 공원 문을 쏟아져 나와 시위행진을 벌였다. 일부 시위자들은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민족대표들은 집주인에게 경찰에 알리도록 하고, 얼마 후 밀어닥친 헌병경찰 80여 명에게 붙잡혀 남산의 외경대 경찰총감부로 압송되었다. 끌려가는 차중에서도 가두시위 군중에게 독립선언서를 던져주는 사람도 있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는 다음과 같다.

천도교측 15인 : 손병희ㆍ최린ㆍ권동진ㆍ오세창ㆍ임예환ㆍ나입협ㆍ홍기조ㆍ박준승ㆍ양한묵ㆍ권병덕ㆍ김완규ㆍ나용환ㆍ이종훈ㆍ홍병기ㆍ이종일

기독교측 16인 : 이승훈ㆍ박희도ㆍ이갑성ㆍ오화영ㆍ최성모ㆍ이필주ㆍ김창준ㆍ신석구ㆍ박동완ㆍ신흥식ㆍ양전백ㆍ이명룡ㆍ길선주ㆍ정춘수ㆍ유여대ㆍ김병조

불교 측  2인 : 한용운ㆍ배용성

 
문교출판사의 교과서에 실린 3.1독립운동 p212
▲ 3.1 독립운동 문교출판사의 교과서에 실린 3.1독립운동 p212
ⓒ 문교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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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과 시민들이 파고다공원을 뛰쳐 나와 거리행진에 나서자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석하고자 전국에서 상경한 사람들이 합세하면서 시위대는 삽시간에 수십만 군중으로 불어났다.

시위대 일부는 종로에서 광교→시청앞→남대문을 돌아 의주통으로 꺾이어 프랑스 공사관 쪽으로, 다른 일부는 종로→덕수궁→대한문 앞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 사이에 출동한 일제경찰의 제지를 받았으나 민중들은 조금도 흩어지지 않고 대열을 정비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시위 군중은 다시 여러 대열로 나뉘어 미국 영사관→창덕궁→일본보병사령부→총독부청사 앞을 행진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3월 1일의 독립만세 시위는 서울만이 아니었다.
평양ㆍ의주ㆍ정주ㆍ해주ㆍ옹진ㆍ사리원ㆍ황주ㆍ서흥ㆍ연백ㆍ수안ㆍ원산ㆍ영흥에서 같은 시각에 만세시위가 있었다. 경의선과 경원선 등 철로변에 위치한 도시들이어서 서울과 연락이 용이한 까닭이다. 

독립만세 시위는 3월 2일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서울의 여러 지역을 비롯하여 조선 8도 전지역에서 조직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벌어졌다. 민족대표들은 비폭력ㆍ일원화ㆍ대중화의 3대원칙을 제시했고, 시위군중은 이에 따랐다. 비폭력적으로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다.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 3개월 동안 전개된 시위 상황을(박은식의 <한국통사>)보면 다음과 같다. 

집회 총인원 2,023,098명,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피검자 46,948명, 불탄 교회당 47동, 불탄 학교 2동, 불탄 민가 715호 등이다. 일제는 이보다 훨씬 축소하여 통계를 조작하였다. 

3ㆍ1독립시위는 국내만이 아니었다.
한인이 모여사는 해외 곳곳에서 전개되었다. 서간도와 북간도를 비롯하여 남북만주 일대와 중국본토 여러 지역, 러시아 연해주, 미주ㆍ하와이, 일본 등지에 살던 교포들이 참여하였다. 

특히 북간도의 중심지인 용정에서는 3월 13일 1만여 명의 한인이 일본 영사관 옆에서 조선독립축하회를 개최하고 독립선언서와 별도로 제작한 '독립선언포고문'을 발표하였다. 행사를 마친 동포들은 시위에 나섰다가 일경의 무자비한 총격으로 17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중경상을 당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 

독립을 선언한 민족대표들은 총독부 경찰총감부에 끌려가 혹독한 수사와 고문을 당하고 악명 높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당초 일제는 이들을 내란죄로 엮어 중형을 선고하고자 시도하면서 일체의 가족면회를 금지하는 등 악행을 서슴지 않았다.

지방에서 상경한 3명의 지사들도 함께 수감되고, 33인 외에 독립선언서에는 서명하지 않고 '뒷일'을 맡기로 했던 지사들까지 구속되어 재판에 회부된 민족지사는 48인이 되었다. 

〈독립선언서〉는 손병희의 지시를 받은 최남선이 집필하고, 선언서 뒤의 '공약3장'은 한용운의 작품이다. 독립선언서는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책임자 이종일의 주도로 2만 1천매를 인쇄하였다. 인쇄 도중에 총독부의 한인 형사가 들어와 적발될 위기에 처했으나 손병희가 거금을 줘서 입을 막았다. 

보성사는 또 <조선독립신문> 제1호 1만부를 찍어 3월 1일 서울시내에 살포하는 등 몇 차례 지하신문을 발행하였다. 이 신문은 곧 가정부(임시정부)가 세워지고 대통령은 손병희, 정체는 민주공화제로 한다는 내용을 실었다. 지하신문은 이외에도 여러 차례 곳곳에서 제작되어 만세시위와 함께 살포되었다. 태화관과 보성사는 얼마 후 의문의 화재로 전소되었다. 

기미년 만세시위는 어느날 갑자기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거사가 아니었다. 동학혁명ㆍ독립협회ㆍ만민공동회ㆍ의병투쟁ㆍ신민회 등 국내의 민족운동과 1917년 7월 해외독립운동가 14인의 '대동단결선언', 1919년 초 해외독립운동가 39인의 '대한독립선언', 같은 무렵 상하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의 파리강화회의 대표파견과 국내 파견, 도쿄 유학생들의 2ㆍ8독립선언, 그리고 윌슨 미국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등 역사의 맥락과 조직 그리고 국제환경을 포착하여 이루어진 한민족의 위대한 혁명이었다.

민족대표들은 독립만 선언한 것이 아니었다. 임규와 안세훈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 내각 및 의회에 독립선언서를 제출케 하고,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 대표들에게 독립원조 청원서 등을 영문으로 번역, 전송키 위해 현순을 상하이로 파견하였다. 

자료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민족대표들이 재판정에서 판검사의 심문에 "독립된 나라의 정체는 민주공화"였음을 진술한 것으로 보아, 독립이 되면 민주공화제를 채택하기로 사전에 뜻을 모았던 것 같다. 상하이에 수립된 임시정부가 이를 받아 민주공화제를 채택한 데서도 알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3.1혁명, #태화관, #손병희, #보성사, #조선독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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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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